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337화 (337/346)

337화

“다 울었어?”

“…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같이 왔어야 했는데.”

유현이 형의 눈도 토끼 눈이 된 지 오래였다.

“죄송해요, 놀라게 만들어서…….”

“죄송하다는 말 좀 그만해. ”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오늘 처음 음식을 입에 댔다.

“하루 종일 쓰러져 있었고, 지금 겨우 먹는 거니까 천천히 먹어. 급하게 먹다가 속 버린다.”

“네.”

“일단 고비는 넘겼다고 했어. 수술도 잘 마쳤다고 했고. 이제 의식만 돌아오길 바라야지.”

지금은 그저 형이 살아 있다는 것이 감사할 뿐이다. 그 후로 유현이 형은 억지로라도 대화를 이어 갔다. 아마 올해 할 대화를 다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까, 새벽이 가까워지는 시간에 잠이 들 준비를 하던 중, 매니저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형. 지금 승빈이랑… 네?”

유현이 형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하얗게 질렸다. 불안함이 엄습해 왔다.

“지, 지금 바로 갈게요. 네, 네. 성훈 매니저님 차 타고 바로 갈게요.”

“형,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지운이가 위독하대.”

이건 너무 가혹한 것 아닌가? 지금껏 이 세계의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다는 건 알았다. [얻은 게 있다면 잃는 게 있고, 잃는 게 있다면 얻는 것이 있다]. 그동안 내가 얻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형을 잃어야 하는 것일까.

정신없이 병실로 달려갔다. 형의 심박수가 불규칙적으로 널뛰고 있었다. 지운이 형의 부모님은 잠시 혼절하셨고, 유현이 형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박재봉과 선우 형을 데리고 잠시 자리를 피했다.

병실에는 나와 강도현, 지운이 형만이 남았다. 강도현은 텅 빈 눈으로 물었다.

“왜 지운이 형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

“나는 이제 더 이상 힘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 너무 많은 일이 있었잖아.”

“의식이 없어도, 다 들린다고 했어. 우리 좋은 말만 해 주자.”

아침까지만 해도 밖에 나간 둘처럼 무너져 있던 윤빈 형이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처음엔 엄청 많이 부딪치고, 싸웠었잖아. 그때마다 지운이 형이 있어서 부드럽게 해결할 수 있었어.”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 하는 개그도 재밌었고.”

“나 이제 제대로 웃어 줄 수 있는데…….”

장점이 끊이지 않는 형이었다. 한참을 말해도 더 할 말이 있었으니까.

정말 내가 얻은 것 때문에 형을 잃는 것이라면, 나는 너희를 포기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아니다. 이제 멤버 한 명 한 명이 형만큼이나 소중했다.

“나는… 둘 다 잃고 싶지 않아.”

“응?”

그리고 그 순간, 상태창이 검붉은 빛을 내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11시 59분을 지나고 있었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에너지였다. 익숙하지 않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심이 됐다. 뭐가 됐건 이제는 결판을 지을 수 있으니까.

* * *

오재성의 상태창이 소멸될 때보다도 더 기분 나쁘게 뒤엉킨 공간이었다.

[잃을 것을 두려워했다면, 얻지도 말아야 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면 기회조차 주지 말았어야지.

“잃을 게 두려워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그게 삶이겠어? 종이 인형이지. 그보다도, 왜 나였어야 했지? 왜 지운이 형이어야 했지?”

[간절했던 네 소원을 들어준 것뿐이다. 하지만, 네가 내 손을 벗어나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 건 명백한 실수이자 나에 대한 도전이었지.]

“겨우 인간 따위가 도전한 게 괘씸해서 그랬다?”

납득할 가치도 없는 이유에 주먹을 쥔 손이 떨려 왔다. 그저 상태창의 장난으로 놀아나기에는 형의 희생은 값어치가 너무 컸다.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언제는 기회를 잡아서 운명을 바꾼 게 죄라고 하더니, 마지막 기회를 준다니?

