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화
“내일 촬영하는 게 어떤 프로그램이라고 했지?”
요즘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 출연했으면 하는 콘텐츠 1위인 ‘진짜 속 가짜’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됐다. 멤버들도 즐겨 보는 콘텐츠여서 그런지,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일이 많았다.
“글쎄, 가서 자세히 들어 봐야겠는데. 우선은 신인 아이돌이랑 같이 촬영하는 거라고 했어. 신인 아이돌 사이에서 선배 아이돌 찾기가 주제인가 봐.”
“오~ 문승빈 완전 대선배인 거 아니야?”
“그러게 말이다.”
프로그램에 섭외되고, 요즘 어떤 신인 아이돌이 있는지 찾아봤다. 역시 셀 수 없이 많은 신인 아이돌이 나왔다. 신인 아이돌 춘추 전국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중에 눈에 들어온 그룹은 베스트, 세이렌 정도였다.
“내일 가서 선배 노릇 하고 오는 거야?”
“아니지. 오랜만에 완전 신인 시절로 돌아가는 거지!”
분명 촬영은 내가 하러 가는데, 선우 형과 박재봉이 더 흥분한 모습이었다. 전자보다는 후자에 더 자신 있다. 선배 노릇이라니, 투마월 당시 회귀 전 버릇을 못 고치고 자꾸 조언을 하려 했던 시절이 나에겐 흑역사다. 신인 시절로 돌아가는 건 크게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솔직히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건 없어서.
그때는 방송국에서 가장 막내 포지션이었기 때문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구십 도로 인사를 해야 했다면, 이제는 누군가 나에게 폴더 인사를 한다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그리고 그때는 모든 게 신기했다면, 지금은 꽤 익숙해졌다는 점 정도?
“난 아직도 내가 신인 같은데, 가서 선배님 소리 들을 생각하니까 벌써 체할 거 같아.”
“좋은 말 많이 해 주고 와. 신인이면 고민도 많을 거잖아.”
지운이 형의 말이 맞았다. 나 역시 티벡스, 크리드 신인 시절 모두 여러 고민거리가 있었으니까. 인연이 된다면 좋은 후배를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기대가 됐다.
촬영장에 도착해서 대기실에 들어가니, 모니터링할 수 있는 화면이 있었다. 실시간으로 스튜디오 촬영분이 송출되고 있었는데, 역시나 앳된 얼굴의 출연자들이 대기 중이었다.
[각자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데뷔한 지 이제 3개월 된 라이크의 막내 열여섯 살 형준입니다!”
“아임 유어 세이렌! 2개월 차 패기 넘치는 신인, 세이렌의 메인 보컬 시온입니다! 올해 열아홉입니다.”
“안녕하세요? 데뷔 6개월 차 별빛소년의 리더 한빛입니다. 열일곱입니다.”
“더 베스트! 어제 첫 번째 앨범 활동을 마친 따끈따끈한 신인 베스트의 메인 댄서 윤입니다~ 저는 열여덟 살이에요!”
역시 어제 사전 조사 하길 잘했다. 한편으로는 별빛소년을 제외하고는 그나마 인지도가 있는 신인을 섭외한 걸 보면서 씁쓸하기도 했다. 역시 아이돌 세계에서 살아남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 같구나.
‘그보다도, 모두 십 대잖아?’
게다가 리더가 열일곱이라면 다른 멤버들은 얼마나 어린 나이겠는가? 다른 신인 그룹 멤버들의 자기소개 컷 촬영을 보니 모두 기합이 제대로 들어간 목소리였다. 문득 데뷔 초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는 인사만 하다가 목이 쉬어 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온몸에 힘이 들어갔었지.
“어… 저도 신인분들처럼 해야겠죠? 본 투 샤인! 안녕하세요, 크리드의 명창 강아지, 메인 보컬 승빈입니다! 스물둘입니다. 아이, 다른 친구들이 다 십 대여서 괜히 엄청 어른이 된 거 같네요?”
마지막으로 내 자기소개 컷 촬영을 마치고, 드디어 전체 촬영이 시작됐다.
[모두 자신의 닉네임을 소개해 주세요. 목소리 변조가 들어간 마이크니까 편하게 말하셔도 됩니다.]
“안녕하세요, 신인이라서 뭐든 신기하고 좋은 ‘좋아좋아’입니다!”
“지금은 진짜 목소리를 들려드릴 수 없지만, 홀리는 목소리를 가진 ‘홀리’입니다~”
“저는 달을 좋아해서… ‘달빛’입니다.”
