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323화 (323/346)

323화

“…승빈아.”

“응?”

아직 잠에 취한 상태여서 흐릿한 실루엣만 보인다. 그런데 누군가 내 위로 무언가를 들이밀고 있었다.

‘이게 뭐야……?’

“얼른 일어나 봐!”

묵직한 저음에 놀라서 눈을 뜨니, 선우 형이 국수 그릇을 들고 서 있었다.

“얼른 일어나서 먹어 보라니까?”

“뭐, 뭐예요, 아침부터!”

“왜 이렇게 소란… 야, 박선우! 너 그거 침대에 흘리면 가만 안 둬!”

“아, 형! 형 목소리에 놀라서 떨굴 뻔했잖아요!”

이 황당한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거실로 나오니, 멤버들이 모두 부엌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생일 축하해, 승빈아.”

“축하해요, 형!”

“얼른 와서 먹어 봐!”

아침부터 요란한 멤버들에 핸드폰을 켜 보니 2월 9일, 오늘은 내 생일이다. 작년 생일에 생일 카페를 몰래 갔다 온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지났다니. 식탁 위에는 미역국과 여러 요리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이, 이걸 다 만들었어요?”

“몇 개는 부모님이 보내 주셨고, 나머지는 우리가 만들었지-”

낯간지러운 이벤트지만, 각 멤버의 생일마다 생일자를 제외한 멤버들이 생일상을 꼭 차려 줬다. 지난번 지운이 형의 생일에는 미국에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근처의 음식점을 털어서 호텔에서 생일상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우선 선우 형이 만든 잔치국수부터 먹어 봐… 저 형 안 먹어 주면 울 거 같음.”

“알았어.”

유현이 형에게 한 소리 듣고 기가 죽었는지 팔자 눈썹을 한 고양이 얼굴이었다.

“저, 이거 먹어요?”

“응…….”

“엥? 이거 맛있는데요?”

지금까지의 요리 전적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적어도 간이라는 걸 맞추게 됐다고 해야할까? 이전에는 대책 없이 짜기만 했는데, 이제 ‘이게 국수구나’ 인지할 수 있을 정도의 맛을 구현해 냈다.

“…정말?”

“네! 크리드 데뷔하고 형이 만들었던 음식 중에 제일 맛있어요! 어떻게 한 거예요? 실력이 이렇게 빨리 늘 수 있나?”

“뭐 이런 거 가지고-”

하여간 쉽게 삐지고 쉽게 풀리는 형이다. 밝아진 선우 형의 얼굴에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맛있지! 내가 그래서 많이 준비했어!”

“…네?”

“아이고…….”

거대한 냄비 속에 국수가 가득했다. 잠시 선우 형이 자리를 비운 사이 멤버들은 심각하게 이 국수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고민했다.

“생일자는 빼 줘. 올해 생일 선물은 이걸로 퉁칠게.”

“그냥 생일 선물을 줄게.”

“그래요, 형. 뭐 갖고 싶은 거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한강 뷰…….”

“이 형 진짜 무서운 사람이었네-”

조용히 국수를 흡입하던 지운이 형은 또 웃음이 터졌는지 오물거리면서 힘겹게 웃음을 참고 있었다. 눈물겨운 지운이 형의 투혼 때문일까, 멤버들은 조용히 자신의 몫을 덜어 갔다.

“1년 치 국수 다 먹게 생겼네…….”

그래도 성인 남성 7명의 먹성은 놀라웠다. 모두 터질 듯 부푼 배를 붙잡고 거실 바닥에 널브러졌다. 옆에서 보니, 겨울철에 고구마를 먹고 배가 빵빵해진 강아지들을 보는 기분이었다.

“아무튼… 승빈아, 생일 축하한다-”

“선물은 내 방에 있어, 알아서 가져가…….”

지운이 형은 청재킷, 선우 형은 독특한 패턴의 바지, 유현이 형은 깔끔한 디자인의 목걸이, 윤빈 형은 귀걸이, 재봉이는 신발, 강도현은 마사지 건을 주었다.

선물을 보던 선우 형이 뭔가 재밌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와… 승빈아, 너한테 미션 하나 줄게.”

“안 들었지만 거절해도 돼요?”

“아니, 안 돼.”

“들어는 볼게요. 뭔데요?”

“우리 곧 일본 공연 가잖아.”

“아, 형 설마.”

“선물로 풀 세팅 하고 가는 거 어때?”

“음, 싫어요.”

“왜?”

