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화
“몇 년 만에 듣는 Eternity냐…….”
Eternity 라이브 무대는 데뷔 쇼케이스와 첫 번째 콘서트 이후 6년 만이었다. 팬들 사이에서도 Eternity 라이브 무대를 본 사람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고 할 정도였다. 승빈도 이런 팬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매번 Eternity를 요청받을 때마다 지금 부르면 그때의 느낌이 안 날 거라는 이유로 정중히 거절하곤 했다. 그런 곡이었기 때문에 공연장의 팬들이 더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혹시 넘어지더라도
빛을 향해 일어설게
절대 포기하지 않아
너와 나의 Eternity]
혜진은 조금 화가 날 정도였다. 그때와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대체 왜 데뷔 초 느낌이 나지 않을 거라고 걱정을 한 것일까. 분명 그때보다 노련해진 보컬 실력과 무대 매너였지만, 풋풋함이 여전했다. 그동안 승빈이 프로 아이돌이 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풋풋함 대신 노련함과 프로미가 채워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노래를 부르는 순간만큼은 정말 데뷔 쇼케이스 날을 떠올리게 했다. 풋풋함은 신인에게만 한정된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고정 관념이 산산조각 난 순간이었다.
“7년 차가 이럴 수 있는 거야……?”
하이라이트 파트가 끝난 후 잠시 반주만 흐르는 사이 핀 조명 하나만 남고, 팬라이트가 원격 조종되어 색이 바뀌었다. 구간별로 하나씩, 일곱 빛깔 무지개가 완성되었다. 승빈이 손을 흔드는 방향에 맞춰 팬들도 야광봉을 흔들었다. 무지갯빛 물결 한가운데서 노래를 부르던 승빈도 감격스러운 눈으로 한 바퀴 빙글 돌면서 관객석을 감상했다.
[영원을 약속해
이제 한 걸음 남았어
뒤돌아봐 줄래
오랜 시간을 달려온 내게
손 내밀어 줘]
가사 타이밍에 맞춰 승빈이 손을 뻗었다. 손끝의 움직임마저도 아름다웠다. 눈 위를 살짝 덮는 흑발 생머리가 새하얀 피부와 대조되어 승빈 특유의 청순한 매력을 강조하기에 충분했다. 붉은 기가 도는 눈화장까지 처연한 분위기까지 자아냈다.
“이런 애를 어떻게 안 좋아해?”
감격스러우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걱정이 밀려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승빈은 무대 위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하지만 크리드 활동이 끝나게 된다면 연기로 진로를 변경할 가능성이 높았다. 주변의 아이돌 출신 배우들의 정석 루트였으니까.
“그냥 계속 가수 해 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아.”
닿지 않을 것만 같은 소원이었다.
* * *
눈앞에 펼쳐진 무지갯빛의 향연에 잠시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넋을 놓고 무대 이곳저곳을 눈에 담았다. 하늘에 뜬 별도 이보다 반짝일 수 없고, 이 우주 어느 곳에서도 이보다 아름다운 무지개는 없을 것이다.
[I dream in your eternity
꿈처럼 영원한 이 순간
두 눈을 뜨면 어느샌가
아스라이 멀어지는 Your eternity]
Eternity는 유독 자신이 없는 곡이었다. 서바이벌 1위 혜택이었지만, 그만큼 부담을 느끼게 한 바로 그 곡. 하지만, 데뷔 초 혼신의 힘을 다해 준비한 솔로곡이기도 했다.
만약 지금 부른다면, 그때와 같은 감동을 선물할 수 있을까? 그동안은 그런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비겁하게도 몇 년 동안 부르지 못한 노래였다. 하지만, 이번 콘서트에서는 꼭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일종의 쇼케이스와 같은 날이니까.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수십 번 되뇌었다.
‘데뷔 쇼케이스처럼만 하자…….’
사실 데뷔 쇼케이스의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그때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무대를 마치자 홀가분한 기분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마음의 짐으로 남았던 것을 말끔히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Eternity 진짜 오랜만이었죠?”
“응!”
“데뷔한 해 이후로 거의 처음인 거 같은데, 제가 계속 이 노래를 피해 왔잖아요. 뭔가 클로버들도 서운했을 거 같아요.”
“…아니야!”
솔직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한 박자 느린 부정에 웃음이 터졌다.
“뭔가 이 노래는 데뷔 초반의 내가 아니면 완벽히 소화하기 힘든 곡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보다 노래 실력도 좋아졌고, 무대 위에서 표현도 풍부해졌는데 뭔가 신인일 때만 낼 수 있는 감성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아니야!”
“고마워요, 역시 클로버들은 솔직해! 방금 전 아니야!랑 엄청 다른 거 알아요?”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분위기를 뒤집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 7주년이잖아요. 지난 7년 동안 정말 많이 성장했다는 걸 이 노래에 도전함으로써 보여 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제 입으로 말하기 민망하지만… 정말 데뷔 쇼케이스로 돌아간 듯했습니다.”
“완전!”
“최고였어!”
“아마 쇼케이스 당시 저를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을 거 같은데, 그때가 좋아요, 지금이 좋아요?”
“다 좋아!”
솔직히 일부는 그때를 얘기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모두의 목소리가 하나로 겹쳐진 것은 처음이었다. 이곳의 모두가 그때부터 나를 사랑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부터 좋아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언제가 되더라도 우리가 한 공간에서 감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니까.
“그때의 저도, 지금의 저도 사랑해 줘서 너무너무 고마워요, 클로버. 저도 그때와 지금의 클로버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이 사랑해요.”
시간이 지나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 준 사람들이다. 물론,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고, 어쩌면 미워하게 된 사람이 있겠지.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 어느 순간만큼은 그 사람들의 사랑으로 행복할 수 있었으니까. 그것만 기억하기로 했다.
