2화
“계시자의 시험을 위한 준비. 여기서 한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계시를 받고 온 녀석인가?”
그 순간 그림자의 목소리가 살짝 굳어짐을 느꼈다.
“……잠깐. 그럼 더 이상한데. 아직 위에선 선별 중이라고 들었다고. 명단은 오늘 저녁이나 내려올 거라고 했는데…….”
“그러겠지. 그래서 지금 온 거야. 선별자들이 오기 전에 먼저 와야 내가 녀석들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으니까.”
퉁-
그는 조금 전 은행에서 뽑은 현금 다발이 들어 있는 가방을 그에게 던졌다.
“필요한 게 있다.”
“돈? 장난해? 뭔가 알고 온 거라면 이걸론 어림없다는 걸 알 텐데. 여긴 이런 종이쪼가리론 살 수 있는 게 없어.”
수천만 원이 넘는 큰 금액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저었다.
“가져가는 게 좋을걸. 지옥문이 열리고 2년 뒤에 있을 칠흑의 밤이 지나고 난 뒤엔 갖고 싶어도 못 갖는 거니까. 내게 엎드려 절하며 감사하다고 하게 될걸. 기억해. 내게 엄청난 빚을 진 거니까. 잊지 마라.”
“2년 뒤? 뭔 헛소리를. 네놈이 미래라도 알고 있단……?!”
콰앙---!!!!
그때였다.
“아하. 이 새끼 이거……!!”
기둥 뒤에서 폭음이 터져 나오며 남궁의 얼굴을 뭔가가 움켜잡았다.
“우히, 우크크크킥!!”
기둥 속에 가려져 있던 그림자의 얼굴은 괴상하기 짝이 없었다.
짙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
도깨비를 닮은 듯한 우락부락한 얼굴과는 달리 어울리지 않게 붉은 입술과 창백한 얼굴.
“네가 그 새끼로구나. 666,666마리의 마족을 죽인 살인자!!!”
“살인이라…… 말 함부로 하는군. 그것들은 인간이기라도 하나?”
“크크크…… 간땡이가 붓긴 했네. 지옥문이 열리기도 전에 날 찾아오다니. 어떻게 계시에 대해서 안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짓을 하면 대놓고 네놈이 회귀자라는 걸 알리는 꼴일 텐데?”
그 순간 놈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왜? 설마 우리가 모를 거라 기대한 건 아니겠지. 크, 크큭. 처음부터 우린 알고 있었다. 시간축이 비틀렸다는 걸.”
그리고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넌 이제 좆됐어, 인마. 회귀하면 세상 다 네 뜻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
그 손가락은 신(神)을 가리키는 것일 테다.
“그건 가봐야 알겠지. 싫어할지, 흥미가 있을지.”
남궁의 대답에 그는 웃었다.
벌어진 입 안쪽으로 보이는 굵은 송곳니.
확실히 인간이 아니었다.
당연했다. 야차는 별명 같은 게 아니다.
놈의 일족 이름이었다.
“여긴 위상들이 만들어놓은 놀이판이야. 그걸 용케 뒤집어봤자 그들의 화만 돋울 뿐일걸. 낄낄낄!!”
야차는 괴물 같은 고성을 터뜨리며 말했다.
“손 치워. 냄새 난다.”
“이 새끼…….”
남궁은 자신의 얼굴을 움켜잡고 있던 야차의 팔목을 툭툭 건들며 말했다.
“모르는 건 네놈이다. 시간 회귀. 그 안배 역시 놈들이 만들어놓은 거잖아. 놈들이 화를 낸다고? 아닐걸.”
평범한 사람들이 본다면 그 얼굴만으로도 오금이 저려 주저앉았을 것이다.
푹-! 푸욱-!
하지만 남궁은 오히려 자신의 얼굴을 움켜잡고 있는 손목에 뭔가를 찔러 넣었다.
“크악!!!”
등산용 나이프였다.
어느 틈엔가 야차의 팔목에 3개의 나이프가 박혔고, 비명과 함께 야차가 팔을 뿌리치며 물러났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잘라 버리려고 했는데. 아직은 무린가. 하긴, 아직 룬도 특성도 아무것도 없으니까.”
남궁은 마치 힘이 없는 평범한 자신이 새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 쓰벌……!! 이 새끼가 뒈질려고!!”
콰앙--!!
