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화
결국 연습을 모두 마치지 못하고 먼저 텅 빈 숙소에 도착했다. 조용히 방에 들어가 쓰러지듯 침대 위로 누웠다. 온몸이 물에 젖은 솜이불이 된 것처럼 무거웠다. 머릿속은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고민들로 가득했다. 회귀 전에도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애초에 깨달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드코어일 줄은 몰랐지.
“이제 진짜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에서 불규칙적으로 균열을 이어 가는 상태창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나 나를 무너뜨리려고 했고, 그럴 때마다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러고 싶지만,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장애물이었다. 가만히 있을수록 상념만 깊어질 뿐이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도망치는 것은 적성에 맞지 않았지만, 머리를 비우는 것 역시 필요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간신히 눈을 떠 보니 머리 위에 차가운 수건이 올라와 있었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결국 신체적 문제까지 이어졌구나.
“깼어?”
“누구… 지운이 형?”
“열은 많이 내린 거 같고, 일어났으니까 뭐라도 먹어.”
“지금 몇 시예요?”
“10시.”
“밤?”
“아니, 오전.”
“…세상에.”
꼬박 반나절 동안 죽은 듯 잤다는 뜻이다.
“애들은 스케줄이랑 작업, 연습하러 갔어.”
“형은요.”
“누구 하나는 남아야지. 너한테 할 말도 있고.”
평소보다 한 옥타브 낮은 목소리와 좀처럼 웃을 일이 없는 사람 같은 얼굴이 낯설었다. 미적거리며 거실로 나와 보니 죽이 준비되어 있었다.
“유현이 형이 어제 오는 길에 사 왔어.”
‘그 와중에도 챙겼네.’
종일 굶어서 분명 허기진 상태였지만, 입맛이 없었다. 깨작이는 나를 보며 지운이 형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입에 안 맞아?”
“아뇨. 맛있는데 입맛이 없어서…….”
“그래도 일단 먹어 둬. 네가 그랬잖아, 뭐라도 먹어야 힘이 나지.”
투마월 때 한 말을 기억하는구나. 형의 기억력에 감탄하면서도 괜스레 고마웠다. 여전히 입맛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열심히 먹었다.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요즘 고민 있어?”
“아니요.”
“그럼 어제 한 말은?.”
“그냥 말이 잘못 나온 거였어요. 너무 정신이 없었고…….”
“걱정하지 마. 네가 잠시 주춤해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한 팀이니까.”
허겁지겁 입에 밀어 넣던 숟가락질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조급해하지 않아도 돼. 네가 잠시 슬럼프가 와도 모두 기다려 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쌓아 온 모든 것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어요.”
“공든 탑이 무너지는 기분이야?”
“네. 한 번도 소홀하지 않았는데… 한순간에 사라질 것 같아서 두려워요.”
“승빈아, 무언가를 잃으면 분명 그보다 좋은 것으로 채워지게 되어 있어. 나를 봐. 내가 부상 당하지 않았다면 계속 춤을 췄겠지. 어쩌면 아이돌이 아니라, 댄서가 되었을 거야. 처음 부상을 당했을 땐, 난 내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절대 아니야. 부상으로 오랫동안 춤을 출 순 없었지만, 그때 내가 쌓은 기본기, 스킬들은 여전히 내 몸이 기억하고 있었어. 아이돌 생활을 하면서 정말 큰 도움을 주었고.”
“…….”
“네가 정직하게 쌓은 기본기와 실력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
“하지만 지금은…….”
“내 말 믿어.”
형은 어떠한 설명도 필요 없다는 듯, 강한 신뢰를 보여 줬다.
“아…….”
스스로 인지할 틈도 없이 이미 눈물이 흐른 후였다. 뒤늦게 눈물을 훔치려 했지만, 형이 한발 빨랐다. 언제 휴지를 또 챙겼는지 조심스레 눈가를 닦아 주고 있었다.