* * *
승빈의 솔로 무대 이후 재봉과 지운의 솔로 무대가 이어졌다. 재봉은 청춘물 주인공과 같이 청량한 무대를 준비했다. 제목은 [Blue summer], 여름에 딱 맞는 청량하면서도 싱그러운 매력이 돋보이는 곡이었다.
[널 만난 순간
내 세상은 온통
파랗게 물들어 버려
이토록 푸르게 빛나
나의 여름이]
지운의 솔로 무대 역시 예측 불가능한 무대였다. 처음으로 도전한 귀여운 콘셉트에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로봇 고양이 귀에 발랄한 비비드 색감의 의상까지- 차지운 큐트파라면 정신을 잃고도 남을 무대였다. 심지어 제목은 [Love Bomb].
[이리저리 움직이는 너의 Heart
꼼짝 마 순간 터져 버릴
L-L-L Love Bomb
조심해 심장이 쿵 하고
사랑에 빠져 버릴 수도 있어]
K는 이미 실성한 상태였다.
[ㅅㅂㅅㅂㅅㅂㅅㅂ차지운 고양이 귀]
[주님 한명 올라갑니다]
역시 7주년 콘서트인 만큼, 예측 불가능한 무대를 준비한 것이 크리드다웠다. 지운의 솔로 무대를 끝으로, 잠시 공연장이 암전되었다. 그리고 화면 가득 문구가 떠올랐다.
[세계의 균열 속, 소년들은 자신들의 유토피아를 발견했다. 소년들이 도착한 세계는 온통 초록빛의 클로버로 가득했다.]
앞선 무대와는 사뭇 다른 캐주얼한 사복을 입고 등장한 멤버들이 우편함에 편지를 넣었다. 우체통의 이름은 [THANK YOU CLOVER], 콘서트명이었다.
“드디어 올 게 왔구나…….”
VCR이 끝나고, 다시 무대 위로 올라온 멤버들이 각자 준비한 편지를 읽는 시간이 왔다. 여기서부터 혜진은 조용히 생수병을 들었다. 분명 탈수가 올 때까지 울 것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멤버들 모두 울음을 터트렸다. 눈물이 적은 정유현마저도 몇 번이고 말을 멈추면서, 팬들에 대한 감사를 전했다.
“지난 7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해 주시고, 응원해 줘서 고맙습니다, 클로버.”
우려했던 활동 종료, 해체 등의 발언은 없었다. 혜진은 그것이 멤버들이 팬들에게 표하는 마지막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런 멤버들을 옆에서 담담하게 격려해 주던 승빈의 차례가 되었다.
“안녕, 클로버! 뭔가 편한 말투로 쓰려니까 어색하네.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길게 편지를 써 보는 거 같아. 우리 벌써 7주년이 되었어. 투마이월드에서는 데뷔가 아득했고, 데뷔한 후에는 한 해 한 해가 멀게만 느껴졌어. 우리는 예정된 헤어짐을 알고 시작한 사이였잖아. 매 순간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 행운이었지만, 자꾸만 조바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아.”
헤어짐이 예정되었기 때문에 매 순간이 소중하게 느껴진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해 왔다니, 혜진은 또 한 번 승빈에게 감탄했다. 분명 피하고 싶은 현실이었을 텐데, 직면하는 것을 넘어서 새롭게 정의를 해 왔던 것이니까.
“하지만, 함께 더 있고 싶다는 소망만으로 남들은 안 될 거라고 했던 일을 해냈고 지금까지 함께할 수 있었어! 내 청춘의 모든 페이지에 함께해 줘서 감사해,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을 담아 말할게. 사랑해, 내 모든 마음을 다해서!”
혜진을 포함한 클로버들은 승빈의 소감에 울다가, 웃다가- 온갖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탔다. 눈물을 참으며 예쁘게 웃는 얼굴이 전광판을 가득 채웠다. 감동적인 와중에도 오늘 비주얼 미쳤다는 세속적인 감상에 잠긴 자신이 민망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 문승빈의 비주얼 컨디션은 최상이었으니까.
“우리에게 7주년은… 어쩔 수 없는 이별을 의미하기도 해.”
“안 돼…….”
마이크를 쥔 승빈의 손이 서서히 떨려 왔다. 주변에서는 탄식 소리와 함께, 벌써부터 울음을 터트린 사람도 있었다. 혹시나 하는 희망이 있었지만, 역시 이번 콘서트는 해체 전 마지막 콘서트인 것이었다.
“이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랐지만, 어쩔 수 없이 와 버렸네.”
처음에는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승빈을 계속 좋아하고 있을까 반신반의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이라도 더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고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을 돌렸지만, 현실이 되어 버리자 당황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승빈이 몇 번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결코 슬픈 날로 기억되지 않을 거야.”
“어떻게 그러겠어…….”
우리는 늘 여러분 곁에 있을 거니까요, 서로 떨어져도 언제나 크리드를 기억할 거니까요- 따위의 말들이 최선일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듣고 싶지 않았다. 차마 승빈의 입으로 직접 들을 자신이 없었다.
“왜냐하면, 오늘은 우리의 또 다른 시작이거든. 7년의 시간을 정리하고, 또다시 크리드라는 이름으로 달려 나갈 시간의 시작.”
승빈의 뺨 위로 눈물 한 줄기가 반짝였다. 하지만, 일말의 슬픔도 얼굴 위에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행복해서 흘리는 눈물이라고 해야 설명이 가능한 표정이었다.
“…뭐?”
혜진은 한동안 승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들었는데도 해석이 안 되는 순간이었다.
7년의 시간, 또 다른 크리드의 시작… 그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으니까.
“재재계약?”
정말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그녀의 덕질 인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