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332화 (332/346)

332화

“선배님 노래 덕분에 제 학창 시절은 마냥 슬프지만은 않았어요. 아이돌이라는 꿈을 갖고 노력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습니다. 다음에 활동이 겹친다면 꼭 용기 내서 인사드릴게요. 그때 꼭… 받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별빛소년,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지만 꼭 선배님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은 멋진 그룹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이 자식들, 그냥 평범한 팬심이 아니잖아?’

얼굴이 가면으로 가려져서 망정이지, 팬심 충만한 얼굴까지 봤다면 민망함에 당장 도망쳤을 것이다.

“선배님, 존경합니다. 다음에 만나면 밥 사 주세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밥 사달라 외치니, 모두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신인이 5년 차 대선배한테 다짜고짜 밥 사 달라고 하니, 미X놈으로 보기 딱 좋지.

[이제 신인 아이돌이 아닌 거 같은 한 명에게 투표해 주세요.]

결과는 내가 2표, 한빛이 2표, 윤이 1표가 나왔다.

[모두 마이크 변조를 끄고, 그룹의 데뷔곡을 불러 주세요.]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신인이어서 그런지 서로 친분이 있는 듯했다. 한 명씩 공개될 때마다 윤이 리액션을 했다.

“아, 한빛이 맞네~ 어쩐지 너 같더라!”

“…너도 말투는 못 숨기더라.”

‘역시 마당발인가 보네. 그나저나 둘이 친하다고?’

의외의 조합이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오고, 신세계 첫 소절을 부르자마자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헐!”

“진짜로요?”

“승빈 선배님 모창 아니고요?”

“말도 안 돼!”

나는 조심스럽게 파티션 너머로 가면을 벗고 걸어 나왔다.

“안녕하세요!”

“으아악!”

“한, 한빛아?”

점잖다 못해 차가워 보였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반응이었다. 아예 의자 뒤로 숨어 버렸으니까.

“괜찮아요?”

안 그래도 창백할 정도로 하얬던 얼굴이 토마토가 되어 있었다. 끝까지 눈을 못 맞추는 것을 보고 옆에서 방방거리던 윤이 한빛의 얼굴을 돌리며 억지로 마주 보게 했다.

“그,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얘가 얼마나 선배님 노래를 불렀는데요~ 이런 기회를 놓치면 안 되지!”

“지금은, 못생겨서, 안 돼요!”

“…응?”

알고 보니 윤과 한빛은 같은 중학교 출신이었다. 내성적이고 공부만 하며 친구 하나 없이 지내던 한빛이 투마월 무대를 보고 아이돌의 꿈을 꾸게 되면서 들어간 곳이 댄스 동아리, 그리고 그곳에 윤이 있었다는 비하인드.

“여기 내 전화번호. 조언 구하고 싶거나, 궁금한 거 있으면 편하게 연락해요.”

“헐!”

“윤 씨는 나중에 밥 사 줄게요.”

안 그래도 이목구비가 큰 애가 눈이 튀어나올 듯 놀라더니, 한빛의 어깨를 끌어오며 물었다.

“헐! 얘, 얘도 데리고 가도 돼요?”

“아, 아니에요! 넌 부끄럼도 없냐!”

“당연하지! 꼭 데리고 와. 알겠지?”

“네!”

마지막 인터뷰를 끝으로 촬영을 마쳤다.

[신인 아이돌에게 어떤 선배이고 싶어요?]

[승빈: 든든하고… 존재만으로 안심이 되는 사람이고 싶어요. 나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꼭 저 선배처럼 될 수 있어, 그럴 수 있어- 이렇게요.]

* * *

벌써 내일이 영화 마지막 촬영 날이었다. 이미 연기 수업을 마치고 왔지만, 자꾸 아쉬움이 남았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잡생각을 없애기 위해 일찍 자려고 했지만, 그것마저도 쉽지 않았다.

결국 대본을 가지고 거실로 향했다. 이미 잠이 든 멤버들도 있어서 큰 소리는 내지 못했지만 이미 수백 번도 더 연습한 대본을 읽고 또 읽었다. 혼자 대본을 연습하기 10분 정도 지났을까, 펼쳐 놓은 대본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얼굴을 들어 보니 유현이 형이었다.

