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혼자라면 부끄러움에 필사적으로 참았겠지만, 내 옆으로 널브러진 다른 배우진들도 마찬가지여서 다행이었다. 내 배 위로 사선으로 엎드려 있던 유현재도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얼굴을 닦아 내고 있었다.
“땀 닦지 마요-”
“아이 씨, 그래 땀이다, 땀! 오늘 왜 이렇게 더워-”
현장 스태프들과도 정이 많이 들었다. 배우들이 움직이지 않자 찾아온 김 감독님의 눈에도 물기가 서렸다. 서 있는 채로 배우들을 내려 보던 감독님도 어느새 잔디 위에 누웠다. 그렇게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촬영의 남은 여운을 흘려보냈다.
더 오래 있다가는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멤버들이 보낸 밥차를 핑계로 일어섰다.
“오늘은 저희 멤버들이 쏩니다! 빨리 가서 맛있는 거 먹자고요-”
“그래요. 더 누워 있다간 여기 눈물로 채울 수 있을 거 같아.”
“현재 형, 눈은 떠져요?”
“몰라, 인마.”
다들 눈가가 빨갛거나, 퉁퉁 부어 있어서 밥차로 가는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우리 지석이… 삼시세끼 안 주면 화내서 밥차 보내요…★]
“이, 이게 뭐야?”
상상도 못 한 멘트에 얼어붙었다. 옆에서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들썩이는 유현재와 감독님을 보니 더 민망했다.
“어우, 멤버들 멘트 선정 한번 강렬하네.”
“그럼… 화내는 장면 찍을 때 감정 좋았던 날은 삼시 세끼 못 챙겨 먹었던 날이었나?”
“아니에요!”
‘박재봉이냐, 박선우냐…….’
매니저 형에게 물어보니 멤버들이 철저하게 비밀로 준비한 거라고 했다. 단체 메신저 방에 들어가 말없이 사진만 보내니 곧 채팅방이 ‘ㅋㅋㅋㅋ’로 도배되었다.
[승빈: 자수해라]
[승빈: 누군지 지금 말하면 조용히 넘어갈게]
[승빈: 내가 언제 삼시세끼 안 주면 화냈냐ㅡㅡ]
[도현: 그건 알려줄 수 없다 승빈아]
[선우: 대신 메뉴는 지운이 형이 엄선했어^^]
[재봉: 맞아요! 지운이 형이 형 좋아하는 메뉴들 정리해서 그거 참고해서 주문했어요]
[선우: 음료는 유현이 형이랑 지운이 형이 골랐구]
[승빈: 다른 애들은 뭐 했냐?]
[도현: 우리는… 밥차에 사랑을 보냈어!]
[승빈: 지금 강도현 사랑이 들어간 밥을 먹으라는거임?]
[도현: ㅇㅇ감동이지?]
[승빈: 굶어야지]
[도현: (화내는 이모티콘)]
누가 봐도 화제를 돌리는 게 티가 났지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멤버들의 귀여운 장난 정도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메뉴를 보니 정말 내가 평소 잘 먹는 음식들이었다. 가장 놀랐던 것은 내가 편식하는 재료까지 챙겼다는 거다. 메뉴 중 그 어디에도 당근이 보이지 않았다.
[재봉: 맞다, 형 싫어하는 당근도 뺐답니당]
[도현: 지운이 형이 완전 세세하게 정리해놔서 놀랐음]
[선우: 형 거의 영양사임ㅇㅇ]
멤버들의 메시지를 보며 웃는 나를 힐끗대던 유현재가 장난 반, 진담 반 우는 소리를 냈다.
“아~ 좋겠다. 멤버들이 밥차도 보내 주고.”
하긴, 하이드 멤버들과는 편하지 않은 사이가 되어 버렸으니 밥차나 커피차를 보낼 일도 없었겠지.
“…형 다음 작품할 때 하나 보내 줄까요?”
“됐어. 진짜 부러워서 한 말 아니거든?”
“음료 뭐 잘 마셔요?”
“나 초코라떼.”
‘부러워서 한 말 맞구만, 뭐.’
“의외인데요? 곧 죽어도 아메리카노 마실 줄 알았는데.”
“왜 이래. 내가 생긴 건 이래도 달달한 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생긴 건 인정하는 거예요?”
“진짜 한마디를 안 놓친다, 너.”
