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Destiny’ 활동이 끝나고 오랜만에 나온 음악 방송이었다. 500회 특집으로 축하 무대를 하게 된 거다. 이미 여러 번 했던 ‘Destiny’ 무대인지라 크게 부담감이 없는 무대였다. 분명 그랬는데 말이지. 다른 멤버들이 모두 무대 준비로 바쁜 와중에, 나는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왜 갑자기 또 지X이야…….’
눈앞에서 영문을 모를 이유로 지직거리는 상태창 때문이었다. 오재성의 상태창이 소멸하면서 내 상태창이 돌발 행동을 보이는 일도 사라졌다. 더 이상 미션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정식 그룹이라는 최종 목표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목표를 이뤘으니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던 상태창은 사라지지 않았다. 앞으로 추가적인 기능이 없이 계속 눈에 보이기만 하는 건가 했는데, 이렇게 다시 말썽을 부릴 줄이야.
하지만 전과 다르다. 이전에는 정신없이 깜빡이거나 두통을 유발했는데, 지금은 고장난 TV 화면처럼 깨진 화면이었다. 군데군데 깨져 있는 화면 탓에 각 스텟의 등급을 확인하는 것도 힘들 정도였다.
‘뭔가 찝찝한데.’
거슬리기는 했지만,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것은 없으니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생각이었다. 무대 위에서 서프라이즈 폭탄을 터트리기 전까진.
[일곱 개의 별이 모여
하나의 무지개를 피워 내
머나먼 여정을 이기고 모인
이 별의 이름은 Destiny]
평소처럼 막힘 없이 무대를 해내던 와중에 상태창에 다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보컬 스텟이 하나 하락해 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스텟 하락에 놀라서 하마터면 안무를 놓칠 뻔했다. 최대한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더욱 격렬하게 춤을 췄다. 미션 실패도 아닌데 스텟이 하락하다니? 의문을 가진 틈도 없이 다음 파트를 소화해야 했다.
[You & I 함께 만들어간 Destiny
순간의 이끌림은 영원을 약속해
언제나처럼 네 곁에 있을게]
있는 힘껏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미처 숨길 수 없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전부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긴장감이었다. 볼품없이 떨리는 목소리에 속으로 절망했다. 유현이 형과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면 삑사리까지 났을 것이다.
[네가 내 운명이란 걸
너와 함께라면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아]
팬들의 함성 소리와 함께 무대는 끝이 났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저히 주워 담을 수 없는 무너짐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제 와서 이게 무슨 봉변인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아무리 마음대로 미션을 내고, 보상과 대미지를 정한다 해도 정해진 법칙이 있었다. 미션을 성공하면 보상을, 실패하면 페널티를. 그렇기 때문에 페널티를 얻어도 연습이나 미션 성공을 통해 잃은 것을 상쇄할 수 있었던 거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미션도 없었는데 저절로 스텟이 하락했다. 최악의 시그널이었다. 이대로라면 지금까지 쌓아 놓은 포인트를 한 번에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대기실에 도착하자마자 유현이 형이 다가왔다.
“컨디션 괜찮아?”
“…네.”
“너, 어제 몇 시에 잤어.”
“그거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이미 머릿속은 상태창에 대한 의문과 무대를 망쳤다는 자책감으로 가득해서 형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너 건강 관리는 제대로 하면서 일하라고 했지.”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 화가 났다는 증거였다.
“저 잘 자고, 잘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해요. 오늘 실수는 그냥… 어쩌다 나온 실수일 뿐이에요. 저도 실수할 수 있는 거잖아요.”
“어쩌다 나온 실수? 넌 그게 실수라고 생각해?”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실수가 아니라는 걸 나도 너무 잘 알았으니까.
“그럼, 다른 이유가 있어요? 형이 내가 아닌데 어떻게 알아요?”
그래서 더 울컥했다. 상태창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으니까. 답답한 마음에 평소보다 반항적으로 행동했다. 유현이 형은 날선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너 지금 손 떠는 거 안 보여? 이래도 제대로 관리했다는 소리가 나와?”