“아직 안 자고 있어?”

“아, 깼어요?”

“아니? 12시 넘어가는데 안 들어오길래.”

“내일 마지막 촬영이라서 준비 조금만 더 하고 자려고요.”

“내가 같이 봐줄까?”

“고마워요.”

형과 연기를 연습하면 촬영장에서만큼의 텐션으로 준비할 수 있었다. 분명 편한 사이지만, 적당한 긴장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리더이기도 하고 공과 사가 명확한 형이었으니까.

[지석, 긴장한 현수의 어깨를 가볍게 흔든다. 크게 심호흡을 한다.]

[지석: 마음껏 휘젓고 와. 경기장을 엉망으로 만들어 보자, 잘할 수 있지?]

[현수: (피식 웃으며) 경기 보다가 그럴 거면 내가 뛰겠다고 뛰쳐나오지나 마세요.]

유현이 형이 연기하는 불량아 ‘현수’ 캐릭터는 유현재와는 또 달랐다.

“그만 긴장하고 이제 자.”

“그래도 될 거 같아요?”

“응. 너 지금 엄청 지석이 같았어.”

별거 아닌 말이지만, 크게 힘이 됐다. 내일은 내가 지석으로 살 수 있는 마지막 날이다.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보내 줄 수 있길 바라며 눈을 감았다.

촬영장을 향하는 차 안에서는 간만에 고요함이 찾아왔다. 마지막 촬영이라고 하니 나도 모르게 생각이 많아졌던 것 같다. 다른 날과 달리 말이 부쩍 적어진 내가 신경 쓰였는지, 매니저 형이 넌지시 말을 걸었다.

“첫 촬영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 촬영이네?”

“네. 뭔가… 아쉬워요.”

“의외인데?”

“네?”

의외라고 하는 매니저 형의 말이 더 의외였다면 믿을까?

“그렇게 잘하고, 열심히 했는데도 아쉬움이 남는다는 게.”

“그러게요, 저 원래 아쉽다는 소리 잘 안 하는데.”

하지만 역시 지석이라는 캐릭터가 나에게 주는 의미는 남달랐다.

“난 연기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지만, 승빈이 네 연기는 항상 놀라웠어. 네가 얼마나 지석이라는 캐릭터가 되기 위해 노력했는지 모를 수 없었어.”

매니저 형의 말과 함께 시나리오의 마지막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고민을 잊을 수 있었다.

“…저 이번 작품에 도전하기 정말 잘한 것 같아요.”

거울 너머로 마주친 눈에 매니저 형이 살짝 웃어 보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촬영장에 도착하니 웬일로 유현재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오늘은 내가 먼저 왔다?”

“심경의 변화가 있었어요?”

“야, 심경의 변화까지 가야 하는 거냐?”

“안 하던 행동을 하니까…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대요. 전 형 오래 보고 싶어요.”

“이게 진짜 형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와중에 형은 오래 보고 싶다고? 날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그냥 앞으로도 갑작스러운 변화가 많길 바랍니다…….”

꾸벅 인사까지 하자 유현재가 헤드록을 걸며 머리를 마구 휘저었다. 세팅하기 전이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또 헤어 쌤에게 한 소리 들었을 것이다.

“마지막 촬영인데 안 아쉽냐?”

“아쉽죠.”

“끝이야?”

“뭘 더 해야 해요?”

“이 형님과 마지막 촬영인데 아쉬운 것 정도로 끝나는 게 말이 되냐?”

“아, 진짜.”

‘저 지구의 중심이 자기라고 생각하는 뻔뻔함 어쩜 좋지?’

“형, 저랑 다른 작품으로 안 만날 거예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뻔뻔함에는 뻔뻔함으로 대응한다. 확신에 가득 찬 내 질문에 유현재가 잠시 눈동자만 굴렸다.

“그, 그건 아니지.”

“거봐요. 뭐, 형이 지금은 더 잘나가는 배우라고 해도 혹시 모르잖아요? 우리가 또 주연으로 만날지?”

