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화
첫 번째 솔로 활동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으며 종료됐다. 3주간의 활동 동안 한 번도 1위를 놓치지 않았다. 여전히 타이틀곡 ‘Universe’는 차트 1위를 지키고 있었고, 수록곡 역시 100위 안에 머무는 등, 음원과 앨범 모두 최고의 성적을 거뒀다.
“오~ 남자 솔로 새 역사를 쓴 문승빈~”
“그만 놀려라-”
낯간지러운 별명까지 생기고 말았다. 화보 촬영, 인터뷰, 음악방송, 예능 등… 하루를 48시간으로 살아도 모자랄 만큼 바쁜 활동기를 보냈다. 그리고 오재성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상태창이 찾아왔어. 이건 말해야 할 거 같아서 염치 불구하고 편지를 보낸다. 마지막 기회를 주는데,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후 새로운 시작을 하는 거래. 그런데 그건 싫다고 했다. 앞으로 나에게 실망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려고 해. 그리고 아직도 배우의 꿈은 못 놓았다. 아마 상태창의 행운은 허락되지 않겠지. 하지만 상관없어. 그럴 자격도 없고. 허락되지도 않을 거니까. 이번에 끝내면 다음은 없는 거잖아?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 보려고 해. 한 번쯤은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으니까. 그리고… 그동안 미안했다.]
녀석에 대한 동정도, 원망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아마 아주 오랫동안 오재성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녀석도 알겠지, 이렇게 용서받기엔 너무 무거운 잘못인 것을.
하지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 역시 삶을 살아야 할 테니까. 이번엔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용기 있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었다. 여러 번 고민했지만, 굳이 답장은 하지 않기로 했다.
* * *
영화 개봉부터 크리드 단체 활동, 솔로 앨범 활동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다. 그리고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기. 이번에는 이 주일이라는 시간이 주어졌고, 정말 오랜만에 멤버들과 해외여행을 계획했다. 다들 그 어느 때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여행 계획을 세웠다.
“바다는 무조건 봐야 해요!”
“저녁에는 고기 구워 먹자!”
“이번엔 레저 스포츠도 하고!”
“너무 기대돼!”
이렇게까지 긴 휴가는 처음이라서 모두 들떠 있었다. 여행지는 미국으로 정했는데 미국은 환장 여행을 제외하고는 항상 스케줄로만 갔던 곳이었다. 공항, 숙소, 스케줄, 숙소 그리고 다시 공항으로 오는 게 정해진 루트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제대로 관광도 하고, 원 없이 놀아 보자는 멤버들의 의견을 반영했다.
그리고 도착한 캘리포니아의 바다, 우리는 반짝이는 에메랄드 바다로 몸을 던졌다.
“다들 선크림은 잘 발랐어?”
“헉, 저 안 발랐어요!”
“야, 박선우. 빨리 나와서 바르고 가! 지난번처럼 다 타 가지고 돌아가지 말고!”
바다 앞에서도 그나마 평정심을 잃지 않은 유현이 형이 멤버들을 살뜰히 챙겼다. 문제는 선우 형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선크림을 바르지 않은 상태였다. 선우 형 뒤를 따라 줄줄이 소세지처럼 줄을 섰다. 유현이 형과 매니저 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히히, 이제 지운이 형도 완전 우리한테 동화된 거네요?”
“문승빈도 안 바르고 들어갔을 줄이야?”
“죄송해요, 바다 보자마자 너무 신나서…….”
“저, 근데 도착하자마자 발랐는데…….”
매니저 형은 형의 얼굴에, 유현이 형은 내 얼굴에 선크림을 꼼꼼히 발라 주면서 말했다.
“됐어. 너는 좀 그래도 돼.”
그 말을 듣고 이미 얼굴에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른 네 명이 일제히 외쳤다.
“우린 안 돼요?”
“어~ 너넨 철 좀 들어야 해.”
“너무해!”
“그러게 평소에 어른스럽게 행동하든가~”
말은 그렇게 해도 유현이 형의 광대가 내려올 줄 몰랐다. 하긴, 곁눈질로 본 네 명의 얼굴은 누구라도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자미눈을 하고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있었으니까.