“…….”
“처음으로 너한테 실망했다.”
그 어떤 말보다 나를 자괴감에 빠뜨리는 말이었다. 유현이 형은 누군가에게 쉽게 기대하지 않는 만큼, 쉽게 실망하지 않는 형이니까.
“승빈아.”
“유현이 형한테는 잘 얘기할게요. 근데 저도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요.”
지운이 형이 어깨를 두드렸지만, 그 무엇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냉랭해진 분위기를 풀지 못한 채 숙소로 돌아왔다. 유현이 형에게는 사과했지만,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다.
‘어떻게 쌓은 유대감이었는데…….’
입 안이 썼다.
* * *
뮤직 쇼 500회 특별 무대는 그 화려한 라인업 덕분에 수많은 케이 팝 팬이 몇 주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같이 볼 수 없을 톱 가수들이 대거 출연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화려한 무대들 사이에서도 가장 이슈가 된 건 단연 문승빈의 무대였다.
단 한 번의 흔들림이었지만, 대중은 먹이를 문 듯 달려들었다.
[삑사리 날 뻔한 크리드 문승빈ㄷㄷ]
오늘 뮤직쇼 500회 특집 무대인데 문승빈 라이브 뭐임??
삑사리 날까 아슬해 죽는줄
-어디 아픈가?? 목소리 엄청 떨리는데??
-원래 잘하던 애라 별 상관없음ㅇㅇ
-대상 싹쓸이하고나서 맛갔나봄ㅎ….
└22 이래서 남돌은 뜨면 안되나봐ㅎ
-삑사리라 그래서 놀라서 들어왔는데 잘만 하는데??
└잡았다 클로버요놈~
└이렇게 오냐오냐하니까 저렇게 무대를 망치지
[정식그룹 되니까 다 끝난 거 같나?]
아니 더 열심히 해도 모자랄 판에 실력 무슨 일임;;
-내말이ㅋㅋㅋㅋㅋ 지금이 더 중요한 시기인데
-하… 잘하던 애가 갑자기 왜 저러지?
-(캡처) 도현이 찐으로 당황한거 봐
-문승빈이 노래도 못하면 쓸모없는 거 아님?ㅎ
└뭐라는거야 ㅅㅂ
데뷔 이래로 단 한 번도 흐트러짐을 보인 적 없는 문승빈이라, 역으로 더 흥미로운 주제였다. 게다가 정식 그룹이 된 이후인지라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어그로가 끌렸다. 위튜브에는 승빈의 실수를 까 대는 렉카들의 게시글로 가득했다.
“승빈이가 기계도 아니고 실수할 수도 있지.”
“그니까. 못 부른 것도 아닌데-”
“하도 잘하는 애라 기준이 높은가 봐.”
“그것도 그냥 스페셜 무대였는데 관심들 존나 많아.”
“이게 다 크리드가 핫해서 그렇다.”
“그게 맞다.”
살벌한 문스트럭의 표정을 본 K와 A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문스트럭의 기분을 풀 수는 없었다. 그녀 역시도 처음 보는 승빈이의 모습에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진짜 어디 아픈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저히 그거 말고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보다 더 극한인 상황 속에서도 항상 평정심을 유지했던 그녀의 최애였다. 그런 승빈을 보면서 그녀 역시도 차분해질 정도였다.
“영화까지 찍느라 너무 바빠서 그런가 봐.”
“맞아. 체력적으로 힘들었겠지.”
“하… 보약이라도 지어서 넣어 줘야 하나.”
그냥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것도 너무 괴롭긴 하겠지만, 몸의 문제는 금방 나을 거니까. 하지만 몇 번이고 돌려 봤던 이번 무대에서는 뭔가 달랐다. 실수도 실수지만, 그 이후에 승빈의 표정이 너무 안 좋았다. 본인도 미처 예상치 못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럼 체력적인 문제는 아닐 건데-
“설마… 슬럼프인가?”
“에이- 승빈이가?”