호기로운 발언에 유현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본래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고, 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사람인 걸 잊고 지냈다. 오랜만에 보는 호승심 가득한 표정에 나도 흥미로워졌다.

“그래, 이래서 내가 너랑 친해진 거지.”

“아, 우리 친해요?”

“야, 나도 상처라는 걸 받는 사람이란다? 우리 안 친해?”

“왜 친하다고 생각해요?”

“너 내 번호 있잖아.”

“그건 업계 사람들끼리 자주 할 수 있는 거죠-”

“너, 막 나 작품 하면 SNS에 홍보도 했잖아!”

“그건 형이 하라고 맨날 메시지 보내고 기프티콘 보내고 그래서 그런 거잖아요.”

확실히 유현재의 친하다는 기준과 나의 기준은 확연히 다르다. 그냥, 유현재가 연예계에 친구가 없어서 그렇다.

‘친해지기 어려운 타입이긴 하지.’

더 장난을 치다간 정말 제대로 마음 상해 할 거 같아서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니까 친한 거 같기도 해요.”

“생각? 생각해 보니까?”

2년 전 넥스트 레벨에서 처음 봤을 땐, 이렇게 귀여운 면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

“벌써 마지막 촬영 날이네요! 모두 다치지 말고, 최고의 컷을 만들어 봅시다!”

촬영을 하면서 김 감독님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회귀 전 ‘어쩌면 그날’ 촬영 때만 해도 지독한 원칙주의에, 나쁘게 말하면 고집이 센 스타일이었는데 이번 ‘드리밍’ 촬영 동안 더 유연한 디렉팅을 해냈다. 첫 촬영보다 확연히 커진 목소리는 현장 모두의 사기를 돋우기 충분했다.

[경기에 나서기 전, 지석은 팀 선수들을 모아 마지막으로 격려의 말을 한다. 그동안 연습했던 시간과 선수들과 함께한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표정으로.]

“아무도 우리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솔직히 다들 말은 안 하지만 여기에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난 매번 얘기했지만, 이기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 승리는 덤과 같은 거야. 있으면 좋은 거, 없으면? 그냥 없는 거지. 승리가 없다고 우리가 보낸 봄과 여름이 헛된 시간이 되는 게 아니야. 마음껏 달리고 오는 거다. 알겠지?”

지석의 말은 언제나 나에게 적재적소의 위로를 주곤 했다. 그래서 내가 지석이라는 인물의 삶에 들어갈 수 있었고, 촬영하는 순간만큼은 문승빈이 아닌 지석으로 살 수 있는 것이었다.

[지석, 긴장한 현수의 어깨를 가볍게 흔든다. 크게 심호흡을 한다.]

“마음껏 휘젓고 와. 경기장을 엉망으로 만들어 보자, 잘할 수 있지?”

“경기 보다가 그럴 거면 내가 뛰겠다고 뛰쳐나오지나 마세요.”

“감독님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이번엔 내가 현수가 된 유현재에게 헤드록을 걸었다. 이미 촬영을 마친 경기 장면을 넘기고, 선수들이 기뻐하며 나에게 뛰어오는 장면을 촬영했다. 열한 명이 달려들어서 잔디 경기장 위로 넘어지면서도 마지막 문구를 떠올리며 웃을 수 있었다.

[경기는 10대1 완패. 하지만 우리는 그 누구보다 기뻐하고, 넘치는 축하를 받았다. 그날 그 아이들이 90분 동안 달린 곳은 경기장이 아닌, 각자의 인생이기도 했다. 패배했지만 누구도 울지 않았다. 오합지졸이라 불린 우리가 멈추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포기보단 도전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컷! 수고 많았습니다!”

컷 소리와 함께 꿈에서 깬 기분이었다. 내 위에 있는 서너 명의 배우들이 자리를 비키지 않은 김에 나도 계속해서 지석에게서 벗어나지 않았다. 가만히 까슬까슬한 잔디를 등 뒤로 느끼며, 이곳의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기억하기 위해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지금 내 마음을 한마디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끝내기 싫다.”

나도 모르는 새 눈물이 맺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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