“모든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은 신인! ‘킹갓제너레이션’입니다!”
‘다들 어느 정도 유추가 될 만한 이름을 했네… 그럼 난 아예 다른 걸로 해야겠다.’
“안녕하세요, 매력적인 고양이상 짱냥이입니다~”
“헐! 아, 죄송합니다, 이런 말 쓰면 안 되는데… 그것보다 짱냥이 너무 귀여워요!”
하긴, 신인 때는 말 한마디도 조심했지. 자기소개 때부터 밝은 에너지를 뿜어내던 베스트의 윤이 호들갑을 떨며 리액션을 해 줬다. 덕분에 웃음이 터질 뻔했다.
[이제부터는 메신저 어플로 대화를 나누겠습니다. 각 라운드마다 공통적인 질문이 있고, 그 질문을 토대로 자유롭게 대화를 나눠 주세요.]
[첫 번째 질문. 신인 아이돌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신인인 네 명의 답은 모두 ‘열정’이었다. 나만 빼고.
[짱냥이: 신인은 신선함 아닐까요?]
[좋아좋아: 열정이 더 먼저 떠오르지 않아요?]
[달빛: 신선함이라니, 너무 선배님 느낌인데요?]
[짱냥이: 아니죠- 그 열정 가득한 모습도 결국엔 대중분들에게 신선함으로 다가가는 거잖아요. 베테랑 아이돌에게는 보기 드문 능숙하지 않은 열정이니까요.]
“시온 씨는 짱냥이의 멘트에 감명받은 얼굴이었는데?”
“능숙하지 않은 열정이라는 말이 뭔가 가슴에 콕! 박혔어요. 사실 저희 신인들은 일단 열심히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요령 있게 연습하거나, 다른 분들을 대하는 건 서투르니까요.”
[홀리: 짱냥이 님 멋지다…….]
“아 괜히 말한 거 같아요. 막 꼰대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하지……?”
[짱냥이: 그, 그치만 열정이 1순위인 건 사실이지!]
[킹갓제너레이션: 어? 짱냥이 님 먼저 반모 시작하시는 거예요?]
[짱냥이: …반모?]
[홀리: 설마… 반모 모르는 건 아니지?]
[짱냥이: 당연히 알지~ 내가 너무 갑자기 반말한 거 같아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선우 형과 박재봉의 속성 신조어 강의가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그 와중에 구원의 손길을 내민 이가 있었으니, 뜻밖에도 별빛소년의 한빛이었다.
[달빛: …반모가 뭐죠?]
[킹갓제너레이션: 헐! 아, 또 썼네. 죄송합니다- 달빛 님! 진짜 반모 몰라요?]
[달빛: …죄송합니다.]
[킹갓제너레이션: 아니, 죄송할 건 아닌데… 선배님이셨다면 죄송합니다!]
[달빛: 저 신인입니다.]
[킹갓제너레이션: 달빛 님이 선배님 맞네~ 저희 더 맞힐 필요 없을 거 같은데요?]
[달빛: 저 신인 맞아요. 믿어 주세요. 킹갓… 아무튼.]
절대 친해질 일이 없어 보이는 둘의 대화였다.
‘애늙은이 타입인가? 열일곱이라고 들었는데.’
분명 얼굴은 아직 볼살이 가득한 귀염상이었던 거 같은데. 한빛이 대신 의심을 받으며 1라운드에서는 의심표가 1표에 그쳤다.
[두 번째 질문, 신인 아이돌의 고충은 뭐가 있나요?]
‘신인 아이돌의 고충……? 5년 전에 어떤 고충이 있었더라?’
[좋아좋아: 아무래도 신인이다 보니 모르는 것투성이더라고요. 무대 모니터링을 하면 카메라도 놓치기 일쑤고. 그럴 때 스스로에게 답답함을 많이 느껴요.]
[달빛: 연습생 때는 연습 시간이 딱 정해져 있었는데 데뷔 후에는 쉬는 날이나, 스케줄이 없는 날에 자율적으로 연습해야 하는 게 아직 어색해요. 선배님들 인터뷰 보면 능숙하게 조절하시던데. 그런 게 아직 부족한 거 같아요.]
[짱냥이: 저는 마이크 위치를 잘못 컨트롤할 때가 있는데, 신인이다 보니까 무대 위에서 그러면 엄청 당황하게 되더라고요~]
[킹갓제너레이션: 저 그래서 데뷔 무대 때 마이크 코에다가 걸치고 했잖아요~]
당장이라도 카메라 찾는 방법과 마이크가 절대 내려가지 않게 고정하는 방법에 대해 일장 연설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이돌을 꿈꾸게 된 계기와 자신의 롤 모델을 말해 주세요.]