“지금 제일 안정적일 때인데, 슬럼프일 리가-”
문스트럭의 의문에 K와 A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대상을 싹쓸이하고 기간제 그룹에서 정식 그룹이 되기까지 했는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심지어 승빈은 김 감독 작품에 캐스팅되어 촬영 중이지 않은가. 슬럼프란 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멤버들도 팬덤도 이렇게 평화로운 적이 없었다.
“실수이길 바라야지.”
제발. 단 한 번의 실수이기를 간절하게 바랐지만, 애석하게도 그녀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문승빈 요즘 왜 그럼??]
단체컨텐츠에서도 말이 별로 없네….
-아무래도 승빈이 요즘 슬럼프인 듯…..
-ㅠㅠㅠㅠㅠ 어디 아픈거 아닌가 걱정되네ㅠㅠㅠㅠ
-고용불안정에서 벗어났다고 막나가네ㅎ
└ㅅㅂ 너는 좀 꺼져라
[문승빈 최애인 클로버들 있어?]
비댓 좀 달아주라. 팬인증 받을 거임ㅇㅇ
-나나
└(비댓) 승빈이 요즘 왜그러는걸까ㅠㅠㅠㅠ
└(비댓) 슬럼프온거 맞는 듯ㅠ 라이브 불안해진거봐ㅠㅠㅠ
-(비댓) 나 진짜 미치겠음ㅠ 안그러던 애가 그러니까 더 힘들어ㅠ
└(비댓) 진심ㅠㅠㅠㅠ 둘도 없는 효자였는데ㅠㅠㅠ
└(비댓) 분명 뭔가 문제가 있는데, 말을 안하니까 더 안쓰럽다
-(비댓) 승빈이 분명 또 혼자 끙끙거리고 있을 듯
점점 더 횟수를 더해 가는 실수에 대중의 반응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었다.
* * *
재수 없는 상태창은 점점 더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댄스나 끼 스텟을 떨어뜨렸다면 충격이 덜했을 텐데, 야비하게도 보컬 스텟만 하락시켰다. 보컬 포인트의 변화는 내가 가장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장난을 치는 것이 분명했다.
보컬 연습을 하면서도 자꾸 떨어진 보컬 스텟이 떠올랐다. 분명 이전에는 거침없이 올렸던 음도, 지레 겁을 먹게 되었다. 차라리 상태창이 이상한 미션을 던졌다면 멤버들,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해결하는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온전히 나 혼자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정말 끝까지 쉽게 넘어가지 않는구나.’
홀로 남은 보컬 연습실에서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입술을 짓이겼다. 누군가에게 말할 수 없는 고민이 쌓여 갔고, 결국 멤버들 앞에서 터지고 말았다.
“이상하다, 너 원래 이 코드까지는 쉽게 올라가지 않았어?”
“죄송합니다.”
“왜 이렇게 보컬에 자신감이 줄어들었지? 무슨 일 있어, 요즘?”
“아니오, 그냥 잠깐 슬럼프인가 봐요.”
“너, 이 시기 잘 보내야 해. 안 그러면 진짜 오래간다?”
“네.”
보컬 트레이너 선생님이 떠나고, 멤버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요즘 슬럼프야? 괜찮아, 다 한 번씩 지나가는 과정이잖아.”
“힘든 일 있으면 혼자 앓지 말고…….”
“…거예요.”
“뭐?”
“나, 이제 전처럼 노래 못할 거라고요.”
폭탄선언에 다들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너, 진심이야?”
“너, 솔직히 말해 봐, 무슨 일 있는 거지.”
물음표 없는 물음이 더 날카롭게 박혔다.
“내 상태… 하아, 아니에요. 형 말이 맞아요. 너무 무리했나 봐요. 며칠 쉬고 나면, 괜찮아질 거에요.”
하마터면 상태창에 대해 말할 뻔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뭐라 더 얘기하려던 유현이 형도 한숨을 쉬며 말없이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다 이겨 낸 줄 알았는데, 정말 다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가장 행복한 순간에 추락하는 것이 더 아프다는 것을 이 새끼는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