[회귀 전 세계의 네가 궁금하지 않은가?]

지운이 형의 사고 이후의 내가 있다고? 회귀 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래, 보여나 줘 봐. 대신 이번에도 얄팍한 술수를 쓴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 고물 쓰레기 X끼야.”

‘고물 쓰레기’라는 표현에 상태창이 더욱 격렬하게 지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익숙한 불쾌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시공간이 뒤틀리면서 사방이 비어 있는 공간으로 이동했다. 그러다가 공간이 다시 흘러내리더니 촬영장으로 보이는 공간으로 변했다.

그리고 인터뷰를 하는 내 모습이 보였다.

“이번에 새로 들어간 작품이 화제인데요, 김 감독님과의 케미가 아주 멋졌습니다.”

“저 역시 정말 좋아하는 감독님인데, 함께 작업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김 감독의 페르소나’라는 별명까지 생겼는데 알고 있었나요?”

“영광입니다. 너무 과분한 수식어지만…….”

김 감독의 페르소나? 회귀 전 사건 이후 나는 꾸준히 연기 활동을 해 왔구나. 핸드폰으로 확인한 연도는 지운이 형의 사고 이후 1년 뒤였다.

“1년 뒤를 보여 준다고?”

이전에 상태창이 보여 준 파노라마는 모두 과거였기 때문에, 핸드폰으로 날짜를 확인하거나, 기사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곳은 그 모든 것이 가능했다. 마치, 그저 보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말 회귀 전 세계에 온 듯했다. 그곳에서 나는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 이름을 검색했다.

[업계 톱 20대 남자 배우로 발돋움한 배우 문승빈]

[김성진 감독과의 세 번째 작품…]

[멈추지 않는 흥행 가도… 문승빈의 다음 작품은?]

새로운 커리어를 쌓아 가고 있었고, 누구보다 촉망받는 배우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그때도 상태창이 있었다. 화면을 잠시 전환되어 상태창을 확인하며 스텟을 올리는 내 모습을 보여 줬다.

[회귀 전 그날로부터 1년 뒤 너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상했다. 지운이 형의 이름을 검색했을 땐, 그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게 무슨……?”

[회귀 전 마지막 순간 이후로 차지운은 결국 깨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이건 내가 주는 마지막 배려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지. 이곳에서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차지운을 계속 기다릴지, 아니면 차지운에 대한 기억이 없는 저곳으로 다시 돌아갈 것인지. 선택은 네 몫이다.]

상태창의 메시지가 사라지고, 눈앞에 또 다른 내가 나타났다. 아마 방금 내가 본 ‘나’겠지.

“솔직히 말해서 차지운이랑 그렇게 각별한 사이도 아니었잖아?”

“뭐?”

“너야 같이 성공한 아이돌의 삶을 살았으니 차지운이 애틋하겠지. 하지만, 지금 난? 전혀 아니야. 난 이미 이 세계에서 너무 잘 지내고 있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네가 포기하라고. 어차피 네가 이곳에 온다면 모든 기억은 다 사라지고, 나로 살 수 있어. 그런데 네가 그곳에 남아 있으면, 내 상태창이 자꾸 불안정해지거든?”

내 얼굴을 하고 발악하는 꼴을 보자니, 그럴 상황이 아님에도 실실 웃음이 났다.

“하, 그따위 생각을 하고 산다고? 내가?”

“그, 그따위?”

“X발, 환각을 보여 줘도 제대로 보여 줘야지. 그때의 내가 겨우 1년 만에 이런 사람 이하의 것이 된다고? 너무 모욕인데?”

“이 새X가!”

분명 주먹으로 맞았는데, 온몸이 내동댕이쳐질 정도의 충격이었다.

“내가 바랐던 게 여기 전부 다 있어. 만약 네가 그걸 앗아 간다면… 너 따윈 없는 게 훨씬 나아.”

내 얼굴의 가면을 쓴 저놈이 뭐라고 지껄이든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전부 네가 바랐던 거라고?”

“그래!”