아이돌을 꿈꾸게 된 계기는 쉽게 떠올릴 수 있었지만, 롤 모델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나에겐 롤 모델이 없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회귀하고 투마월이 시작된 후에도 롤 모델은 없었다. 누구를 따라갈 겨를이 없었으니까.
‘생각해 내자… 롤 모델…….’
[킹갓제너레이션: 저는 어렸을 때부터 노래랑 춤을 너~무 좋아했어요! 막 노래자랑 대회도 나가서 상도 받고, 학예회 하면 무조건 나가는 그런 인싸 학생이었거든요!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킹갓제너레이션: 그리고 롤 모델은 크리드의 승빈 선배님이에요!]
“쿨럭! 쿨럭!”
내 이름이 나올 거라고는 예상도 못 했기에, 마시던 물에 사레가 들려 버렸다.
[킹갓제너레이: 짱냥이 님, 괜찮으세요?]
[짱냥이: 아… 저도 승빈 선배님이어서 놀라서 그랬어요!]
원래 지운이 형을 말하려고 했는데,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른 말을 해 버렸다.
[킹갓제너레이션: 왜 승빈 선배님이냐면, 일단 노래를 너무 잘하시고, 춤도 잘 추세요! 그리고 연기도 잘하시잖아요. 완전 올라운더! 저도 그런 아이돌이 되고 싶어요.]
윤으로 끝났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뒤이어 라이크의 형준, 시온까지 내가 롤 모델이라고 해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홀리: 아무래도 제가 메인 보컬이다 보니까, 선배님들의 보컬을 분석하는 일이 많아요. 그런데 그때마다 최고라고 생각하는 게 승빈 선배님이거든요! 저 작년에 크리드 콘서트 가서 승빈 선배님 솔로곡 듣고 울었어요~]
[킹갓제너레이션: 헐, 울기까지 했어요?]
아무래도 ‘헐’이 말버릇인 게 분명하다. 한빛은 다른 사람을 롤 모델로 하지 않았을까 했지만, 또 내 이름이 나왔다.
‘이거 깜짝 카메라 아니야?’
[달빛: 승빈 선배님이 투마월에서 하셨던 소속사 평가 무대를 보고 아이돌을 하고 싶다고 마음먹었어요.]
[킹갓제너레이션: 헐 대박! 투마월 때부터 롤 모델이었던 거야?]
[달빛: 저도 투표… 열심히 했거든요. 크리드로 데뷔하셔서 너무 좋았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나를 속이기 위해 섭외하고 기획한 게 맞는다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달빛: 승빈 선배님은 무대 위에서나 연기를 할 때 감정 표현이 정말 좋은 분이에요. 제가 원체 숫기도 없고, 표정 연기를 어려워하는데… 선배님 직캠이나, 무대 영상 보면서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저 조용한 애늙은이인 줄 알았는데, 관심사에 대해서는 저렇게 길게 말 할 수 있는 녀석이었구나.
[짱냥이: 달빛이도 승빈 선배님처럼 무대 잘하게 될 거야- 승빈 선배님도 처음부터 잘한 건 아니었으니까.]
[달빛: 승빈 선배님은 투마월 때부터 잘하셨는데요.]
아뿔싸, 말하고 나서야 이상함을 감지했다. 그나저나 이 친구 보통 팬심이 아니구나?
[다섯 분 다 크리드 승빈이 롤 모델인데, 영상 편지 한번…….]
이땐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설 뻔했다. 얼굴이 달아올랐고, 머리 위로 김이 새는 기분이었다. 야속하게도 매니저 형과 스태프들은 아주 흥미롭다는 듯 얼굴에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승빈 선배님! 가요계의 최고가 되겠다는 포부를 가진 베스트의 메인 댄서 윤입니다! 선배님 무대 보면서 열심히 연습하고 있습니다. 다음 활동에는 꼭 음악 방송에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최고의 아이돌이 되겠습니다. 제 이름 기억해 주세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파티션 너머로 귀에 꽂혔다. 밀려오는 민망함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물론 후배들 중에 인터뷰나 방송에서 내가 롤 모델이라고 하는 것을 종종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바로 옆에서 직접 듣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게다가, 나도 내 칭찬을 해야 하는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