촬영 종료를 기념해서 단체 회식을 하는 자리에서 마지막 소감을 전했다.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이번 겨울, 봄 행복했습니다! 함께 했던 그라운드 위가 오랫동안 그리울 거 같아요. 3개월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석이로 살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정말 후회 없이 최고의 연기로 지석이란 친구를 세상에 보여 주고 싶었어요. 소중한 기회 주신 감독님, 작가님 너무 감사합니다. 동료 배우분들도 함께 연기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아침까지만 해도 아쉬움이 남았지만, 마지막 촬영을 하며 자신했다. 이보다 더 완벽한 지석은 없을 거라고. 다행히 이런 마음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모든 캐릭터가 제 자식 같고… 작가님과 함께 시나리오 작업하면서 많이 웃고 울었습니다. 제 상상과 글 속에 있는 캐릭터들을 살아 숨쉬게 만들어 준 우리 배우님들 모두 감사합니다. 특히 승빈 씨, 지석이라는 캐릭터는 승빈 군만이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 제 생각이 옳았어요.”
배우라는 직업이 매력 있는 이유는, 내가 아닌 인물의 삶을 잠깐이나마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글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는 점은 언제나 가슴 뛰는 일이다. 그렇기에 김 감독님의 마지막 말은 배우로서 들을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이었다.
* * *
무료하게 오전 작업을 마친 K는 침대에 누워 아무 생각 없이 짹짹이에 올라오는 글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하마터면 핸드폰을 얼굴 위로 떨어트릴 뻔했다.
“솔, 솔로 앨범?”
그녀는 몇 번이고 기사 헤드라인을 확인했다.
[크리드 차지운, 솔로 앨범 준비 중…]
인기 남성 아이돌 그룹 크리드의 차지운이 솔로 앨범 준비의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동안 크리드 타이틀곡과 수록곡 등 10곡이 넘는 곡에 참여하는 등 프로듀싱 능력을 보여 줬던 만큼, 이번 솔로 미니 앨범도 전곡 작사 작곡에 참여했다. 관계자는 “크리드의 첫 솔로 앨범 활동인 만큼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이다. 곧 뮤직비디오 촬영이 계획되어 있고, 5월 중 활동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그동안 그룹 활동을 통해 큰 인기를 얻은 차지운이 성공적인 솔로 데뷔를 해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솔로 미니 앨범… 전곡 작사, 작곡 참여…….”
짹짹이는 차지운의 솔로 활동 소식에 대한 얘기로 가득했다.
[눈 깜짝할 사이 우리 눈앞에 놓인 차지운 솔로]
이제 두달도 안 남은 거잖아?
-지금 너무 좋은데 얼떨떨함
-일단 즐겨
-ㅈㄴ기대된다 크리드 음악이랑은 또 다를 거 같아서
-전곡 작사 작곡 ㅁㅊㅋㅋㅋㅋㅋ큐ㅠㅠㅠㅠㅠ
[갑분차지운 솔롴ㅋㅋㅋㅋ]
솔직히 문승빈이나 강도현 같은 애들이 먼저 해야 하는거 아닌가?ㅎ 차지운이 노래나 춤에 특출난 것도 아니고 프로듀싱은 윤빈이 더 잘 하지 않나?ㅋㅋ
-어그로 ㄲㅈ
-지운이 까려고 괜히 윤빈이 데려와서 올려치기하는 거 ㅈㄴ없어보임
-응~ 그래봤자 작년 앨범 타이틀곡 전부 지운이 참여함ㅇㅇ 능력이 없어서 대상 3관왕 그룹 타이틀곡 작업함ㅠㅠ
-타멤프지만 지운이에 대한 공격은 내 최애에 대한 공격임
그동안 다른 멤버들에 비해 이렇다 할 개인 활동을 하지 않은 지운이었기 때문에, 이번 솔로 활동 소식이 더욱 놀라웠다. 지운의 팬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어서, 다들 얼떨떨한 분위기였다.
“혼자 무대를 채우는 지운이라니…….”
다른 멤버들의 능력치와 비교되어 저평가받는 멤버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활동으로 그 아쉬움을 모두 해소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벅차오르는 K다. 하지만, 동시에 성적을 두고 늘고 물어질 어그로들과 팬덤 내부 악개들과의 싸움이 예정되었다는 점에서 머리가 아파 왔다.
그럼에도, 일단은 통장 잔고부터 확인하는 그녀다.
“내가 공방, 팬싸 올출의 역사를 쓰고 만다.”
* * *
지운이 형의 타이틀곡 뮤직비디오에는 모든 멤버가 카메오로 출연하기로 했다.
“혼자 촬영하면 심심했을 텐데, 고마워.”
“근데 재봉이랑 선우 형이 더 신난 거 같은데?”
“저 둘도 진짜 특이하지 않아요? 거지 역할 하고 싶다고 먼저 말할 줄이야.”
“민속촌 거지 알바 하는 게 버킷리스트였다잖아.”
