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270)

1화

검은 갑옷을 입고 붉은 안광을 가진 기사가 잘린 목을 들고서 서 있었다.

세월이 지나 검붉게 굳은 혈흔 위로 쌓이고 쌓인 핏물로 범벅이 된 기사는 한 남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크르르르…….]

남자의 앞에 서 있는 기사는 인간이 아니었다.

갑옷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이따금 투구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연기 같은 뿌연 기체였다.

[끼아아아악--!!!]

폐허와 다름없는 도시 상공 위로 눈동자를 닮은 거대한 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선 여전히 알 수 없는 마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지옥문이라 명명한 차원 통로가 열린 지 25년.

세상은 변했고 인류는 멸망했다.

자신을 제외하고.

끼이익-

남자는 폐허와 다름없는 부서진 가게의 문을 열었다. 바닥에는 그가 사용한 듯한 다 뜯어진 침낭과 가죽을 벗긴 말린 고기들이 걸려 있었다.

퉁-

그는 낡은 바에 앉아 고이 모셔 두었던 술병을 꺼냈다. 병 안에는 간신히 한 모금 할 정도의 술만이 남아 있었다.

아끼고 아껴 마셨지만 거의 바닥을 보였다. 그래도 이 날을 위해 마지막 한 모금을 남겨둔 것이다.

쪼르륵-

그는 보물을 다루듯 잔을 따랐다.

“후우…….”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그는 술잔에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고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철컥-

결심이 선 듯 바의 뒤 창고의 문을 열었다.

우우우웅…….

놀랍게도 가로등 하나 성한 곳이 없는 도시였지만 창고 안엔 간이 발전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솨아악……!

문을 열자 뼈를 찌르는 듯한 냉기가 밀려들어 왔다. 검은 기사가 남자에게 들고 있던 잘린 머리를 건넸다.

창고의 깊이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현실의 것이 아닌 이계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놀라운 것은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었다.

장치들이 덕지덕지 달려 있는 거대한 창고 안에는 수많은 잘린 머리가 가득했다.

무려 666,665개.

퉁-

그리고 지금 남자는 마지막을 채워 넣었다.

[캬아아아악---!!!!]

그 순간 잘린 머리들이 마치 발광하듯 괴상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남자의 표정은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눈을 부릅뜬 채로 자신을 향해 악을 지르는 머리들의 표정은 가지각색이었지만 공통된 점이 있었다.

색이 다른 오드아이, 뾰족한 송곳니, 날카롭게 세워진 귀까지…….

인간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내가 네놈 따위에게…….]

그때였다.

조금 전 던져 넣은 잘린 머리가 눈을 부릅뜨며 남자를 향해 말했다.

“불사와 영혼을 다루는 마족이라더니…… 팔다리가 갈리고도 살아 있는 건가.”

[……하나만 묻자. 이런 미친 짓을 해서까지 네가 원하는 게 뭐지?]

“나는 과거로 돌아간다.”

[과거를 간다고 미래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아? 네놈은 그래 봐야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딸을 만날 거다.”

[고작 그것 때문에?]

잘린 머리는 무슨 헛소리냐는 듯 남자를 향해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고작?”

남자는 25년 전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아니, 잊을 수 없었다.

푸욱-!!!

잘린 머리의 정수리에 남자는 단검을 박아 넣었다.

[크아아악……!!!]

“고작 그것 때문에 목숨을 거는 자도 있다.”

비명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몇 번이나 더 단검을 찔러 넣었다.

모든 인류가 사라지고 666,666개의 상급 마족의 머리로 주술을 일으키면, 시간축을 비틀 수 있다.

미친 소리 같지만 이것밖에 기댈 수 없었다.

[그들이…… 가만있을 것 같아?]

남자는 마족이 누구를 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위상(位相).

소위 신이라 칭해지는 8명의 천외자들.

차원문을 연 장본인들이자 이 세계를 지옥으로 만든 빌어먹을 존재들이었다.

“그래. 놈들이 알아차릴지도 모르지. 이것 역시 놈들이 만들어놓은 안배니까.”

그는 차갑게 웃었다.

“하지만 놈들은 전능(全能)하지만 전지(全知)하진 않아.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안배라도 내가 회귀자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지는 못할 거야.”

촤아악……!!

남자는 마족의 머리에 박아 넣은 검을 뽑았다.