왜긴 왜야, 당신이 준 저 해괴망측한 바지를 입고 어떻게 김포 공항을 돌아다니냐고. 분명 기사에.

[크리드 문승빈, 오늘은 유니크하게 입어 봤어요~]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패턴의 바지, 역시나 소화 못 함]

따위의 제목으로 올라올 게 뻔하다. 선우 형은 제법 끈질기게 요청했지만 단칼에 거절했다. 결국, 다른 바지를 선물해 주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그리고 그날 저녁, 선우 형이 게시글을 올렸다, 그 해괴망측한 패턴의 바지와 함께.

[클로버! 바지를 새로 사봤어요- 예쁘죠?]

-아

-선우야

-저런건 어디서 주워온거야…

-저런 옷도 사는 사람이 있으니까 만드는거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내 새끼일 줄이야…

-선우야, 네가 입어서 예쁜거야ㅠㅠㅠㅠㅠㅠ

-역시 이래서 잘생긴 놈은 간절함이 없어

최애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는 팬들에게도 패션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팬들의 반응을 확인한 후, 숙소에서 그 바지를 본 사람은 없었다.

* * *

“오늘은 어디로 가 볼까…….”

지난번에는 생일 카페를 돌았는데, 이번에는 지하철과 버스 광고를 보러 가기로 했다. 최대한 안전하게 애매한 시간에 찾아갔다.

“와…….”

아이돌 생일 광고가 많이 걸리는 호선을 찾아갔는데, 한 구역이 전부 내 생일 광고였다. 누가 보면 2월에 생일인 아이돌이 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우리의 행운, 행복 승빈아 22번째 생일 축하해!]

[축 명창 강아지 생일 축]

[영원을 약속해 20XX 0209 승빈아, 생일 축하해]

그리고 광고에는 팬들이 남겨 놓은 편지와 포스트잇으로 가득했다.

[생일 축하해 승빈아! 넌 최고의 강아지야!]

[크리드 메보 명창강아지 승빈이의 생일을 축하해♡]

그 와중에도 내 얼굴 부분에는 붙이지 않은 것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귀엽네, 진짜-”

눈으로만 담기에는 아쉬워서 강도현에게 빌린 카메라로 하나하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메모지와 편지를 천천히 읽어 보는데, 마음에 꼭 박힌 메시지가 있었다.

[승빈이 넌 내 자부심]

‘자부심…….’

그저 좋아하는 음악과, 무대를 하며 꿈을 이뤘을 뿐인데 누군가의 삶의 활력소가 되고 자부심이 되었다. 전에는 이런 말을 들으면 부담감이 앞섰다. 혹시라도 실망시키면 어쩌지, 내가 이상적인 사람이 아니어서 이들의 일상을 무너뜨리면 어떡하지- 따위의 고민도 있었다. 여전히 이 말이 주는 무게를 안다. 하지만 앞으로 더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할 뿐이다.

내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사람의 응원, 사랑, 걱정을 모두 품을 순 없겠지만 적어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때,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저 혹시…….”

“……?”

“죄, 죄송해요. 저 그냥 지나가는 팬이고요. 여기 편지 붙이려고 왔는데 너무 닮은 거 같아서… 불편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아, 아니에요! 저도 팬분들이 쓴 편지랑 메시지 보려고 온 거예요.”

“저 그럼 이것만 붙이고 갈게요, 진짜 많이 응원하고 있어요. 앞으로 건강하게 노래 많이 해 줘요! 사, 사…….”

거의 랩 하듯 말하던 팬은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듯했다.

“사랑한다고요? 저도 사랑해요, 클로버.”

“악!”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순간 다리가 풀린 듯 주저앉은 팬을 두고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벌떡 일어난 그녀가 다시 비장하게 말했다.

“저도 사, 사모해요!”

“네?”

미션을 해낸 것인지, 홀가분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멀리 사라졌다. 4년 동안 활동하면서 다양한 팬을 만났지만, 오늘과 같은 해프닝은 또 처음이었다.

광고 투어를 마치고, 숙소 근처의 포토 부스에서 생일 이벤트를 하는 것을 발견했다.

“승빈네컷?”

지난번 멤버들과 엉망진창으로 찍었던 네 컷 사진이 떠올랐다. 부스에 들어가 보니, 아예 내 생일 테마로 만들어진 프레임이 있었다.

“신기하다-”

마치 나와 사진을 같이 찍은 것처럼 나오는 프레임도 있었다. 내 사진은 아니지만, 거의 반실사로 그려진 팬 아트여서 더 특별했다.