물놀이에 지친 상태로 먹는 라면만큼 별미도 없었다. 물론 한 가지 예외도 있었지만.
“대박, 선우 형이 끓인 라면은 물놀이 하고도 맛없음!”
“진짜 대단한 발견이다, 도현아~”
“아! 사실을 말 한 건데!”
물놀이는 하루종일 계속됐다. 다양한 놀이를 한 것도 아닌데, 그저 멤버들과 있다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마이크 걱정 안 하고 물놀이하는 게 얼마 만이야?”
“맞아. 화장이랑 머리 걱정도 안 하고-”
저녁은 멤버들의 성원대로 바비큐 파티를 열었다. 박재봉이 자신도 이제 요리 실력이 늘었다며 고기 굽기를 자처했고, 결국 선우 형까지 셋이 굽게 되었다.
“진짜로 이제는 꽤 잘하네?”
“오면서 위튜브로 공부 좀 했죠~”
“언제 이렇게 컸냐?”
아직도 투마월 첫 녹화 날 질문을 멈추지 않았던 중학생의 얼굴이 남아 있는 거 같은데, 몸은 훌쩍 컸다. 이젠 윤빈 형과 맞먹을 정도니까.
“윽, 선우 형, 또 고기 태웠어요?”
“이게 생각만큼 잘 안된다니까?”
“둘 다 진짜 하나도 안 변했어.”
“엥? 저 얼마나 커졌는데 하나도 안 변했다니요?”
“야, 난 어제보다 오늘 더 잘생겼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
역시 우리 사이에 분위기 잡는 건 사치였다. 하고 싶은 말은 간단했다. 너처럼 막내다운 막내가 우리 팀이어서 기뻤고, 투마월에서 처음 친해진 게 형이어서 다행이었다고.
“둘 다 한결같이 바보 같잖아요.”
어디선가 그런 걸 본 거 같다, ‘바보 같다’라는 말은 사실 사랑한다는 말과 같다고.
“참나, 너도 바보 같거든?”
“형도 만만치 않게 바보 같아요, 혼자 똑똑한 척하다니!”
“그래, 그래. 나도 사랑해-”
“엥? 갑자기?”
“이 형아를 너무 좋아하는구만? 그래, 기분이다. 너희 둘 다 이리 와!”
“아, 저 형 또 시작이네. 됐거든요? 이제 나보다 작으면서-”
“아, 고기 탄다고!”
“헉, 유현이 형이다!”
결국 저 둘은 쫓겨났다. 대신 지운이 형과 유현이 형이 혼신의 힘을 다해 고기를 살렸다.
“고기 구우라니까 뭔 바보, 사랑해- 하고 있어?”
“우리 팀이 사랑이 넘치는 걸 어떻게 해요~”
“다들 벌써 취했구나…….”
“아니, 지운이 형이 그렇게 말하면 진짜 같잖아요!”
이렇게 바보같이 굴어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로 둘도 없는 행운이 아닐까?
* * *
저녁 식사를 마치고 멤버들과 다시 바다를 찾았다. 둘 다 적당히 취해 있어서 바다엔 들어가지 않고, 모래사장에 주저앉았다.
“솔로 활동 수고 많았어.”
“형도 매번 아침 챙겨 줘서 고마웠어요.”
“…시간 진짜 빠르지 않아?”
“벌써 6년이나 지났네요.”
“이제 내년이면…….”
형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아마 계약 종료에 대한 얘기였겠지. 7년이라는 시간은 정식 그룹의 계약 기간과도 같다. 기간제로 시작한 우리가 7년이나 함께했다는 것만으로도 전례가 없는 일이기도 하지.
“내년엔 얼마나 더 멋지게 활동하고 있을까요?”
“…그래. 실력도 더 늘고, 더 멋져진 모습이겠지?”
불확실한 미래를 불안함보다는 기대로 채우고 싶었다. 너무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고민하기엔 현재가 너무 찬란하니까.
“아직은 걱정하고 싶지 않아요.”
“미안, 내가 괜한 얘기를 꺼낸 거 같네.”