“그게 위상이든 뭐든 간에…….”

그 순간 풍기는 살기는 마족의 주검을 보관한 창고 속 냉기보다 더 차가운 것 같았다.

“날 방해하면 모두 죽여 버린다.”

화르르륵--!!!

그 순간, 마족의 잘린 머리들이 검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 그루터기의 악마를 사냥하였습니다.

▶ 현존하는 모든 상급 마족의 주검을 모았습니다.

▶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 모든 조건을 완수하였습니다.

▶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도시의 알림이 울렸다.

사실 도시라고 불리기도 뭐한 참혹한 폐허.

그중에 하나인 서울.

남자가 해낸 일은 엄청난 일이지만 아무도 살아 있지 않는 유령도시엔 환호성이 들리지 않았다.

[크르르르…….]

다만 그의 뒤에 서 있던 기사만이 마치 작별 인사를 하는 듯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 하지만 그때는 지금과 분명 다를 거다.”

남자는 그를 향해 말했다.

“이 세계를 이렇게 만든 빌어먹을 놈들을 우리 발밑에 무릎 꿇게 만들 테니.”

솨아아아악……!!

그의 시야가 새하얗게 변했다.

▶ 시공진(時空陳)이 발동합니다.

* * *

눈을 떴다.

침대 위였다. 불이 꺼진 방.

아직은 가장 먼저 보인, 부서지지 않은 천장이 오히려 낯설었다. 주먹을 쥐었다가 펴보기도 했고.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뒤집어 보았다. 잘렸던 새끼손가락은 깨끗하게 붙어 있었고 상처투성이에 굳은살이 박혀 있던 손바닥은 말끔했다.

“…….”

남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은편 거울 속의 자신은 온전한 집보다 더 낯설었지만 그는 자신에겐 관심도 없는 듯 핸드폰을 들었다.

“돌아왔다.”

2020년. 10월 8일.

액정에 적혀 있는 숫자와 함께 잠금 화면에 보이는 아이의 얼굴.

그는 다급히 문을 열었다.

아직은 이른 새벽.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방의 침대에 화면 속 아이가 고스란히 잠들어 있었다.

들리는 숨소리가 들렸고 발그레한 뺨에서 생기가 느껴졌다.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잠들어 있는 아이는 분명 살아 있었다.

“……소민아.”

주르륵-

그 순간, 그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토록 다시 만나고 싶었던 한 사람.

자신의 딸이었다.

새근…… 새근…….

천사 같은 그 뺨을 어루만졌을 때 남궁은 그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와락-!!

남궁은 아이를 끌어안았다.

“우웅…… 아빠?”

아직 잠에서 덜 깬 아이는 눈을 비비며 자신을 끌어안은 남궁을 바라봤다.

“보고 싶었어.”

“뭐래…… 밤늦게…… 어서 자.”

아이는 더 자고 싶은 듯 귀찮다는 표정으로 남궁의 품을 벗어나 침대에 누웠다.

이제 겨우 만 13살.

예전엔 훌쩍 커버렸다고 생각했던 딸이었는데.

남궁은 새삼스레 딸의 손이 너무나도 여리고 작다고 느꼈다.

꽈악-

그는 딸의 손을 잡았다.

“너무…… 보고 싶었다.”

지옥문이 열렸던 그날, 순식간에 무너진 집의 잔해에 깔린 피투성이 손이 아니다.

“우리 딸.”

그는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 그 손을 잡은 채 눈을 감았다.

“됐어…… 이제 됐어…….”

북받쳐 오는 감정에 그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새겼다.

25년간의 지옥 같았던 기억들이 그의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쳐갔지만, 자신의 딸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을 보상 받는 기분이었다.

“10월 8일…….”

하지만 그것도 잠시, 본능적으로 남궁의 전신을 가득 채우는 감각은 그토록 바랐던 딸을 만났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 아니었다.

경고처럼 그의 머릿속을 울리는 생각.

그는 알고 있었다.

파괴되지 않은 이 현실이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을.

지옥문이 열리기 3일 전.

이변이 생기는 그날 세상은 완전히 바뀐다.

“내가…… 이번엔 널 지킬 수 있을까.”

오직 그것 하나만을 위해 살아 왔지만, 막상 다시 그 지옥을 떠올리자 남궁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떨렸다.