그 순간, 남궁은 자신의 앞에 있던 돈다발을 들어 사정없이 야차의 머리에 내리꽂았다.
“켁!!”
“머리는 장식이 아냐. 회귀자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 퀘스트를 완성했다는 뜻이다. 내 손에 666,666 마족이 모두 모가지가 잘려 나갔다는 말이지.”
꿀꺽-
그 순간 야차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고작 인간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미 그의 손바닥은 축축하게 땀이 맺혀 있었다.
“까지 마, 새끼야. 그래 봐야 지금은 아무런 힘도 없는 인간에 불과한 주제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야차는 으르렁거리듯 남궁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일 텐데. 지옥문이 열리고 나서야 야차들도 인간을 죽일 수 있지. 그게 규율이잖아?”
“그, 그건…….”
“시끄럽고 열기나 해.”
하지만 야차의 경고에 관심도 없다는 듯, 남궁은 그의 이마에 난 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 아악! 뭐, 뭘 열어!”
“뭐긴.”
어쩐지 남궁은 조금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야차 보따리.”
“……아, 개새끼. 모르는 게 없네. 진짜 미치고 환장하겠군.”
야차는 그제야 포기한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계시자도 아닌 놈에게 그걸 열면 위에서 난리가 날 텐데.”
“어쩔 수 없었다고 해. 지옥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그 어떤 마물도 인간에게 손을 대지 못하니까. 죽도록 맞고 결국 열어주고 말았다 정도면 대충 넘어갈걸. 어차피 네 정도가 내 회귀를 감지한다면 윗선은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죽도록 맞고?”
“그 정도는 돼야 좀 현실감이 있잖아.”
“큭!!”
남궁이 야차의 팔목에 박혀 있던 나이프를 뽑자 야차의 머릿속에 온갖 상상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퍼억-!!
그 순간 그의 주먹이 야차의 얼굴에 꽂혔다.
“켁!!!”
뒤로 벌러덩 자빠진 야차가 주저앉은 코를 감싸며 소리쳤다.
“……빌어먹을!!! 3일 뒤에 넌 뒤졌어!! 내 손으로 네놈을 죽인다. 계시자의 시험을 빼앗으려는 걸 보니 전생에 계시자는 아니었단 말일 터. 네놈이 그걸 깰 수 있을 것 같아? 기대해. 지옥문이 열리자마자 내가 널 찾아갈 테니까!!”
“오면 나야 좋지.”
그 순간 남궁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야차 일족 제2위계 규류(糾謬).”
“너, 너…… 어떻게 내 진명(眞名)을…….”
야차는 자신의 이름을 남궁이 말하자 당혹감을 넘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네가 말해준 거야.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네가 더 잘 알 테지만.”
뿔을 살짝 들어 올려 그의 뺨을 가볍게 툭 치면서 남궁은 말했다.
움찔-
야차의 어깨가 가볍게 떨렸다.
‘말도 안 돼. 내가…… 설마 저놈에게 복종이라도 했다는 말이야?’
야차의 진짜 이름.
진명(眞名)을 안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남자를 보고 있노라니 본능적으로 부정할 없는 뭔가가 있었다.
“우리 꽤나 인연이 깊거든.”
오싹-
자신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남궁의 말에 규류는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망할.’
자신을 마치 먹잇감으로 바라보는 듯한 그의 얼굴이 말하고 있었다.
골수까지 탈탈 털어 빼먹을 놈이었다.
‘젠장. 저렇게까지 나오는 놈을 무슨 수로 막아? 규율을 어긴 것도 아니고……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고.’
우우우우웅…….
고개를 숙이며 인상을 찡그리던 야차는 결국 자신의 허리춤을 움켜잡았다.
‘에라이. 나도 모르겠다. 위에서 알아서 하겠지.’
그 순간 남궁의 눈앞에 투명한 창 하나가 떠올랐다.
▶ 야차 보따리를 확인하시겠습니까?
* * *
남궁은 눈앞에 나타난 창의 목록을 스크롤했다.
거기에는 하나같이 군침이 돌 정도로 눈이 돌아가는 아이템들이 쌓여 있었다.
넘버링 230.
이름 : 별해검
등급 : 레어(최초)
▶ 신족의 대장장이가 만든 별을 가른다는 검.
▶ 소지자의 역량에 따라 성장한다.
▶ 날카로운 예기를 뿜는다.
▶ 예기의 끝을 알 수 없다.