“에이, 그게 당연한 거죠. 사실 저도 요즘 매일 그 생각을 해요. 크리드가 아닌 나는 어떤 모습일까… 근데, 아직은 그렇게 미래를 단정 짓고 싶지 않아요. 어쩌면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기회가 있을 수 있잖아요.”
유현이 형의 눈가가 반짝이고 있었다. 맞다, 이 형 술에 엄청 약하고 드물게 감성적이게 되지.
“난 정말, 우리 팀을 만나서 한순간도 행복하지 않은 날이 없었어.”
“제가 말 안 들을 때도요?”
“당연하지. 박선우, 박재봉, 강도현이 다같이 까불 땐 조금… 힘들긴 했지만, 그것마저도 행복했어.”
“다행이에요.”
“너희는 내 꿈을 이루게 해 줬으니까.”
꿈을 꾸는 자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도, 크리드 아닌 내가 잘 상상이 안 가. 하지만 되도록 오래 이 모습을 유지하고 싶어.”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우리 아직 못 한 게 너무 많아요. 멤버들, 팬들과 함께 더… 더 성장하고 싶어요.”
노을이 서서히 지고, 하늘이 오렌지빛이 될 무렵이 돼서야 멤버들은 물 밖으로 나왔다. 나는 모래 사장 위로 잠시 누웠다. 노을진 하늘도 어느새 검푸른 색을 띄기 시작했고, 별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새 윤빈 형도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여유로운 것도 몇 년 만이죠?”
“응.”
나는 손틈 사이로 모래가 빠지는 것을 느꼈다.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쉬지 않고 달린 레이스의 끝엔
부드러운 바람이 날 감싸고
소중한 사람들의 미소가
나의 목적지가 되어
나를 미소 짓게 하네]
“그거, 원더레인의 레이스지?”
의도하진 않았지만, 당장 떠오른 노래가 하필 이 노래였다. 무려 16년 전 윤빈 형과 처음 만난 날 불렀던 노래.
“기억하네요?”
“당연하지. 그걸 어떻게 잊어?”
“그때도 말했지만, 고마워요. 형 덕분에 가수라는 꿈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인연이란 참 신기한 거 같아요.”
“인연?”
“이 넓은 우주에서 우리가 지구에 태어나고, 아주 우연히 같은 시대와 차원을 살아가고, 이렇게 만나서 동료가 됐다는 거, 그게 인연이에요.”
“운명 같은 거네?”
“맞아요. 나랑 우리 멤버들 그리고 클로버도 다 운명이야.”
“뭔가 로맨틱하다.”
“전부 우리가 만든 운명이에요.”
“정해진 게 아니고?”
“그럴 리가요? 형, 그 어떤 운명도 정해진 건 없어요.”
나는 슬쩍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하늘과 바다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지만, 저 멀리서 반짝이는 별을 보며 말했다.
“이 모든 순간을 운명이라고 말 할 수 있기까지… 정말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요.”
“차원까지? 너무 거창한 거 아니야?”
언제부터 있었는지, 강도현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반대편을 보니 지운이 형이 입꼬리에 호선을 그으며 웃고 있었다. 마치, 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듯했다. 이젠 나의 이야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
“그 거창함을 이겨 내야 만들 수 있는 게 운명인 거야-”
“와, 누가 보면 인생 2회 차인 줄 알겠어.”
지운이 형과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풉!”
“뭐야? 지운이 형은 왜 같이 웃어요?”
“우리 몰래 비밀이라도 만들었죠!”
“궁금하게 뭐야?”
일곱 명이 모이면 한시도 조용할 틈이 없다.
“맞다, 불꽃놀이!”
“그걸 까먹을 뻔했네!”
박재봉과 선우 형이 스파클라를 가져왔다. 반짝이는 불꽃과 온 마음 다해 행복해하는 멤버들의 미소, 하늘에서는 별들이 쏟아지고 있었고, 바다 내음을 품은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고마워, 모두.”
무심결에 튀어나온 진심은 파도 소리에 묻힌 듯하다. 하지만 상관없다. 말하지 않아도 모두의 마음에 닿았으리라 확신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