자신 혼자 살아남는 것이 아닌 여리고 작은 이 아이를 지킨다는 것은 수많은 위험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었으니까.

꽈악-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하는 것.

▶ 미약한 영혼을 감지했습니다.

▶ 영혼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 능력치 : 영력을 습득하였습니다.

▶ 사령술(초급)을 깨우칩니다.

▶ 영혼의 눈 Lv1이 발동됩니다.

“……!!”

그때였다.

머릿속에 울리는 알림에 남궁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능력이 사라지지 않았어?”

우우우웅…….

남궁은 자신의 두 손에 나타난 마법진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째서……? 문이 열리려면 아직 3일이나 남았는데…….”

이유는 알지 못했다.

시간축을 비튼 것에 대한 영향인지 회귀자의 특전인지…….

다만 분명한 건 전생의 능력이 개안(開眼)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액자를 감싸고 있는 옅은 연기를 보며 남궁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건 병원 침대에 누워 갓 태어난 신생아를 안고 있는 여인의 사진이었다.

“수아…….”

생전(生前) 아내의 마지막 사진.

남궁은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부르며 떨리는 손으로 액자를 집었다.

▶ 미약한 영혼이 당신을 위로합니다.

▶ 영혼의 영령이 당신에게 스며듭니다.

주르륵…….

남궁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액자를 끌어안은 채 주저앉고 말았다.

간신히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지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너를…… 볼 수 있다니.”

남궁은 안개 같은 그 연기를 만지려 했다.

하지만 그저 아무것도 만지지 못한 채, 그의 손은 허공을 통과할 뿐이었다.

“흐어…… 흐어어억…….”

꼴사나운 모습일지 모르지만, 남궁은 그렇게 액자를 끌어안은 채로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몇 시간을 울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끔찍했던 전생에 얻은 능력이 처음으로 감사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남궁은 영혼이 스며든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고서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약해지지 말자.”

남궁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짜악-!!

자신의 뺨을 양손으로 힘껏 때리자 얼얼한 느낌과 함께 이제야 현실을 똑바로 직시할 용기가 생겼다.

‘……지금이 중요하다.’

단순히 과거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25년 동안 겪었던 전생에서 보고, 듣고, 수집했던 모든 기억을 동원해, 전생의 자신은 얻지 못했던 수많은 업적들을 달성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과거 팔무성(八武星)이라 불렸던 여덟 명의 강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상에게 선택받은 계시자들이라 하였고, 지옥문이 열린 후 누구보다 빠른 성장을 이루었다.

‘한때 인류의 구원자라 칭송받기도 했지.’

팔무성의 생존자 중 한 명이 죽기 전 남궁에게 이런 얘기를 했었다.

“우리가 남들보다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은 남들보다 빠르게 지옥문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남궁은 그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10월 11일.

마물을 쏟아내던 지옥문은 그날 동시다발적으로 전 세계에 생성되었기 때문이다.

“지옥문이 열린 것은 11일이 아니다.”

생존자는 그에게 비밀을 말했다.

3일 전, 이미 지옥문은 열렸다.

“……계시자의 시험.”

그것은 오직 위상에게 선택받은 8명만이 받을 수 있는 일종의 혜택이었다.

‘그것을 통과한 자는 위상의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그들은 세상이 바뀐 날이라 인식하는 10월 11일에,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보상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었다.

“이번엔 내가 가지겠다.”

남궁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은 울림이었지만.

독식(獨食)의 시작이었다.

* * *

을지로 지하상가.

층계를 내려가자 밝은 한낮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음산한 한기가 느껴졌다.

“…….”

남궁은 주위를 둘러봤다.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그는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끼이이익-

그러고는 낡은 상가의 문을 열었다.

문은 조금만 힘을 주어도 당장에 부서질 것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영업 전이오. 이상한 일이군. 아직은 찾아올 사람이 없을 텐데…….”

아무도 살지 않을 폐허처럼 보이는 건물 안에서 놀랍게도 소리가 들렸다.

“아직 찾아올 사람이 없다라…… 손님이 올 걸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오늘 꼭 찾아올 사람이라도 있나 보지?”

“……무슨 일로 오셨소?”

“물건을 좀 사러 왔다.”

건물의 기둥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그림자를 향해 남궁이 말했다.

“야차(夜叉).”

멈칫-

그 순간 자신을 향해 걸어오던 그림자가 멈췄다.

“……너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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