나 혼자 스스로 되뇌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어쩌면 다른 누군가에게 저 사실을 확인받고 싶었던 어리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네가 말했잖아, 내 노래에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크리드의 자존심을 위해서 이기도 하다고. 우리 역시 그래. 너는 우리 팀 보컬의 자부심이잖아. 네가 어떻게 성장했고, 연습했는지 우리가 다 아는데 그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하는 건 우리의 자부심을 부정하는 일이기도 해.”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지운이 형의 눈빛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운이 형은 빙긋 웃으며 휴지 몇 장을 더 건넸다.
“정말로 다 무너진 것 같다면, 우리랑 다시 시작해 보자. 시간이 필요하다면 잠시 쉬어 가자. 멤버들이랑 같이 기다릴게.”
형의 말을 들으니 머릿속이 한결 가벼워졌다. 가진 것이 많아지면 자꾸만 잃을까 겁을 먹게 된다. 두 손에 쥔 것을 고집스럽게 붙잡느라 쏟아지는 것들에 신경 쓰지 못하게 되기도 하고. 잠시 바닥에 내려 두면 되는 간단한 선택은 우선순위에서 지워지기 일쑤다.
“저, 연습하러 갈래요.”
“더 쉬어야 하지 않겠어?”
“아뇨. 마음먹었을 때 해야 해요.”
잠시 고민하던 형이 내 이마를 짚으며 자기 이마와 온도를 비교했다. 감기에 걸려 고생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어디 보자, 열은 다 떨어진 거 같고-”
“목소리도 잘 나와요.”
“아까 울어서 목 잠긴 거 아니야?”
“아니에요.”
“어제 연습하던 곡 한번 불러 봐.”
“네? 여기서요?”
“못 부르면 안 보내 줄 거야. 더 쉬어야 하니까.”
단호한 형의 태도에 더 반항할 수 없었다.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스스로 마법을 걸듯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내 실력은 사라지지 않아, 사라지지 않아…….’
그래도 여전히 내 앞에서 고장 난 기계처럼 지직거리는 상태창을 보면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역시 아직 무리인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던 그때, 커다란 손이 다가왔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형의 손이 두 눈을 가린 상태였다.
‘상태창이… 안 보이잖아?’
잊고 있었다, 상태창은 이렇게 쉽게도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걸.
“이제 아무것도 안 보이지?”
넋이 나간 듯 한 5초간 멈춰 있었다. 분명 형은 아무것도 모르는데, 모든 걸 아는 듯이 말하는 순간이 있다. 나는 다시 크게 심호흡을 하고 노래를 시작했다.
[일곱 개의 별이 모여
하나의 무지개를 피워 내
머나먼 여정을 이기고 모인
이 별의 이름은 Destiny]
심연 속 포근함을 느끼며 노래를 부르는 느낌이었다. 더 이상 떨림을 느낄 이유를 찾지 못하니 떨리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You & I 함께 만들어 간 Destiny
순간의 이끌림은 영원을 약속해
언제나처럼 네 곁에 있을게]
분명 어제는 떨어진 스텟을 지나치게 의식하면서 삐끗했던 부분이었는데,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좋은 흐름을 끊고 싶지 않아 원래 계획보다 더 길게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곧 지운이 형이 손을 치웠다. 잠시 눈부심에 멈칫했지만, 노래는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상태창은 기분 나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나를 멈출 수 없었다. 상태창을 정면으로 노려보며 그대로 노래를 마쳤다.
“내 말이 맞지? 네 기본기, 실력 어디 안 간다고.”
노래를 마치고 나서야 터질 듯 뛰는 가슴을 알아차렸다. 처음 가수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내가 쌓아 온 노래에 대한 열정, 기본기, 실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겨우 저 상태창 나부랭이의 장난에 흔들릴 만큼 연약한 것들이 아니었다.
“정말이었어요, 형 말이 맞았어요.”
“말했잖아, 너 할 수 있다고.”
며칠 전 형에게 조언했던 내가 부끄러워질 만큼, 형은 강한 사람이었다. 노래를 들은 지운이 형은 더 이상 나를 붙잡지 않고, 연습실로 가는 것을 허락했다.