“심지어 선우 형은 완전 애기 때 엑스트라로 거지 역할 했었다는 게 제일 의외였어.”
멋있고, 잘생긴 역할을 하겠다고 싸울 줄 알았던 둘이 헤진 옷에 먼지 묻은 분장을 할 줄이야. 지운이 형의 이번 솔로 타이틀곡 ‘적화(赤花)’는 동양 판타지 콘셉으로, 뮤직비디오 배경은 조선 시대다. 멤버들은 중간중간 깨알같이 등장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커피차랑 간식도 고마워.”
“이거 승빈이 형이 엄청 고민해서 고른 메뉴예요-”
“그래?”
“형처럼 좋아하는 음식, 못 먹는 음식 하나하나 정리는 못 하지만…….”
“에이, 뭐 그런 걸 기억하고 있어-”
“다음에는 꼭 해 줄게요!”
“맞아. 형 1위 하면 그때 해 줄게요!”
“알았어, 기대한다?”
예전이라면 극구 사양했겠지만, 이젠 적당히 받아치기까지 하는 형이었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형의 이번 솔로 콘셉은 ‘붉은 꽃’이라는 뜻을 가진 제목처럼 무대 세트와 의상, 메이크업 등에 붉은 계열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형과 무척 잘 어울렸다. 허리까지 오는 장발까지 소화하는 지운이 형의 비주얼에 감탄했다. 특히, 동양 판타지에 걸맞게 현대 무용이 가미된 안무가 많았는데, 흩날리는 의상과 멋진 시너지를 냈다.
[오늘 밤 저 달이
붉게 피어올라
한 송이 꽃을 피워 내
네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이제 승빈 군과 칼싸움 장면 촬영할게요-”
“헐, 나도 저 역할 한다고 할걸!”
“넌 거지 역할이 하고 싶다매-”
“저렇게 멋진 옷 입을 줄 몰랐죠!”
나는 어쩌다 보니 최종 보스 역할을 하게 되었다. 가장 연기력이 필요한 장면이기도 하고, 회귀 전 사극을 촬영하면서 검무를 배운 적이 있어서 해당 역할에 선정되었다.
나는 형과는 반대로 백색과 청색이 주를 이룬 의상과 스타일링이었다. 데뷔하고 이렇게까지 장발은 처음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치렁치렁 따라오는 장발이 적응이 안 됐다. 회귀 전에도 장발 스타일링은 해 본 적이 없었거든.
“잘 어울리네!”
“그래요? 아직 어색해요. 얼굴에도 자꾸 붙고…….”
“이제 사극 캐스팅도 들어오는 거 아니야?”
“뭐야, 장발까지 했어요? 아, 내가 했어야 했는데!”
“가발 써 보고 싶어? 가서 한번 씌워 달라고 해 봐. 몇 개 있던데.”
“진짜요? 아싸!”
박재봉은 호기롭게 들어갔다가 자꾸 입에 들어가는 머리카락을 주체 못 하며 나왔다. 그래도 역시 비주얼은 여전했다.
“…장발 안 할래여.”
“현명한 선택이다, 재봉아.”
“그래도 기념으로 한 장 찍어 볼게요!”
“야, 유현이 형도 봐 봐!”
“…와우.”
윤빈 형의 외마디 감탄사에 뒤돌아보니 역시 절로 박수가 나오는 비주얼이었다. 대충 얹은 머리라는 걸 믿기 힘들 정도의 얼굴이었으니까.
“형은 꼭, 사극 찍어요.”
“머리 너무 걸리적거려…….”
“참으세요.”
“맞아요. 형, 클로버의 복지를 위해.”
그렇게 얼떨결에 네 명이나 장발인 채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칼싸움 장면은 한 번에 오케이를 받았다. 사실, 움직임보다는 눈빛 연기가 더 중요한 장면이었기 때문에 약간의 어색함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케이! 수고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뮤직비디오 촬영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모두 곯아떨어졌다. 촬영은 길게 하지 않았지만, 현장에서 응원하고 서포트하는 것만으로도 에너지 소모가 컸던 모양이다.
깨어 있는 건 지운이 형과 나 둘뿐. 말없이 창가를 내다보는 형의 눈에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이제 진짜 곧이네요. 뮤직비디오 촬영도 마쳤고.”
“맞아. 시간 정말 빨라.”
형의 말대로 시간은 정말 빨리 지나갔다. 어느덧 회귀한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까. 여전히 고장 난 화면의 상태창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날이 지나면 반드시 사라질 거라 믿는다. 그때와 다른 미래를 보내겠지.
그렇다면, 그다음 날의 우린 어떤 모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