스크롤을 내리던 남궁은 보따리의 무구 중 하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팔무성 중 한 명인 알렉이 쓰던 검이로군. 이것도 보따리에 있었던 건가…….’
남궁은 익숙한 그 검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마치 게임처럼 설명이 붙어 있지만 그 설명이 조금은 모호했다.
‘예기를 뿜는다. 단순히 생각하면 날카롭게 잘 잘린다는 뜻 정도로 보이지만…….’
그 앞에 붙은 성장하는 검이라는 것과 예기의 끝을 알 수 없다는 설명이 이 검의 특이점을 만들었다.
‘알렉은 정말로 별 하나를 갈라 버렸으니까.’
레어 등급의 무구는 앞으로 크게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제법 흔한 등급이었다.
하지만 그가 죽기 전 별해검의 등급은 2단계 성장한 유니크(Unique)였다.
남궁이 회귀하던 시점의 지옥문에서도 20개가 채 되지 않던 귀한 것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지.’
그는 스크롤을 넘겼다.
탐이 나는 물건이었지만 어차피 지금으로서는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이유는 설명 아래 적혀 있는 가격이었다.
가격 : 1,000,000헤드(Head).
헤드는 단순한 화폐가 아니었다.
마물의 머릿수를 뜻했다.
사냥에 성공할 때마다 헤드는 자동적으로 적립되었다.
최하급인 고블린의 경우가 1마리에 1헤드.
100만 헤드를 언제 모으냐 싶지만 마물의 등급이 올라갈수록 주어지는 헤드의 수도 커진다.
‘그래도 저걸 직접 산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최소 3년 뒤나 돼야 가능할까.’
그렇다면 팔무성인 알렉은 어째서 저 비싼 무구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을 수 있었을까?
답은 가격 아래에 있었다.
▶ 추가 : 무구의 주인이 허락 시 획득 가능.
‘알렉이 클리어한 계시자의 시험이 별해검의 주인이 만든 것이었으니까.’
그런즉슨, 퀘스트의 공략자인 그가 보상으로 저 검을 얻었을 가능성이 컸다.
“미친……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는 거야? 어차피 살 수 있는 것도 없는데.”
규류는 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남궁을 바라보며 기분 나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에게 맞은 코가 아직도 시큰거렸다.
사실 규류의 말대로 보따리 안에 들어 있는 무구들은 대부분 그랬다.
넘버링 2432.
이름 : 외눈박이의 장갑
등급 : 매직(최고)
▶가격 : 300,000헤드
넘버링 355.
이름 : 고대 엘프의 활
등급 : 레어(최고)
▶가격 : 750,000헤드
…….
아직 지옥문이 열리지 않았으니 마물이 나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당연히 헤드로 아이템을 살 수 있을 리 없었고, 별해검과 같이 특수한 조항이 있다 하더라도 계시자의 시험을 클리어하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별해검을 얻을 수 있는 계시자의 시험 불카누스의 시련은 내가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기도 하고…….’
남궁이 노리고 있는 계시자의 시험은 따로 있었다.
“무슨 꿍꿍인지는 모르겠지만 야차 보따리 안에 있는 물건들은 지금 얻을 수 있는 게…….”
“알아.”
규류는 자신의 말을 끊어먹는 남궁에 못마땅한 듯 입술을 씰룩였다.
“내가 노리는 건 위상들이 만든 물건이 아냐.”
위상(位相).
소위 우리가 말하는 신족, 마족, 정령족 등과 같은 세계를 내려다보는 천외의 존재들이 일컫는 총칭.
지옥문을 연 자들이기도 했다.
“……그럼?”
“그보다 훨씬 더 가치 없는 것. 하지만 지금 내게는 이런 위상들의 보구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이지.”
남궁은 스크롤의 마지막에 멈춰 섰다.
넘버링 394810.
이름 : 야차 일족의 양피지
등급 : 매직(최초)
▶ 8개의 대리자 일족 중 하나인 야차 일족이 만든 특수한 용지.
▶ 여러 가지를 기록할 수 있다.
▶ 기록된 내용은 야차의 역량하에 발현할 수 있다.
▶ 사용 대가를 치러야 한다.
가격 : 80,000헤드
▶ 우호도가 높을 시 야차 일족이 당신께 선물할 수도 있다.
“…….”
규류는 남궁이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며 얼굴을 구겼다.
“이거.”
그리고 그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내게 선물해라.”
남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