“이제야 좀 문승빈답네!”
노래를 듣고 보컬 트레이너 선생님은 평소보다 더 높은 텐션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역시 전에는 실수였던 거였어. 너무 잘해서 인간미를 보여 주려고 그런 건 아니지?”
“아니에요. 요즘 너무 바빠서 레슨 받을 시간이 줄었더니…….”
“에이. 그동안 네가 쌓아 온 기본기가 얼마나 탄탄한데-”
“앞으로 걱정시키는 일 없게 할게요.”
지난 며칠 동안은 지옥과도 같은 트레이닝 시간이었는데, 자신감을 되찾고 난 후에는 전처럼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3일 뒤에 솔로 무대 있지?”
“네. 축하 공연으로.”
“그때 다시 멋있게 보여 주자.”
나는 말없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만에 연습실에서 짓는 미소인지 모르겠다. 지운이 형의 도움 덕분에 자신감을 회복하고, 상태창 앞에서도 초연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됐다. 그리고 기분 탓인지 모르겠으나, 스탯이 떨어진 것을 의식하지 않으니 이전과 실력 차이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주변인들 또한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실력은 그날의 컨디션과 여러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의미하겠지. 그러니까, 상태창의 스탯의 변화에 일희일비하는 것이 실력에 더 큰 영향을 줬다는 거다.
“어, 유현이는 오늘 레슨 아니지 않았나?”
“문승빈?”
맞다. 풀어야 할 실타래가 하나 더 있었지.
* * *
잠시 어색한 기류가 흘렀지만, 트레이너 선생님의 능숙한 중재로 연습을 이어 갈 수 있었다. 최근 창법에 변화를 주기로 한 유현이 형은 보컬 연습에 더 많은 연습 시간을 투자했다.
“같은 부분에서 또 막히네? 한 번 더 해 볼까?”
“네.”
보컬 실력이 평균 이상인 것은 맞지만, 특정 음역대를 버거워하는 것이 유현이 형 보컬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승빈이, 이 음 올라가나?”
“이거 키가 어떻게 돼요?”
“Destiny 초고음 정도?”
“승빈이 요즘…….”
“그럼 할 수 있어요!”
분명 며칠 전과 확연히 달라진 내 태도에 유현이 형은 의아한 얼굴이었다. 나는 가볍게 음을 잡아 보고 곧장 해당 파트를 불렀다. 시원하게 올라가는 음에 쾌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지!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네 성대가 기계라고 생각해. 힘을 줘서 고음을 올리는 게 아니라, 볼륨을 높이듯 높은 음을 내는 거지.”
“네.”
“잠깐 휴식 시간~”
잠시 보컬 트레이너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고, 연습실에 둘만 남았다. 며칠 전 화를 냈던 것이 민망하고 미안해서 선뜻 말을 걸 수 없었다.
“…이제 괜찮은 거냐?”
“아, 네.”
“단순한 컨디션 난조였던 거야?”
“아니요.”
그때와는 다른 대답에 유현이 형이 깊게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럼 뭐야.”
“잠깐 제 실력을 의심했어요.”
“의심을 해?”
“네. 이유는 저도 모르겠지만요.”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한 거야?”
의아함이 가득한 형의 목소리가 유독 더 고맙게 다가왔다.
“그러게요. 아, 억울해-”
“다신 그러지 마.”
“그게 쉬운 일인가… 형은 한 번도 스스로 의심한 적 없어요?”
“네가 그랬잖아, 스스로 의심되면 날 믿는 사람을 믿어 보라고.”
‘우리 멤버들은 왜 이렇게 기억력이 좋지……?’
“나 지금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사람 된 거 같은데요.”
“내가 네 말을 듣고 깨달았으니까, 나도 네가 알길 바라서 하는 말인 거야.”
“고마워요.”
내가 누군가를 격려하기 위해 했던 말이 결국 나에게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솔로 무대, 해낼 수 있지?”
“당연하죠!”
이제는 다시 보여 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