“인기랑 명예, 돈? 그게 전부인 거냐?”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런 인간이 잠깐 본 연습생들의 무대에 심장이 두근거렸고, 어쩌면 무대에 다시 오르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만으로 이미지에 도움도 되지 않는 아이돌 서바이벌 MC를 했겠는가?

[그곳으로 돌아간다면 자연스럽게 상태창은 사라지고, 그동안 네가 상태창으로 얻은 모든 걸 잃게 되겠지. 그럴 자신이 네게 있을까?]

상태창은 끈질겼다. 아픈 곳만 긁어내는 것도 재능이긴 했다. 솔깃할 거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상태창으로 얻은 포인트를 걸고넘어지는 것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이미 그 포인트가 내 실력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아니까.

눈앞에서 파노라마처럼 여러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상태창 스텟이 오르거나 특별 아이템을 활용해서 내가 무언가를 이뤄 냈던 장면들이었다. 투마월에서 1위를 하고, 크리드로 상을 받는 순간까지. 마치 모든 게 상태창 덕분인 것처럼.

“끝까지 최악이네.”

[※상태창을 유지하겠습니까?]

[☞YES/NO]

눈앞에 다시 [YES/NO]창이 떴다.

“네가 하나 간과한 게 있는데… 난 이 세계에 인기나 명예 따위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온 것이 아니야.”

주저앉은 나를 내려다보는 또 다른 나와 상태창을 한껏 비웃었다. 너무 큰 충격을 흡수해서인지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였지.”

“차지운의 운명 하나 바꾸지도 못한 네가 운명 운운하는 게 우습지 않나?”

“계속해 봐. 언제라도 저 고물 덩어리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니까.”

나는 몸을 짓누르는 중력을 거스르며 겨우 한 발 걸어 나왔다. 떨리는 손으로 NO를 선택하려 하자, 또 다른 내가 나에게 물었다.

“겨우 기억이 그렇게 중요해? 어차피 다 잊어버릴 일인데.”

기억은 ‘겨우’라는 말로 평가 절하 될 수 없다. 정말로 기억이 사라진다고 한들, 내가 이곳에서 형과 다시 한 그룹이 되고, 크리드라는 그룹의 메인 보컬이 되어 여섯 명의 또 다른 형제가 생기고, 가늠할 수 없는 클로버들의 사랑을 받은 일은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그 모든 일들이 거짓말이 되는 게 아니니까.

“적어도 누군가는 기억하겠지. 우주 속 먼지가 되더라도 언젠가 닿는 곳이 있겠지. 내가 형과 멤버들, 팬들과 만났던 건 절대 변하지 않는 사실이야.”

“아직 헛소리할 힘이 남았나 보지?”

“넌 기억을 잃은 사람이 또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냐?”

“…뭐?”

“세상은, 네 생각보다 더 정해진 운명과 다르게 움직인다고, 이 겁쟁이들아!”

상태창이 다시 발광하며 억지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손을 반대 손으로 힘겹게 붙잡았다. 더 이상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이건, 내 선택이 아니잖아……!”

“이 또한 네 운명인 거야, 불쌍한 놈.”

점점 손에 힘이 빠졌다. 차라리 내 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전지적인 존재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손가락이 [YES]를 향해 움직였고, 자포자기하려던 찰나였다.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나니, 오히려 머리가 맑아졌다. 만약 형과 이곳에서의 기억을 잃는다고 해도 반드시 같은 선택을 하겠다고. 문스트럭이 나를 발견하고 팬이 된 것처럼, 나 역시 모두를 알아보겠다고.

‘미안해, 형. 약속 못 지킬 거 같다.’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얼굴은 역시나 형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어주지 못한 부탁이어서 그런가. 형은 지금 마지막 생사의 기로에 서 있으니 당연히 나를 도와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간절히 형의 이름을 떠올렸다. 이 세계는 이제 사라지겠지.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손가락을 허망하게 지켜보던 찰나, 무언가 내 손을 잡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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