“이걸로 찍어야겠다.”

네 컷에는 반쪽 하트, 강아지 귀 포즈, 후드 끈을 조이는 포즈, 볼 콕 포즈가 있었다. 나와 사진을 찍는 기분이었다. 나중에 팬들에게 보여 줄 생각으로 부끄러움은 뒤로하고 최대한 잔망스럽게 포즈를 취해 봤다.

“잘 나왔는데?”

첫 사진이 마음에 들어서인지 다른 프레임에도 도전했다. 그렇게 서너 장을 찍고 나서야 만족스럽게 포토 부스를 빠져나왔다. 중간에 팬들과 마주칠 뻔했지만, 우리 노래가 나오는 틈을 타 벗어날 수 있었다.

“오늘도 잘 구경하고 왔냐?”

“응. 이거 봐 봐.”

“이게 뭐야? 옆에 그림은 너야?”

“응. 대박이지. 완전 금손이야.”

강도현은 네 컷 프레임 이벤트가 마음에 들었는지 달라고 재촉을 해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야, 빨리 줘. 에이앱 하기 전에 글 올릴 거라고-”

[클로버! 올해도 제 생일을 많이 축하해줘서 감사합니다ㅎㅎ 여러분이 주신 선물 다 보고 왔어요! 먼 곳은 가지 못했지만, 다 지켜보고 있답니다. 그리고 승빈 네컷 이라는 것도 찍어봤어요!

(사진)

쌍둥이랑 사진 찍는 기분이었어요ㅎㅎ 이번 생일도 클로버랑 함께여서 너무 포근한 겨울입니다! 감사하고 사랑해요♡]

-헐 나 오늘 저기 갔는데ㅠㅠㅠㅠㅠ

-쌍둥이 문승빈이라니

-이 사진을 보니 1가구 1문승빈 보급이 필요하다는걸 절실하게 느낌

-승빈이 생일마다 인증해주는 거 너무 따수워ㅠㅠㅠㅠ

생일 에이앱에서는 케이크를 만드는 코너를 진행했다. 케이크 시트와 생크림, 과일, 과자 등이 준비되었고 1시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비주얼도 괜찮았다. 놀리려고 온 선우 형도 꽤 좋은 퀄리티에 감탄했다. 이렇게 무난하게 끝날 줄 알았지.

“자, 클로버한테 더 가까이 보여 줄게요-”

“제가 강아지 그림도 그려 줬어요!”

“그건 안 보여 줄게요, 클로버-”

“아, 왜-”

“짠~ 생일 케이크… 안 돼!”

“야야, 조심!”

케이크를 카메라 쪽으로 든 순간 와르르 엎어지고 말았다.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승빈이에게 이런 시련을

-케이크 예쁘네…. 아니 예뻤네….

“뭐, 이런 날도 있는 거죠. 안 그래요, 클로버?”

-선우야 고생이 많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울고있엌ㅋㅋㅋㅋ

-아이고 저거 치우는 것도 스태프가 하는건데 고생이겠다…

-승빈이가 치우는데요

-승빈이 테이블 밑으로 내려갔냐곸ㅋㅋㅋㅋㅋ

뒤늦게 뛰어온 스태프분과 열심히 케이크를 주웠다. 순조로운 생일의 끝이 케이크 범벅이 된 바닥 청소라니. 서글퍼졌다.

“마무리가 좀 이상했지만? 오늘 제 생일 축하해 줘서 진짜 고마워요, 클로버! 케이크는 사진으로 보내 드릴게요.”

-기죽지마 승빈아!

-그래그래 사진으로 남는게 중요한거지

크림에 케이크 사진을 보내자 칭찬과 응원, 위로의 메시지가 와르르 쏟아졌다. 아쉬웠던 마음도 눈 녹듯 사라졌다. 일기를 쓰던 지운이 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에이앱 보니까 케이크… 괜찮았어?”

“네. 매니저 형이랑 깨끗하게 치웠어요.”

“오늘 생일은 좋았고?”

“당연하죠. 멤버들한테 선물도 받고 팬분들이 준비한 선물도 받고! 진짜 행복한 하루였어요.”

“내년 생일은 올해보다 더 행복할 거야.”

“그러겠죠?”

“내일 일찍 연습이지 않나? 자야지. 불 끈다?”

“네!”

달칵, 불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고 잠이 들려던 찰나,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생일 축하해.”

마지막으로 생일 소원을 빌었다. 앞으로 몇 번의 생일이라도 이들과 함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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