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화
Destiny 활동 2주차에 들어설 무렵, 오랜만에 김 감독님에게 연락이 왔다.
“감독님, 그동안 잘 지내셨죠?”
“그럼요. 차기작 준비로 바쁘게 지냈어요.”
“그때 말씀하셨던…….”
“네. 소속사에서는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는데, 승빈 군 마음도 그때랑 같은지 궁금해서요.”
나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저는 당연히 좋죠!”
“이렇게 바로 답해 주니까 너무 고마운데요? 사실, 다른 배역은 캐스팅을 완료했는데, 주인공은 무조건 승빈 군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보류해 뒀거든요.”
마침, 몇 주 전 ‘드리밍’의 캐스팅 관련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주인공을 제외한 대부분 배역의 캐스팅 기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사이 새로운 주인공을 찾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그때 유현재도 주연 중 하나로 캐스팅됐던 거 같은데.
“그렇게까지 해 주실 줄이야…….”
“‘어쩌면 그날’ 때 승빈 군 놓친 게 너무 아쉬워서요.”
비록 전화 너머 목소리뿐이었지만, 정말로 아쉬움이 가득하게 들렸다. 이곳에는 하나의 법칙이 있는 것 같다. 무언가를 잃으면, 무언가를 얻는다. ‘어쩌면 그날’을 잃었지만, 드리밍이라는 새로운 기회를 얻었으니까.
“크리드 활동에 최대한 무리가 되지 않게 할 겁니다. 촬영은 아마… 2월부터 시작할 거 같아요. 그 전에 대본 리딩이랑 크랭크인에 필요한 작업을 마칠 생각이에요.”
크리드 활동까지 생각하며 촬영 일정을 잡다니, 감사하면서도 잘해야겠다는 부담감이 밀려왔다.
“대본은 거의 완성 단계여서, 확정된 분량 먼저 소속사로 보냈어요.”
“지난번에 주신 대본도 정말 좋았는데, 그사이 얼마나 더 탄탄해졌을지 벌써 기대돼요.”
“마음에 들 겁니다.”
흔들림 없던 김 감독의 말은 이유 있는 자신감이었다. 대본은 정말 좋았다. 보통 스포츠 성장물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클리셰를 모두 벗어나는 스토리와 인물 설정이었다. 주인공 캐릭터 역시 베이스는 긍정적이고 해맑지만, 마냥 무르지만은 않는 등 입체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본의 첫 페이지부터 소름이 돋았는데, 주인공의 이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지석……?”
분명 회귀 전 주인공의 이름은 ‘민성’이었다. 작년에 받았던 대본에도 분명 민성이었는데, ‘지석’으로 바뀐 것이다. 처음에는 헛것을 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눈을 비비고, 대본의 글자를 문질러도 그대로였다. 그때에야 비로소 감독님의 말에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작은 선물도 함께 보내요.”
한동안 다음 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다.
* * *
크리드의 컴백 이후 오랜만에 도파민 가득한 일상을 보내던 문스트럭에게 또 하나 엔돌핀이 돌 만한 소식이 전해졌다.
“드리밍? 김 감독 영화?”
문스트럭은 곧장 기사를 확인했다. 지라시와 가짜 뉴스가 난무하기 때문에 이번에도 희망 캐스팅 따위의 낚시 글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었다.
[크리드 문승빈, 드리밍 합류…]
인기 남자 아이돌 그룹 크리드의 문승빈이 김성진 감독의 ‘드리밍’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출연을 확정지었다. 문승빈은 지난해 드라마 ‘파아란’에서 첫 연기 도전임에도 준수한 연기실력으로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영화 ‘드리밍’은 최약체 축구팀을 최고의 팀으로 만들기 위한 감독 ‘지석’과 고상고등학교 학생들의 성장을 담은 스포츠 성장물이다. 문승빈은 주인공 ‘지석’을 연기하여 영화의 생명력을 더할 예정이다. 김성진 감독은 전작에서 보여 줬던 문승빈의 연기에 큰 영감을 얻었고, 지석을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은 문승빈밖에 없다며 극찬했다… 드리밍은 2월 크랭크인을 목표로 막바지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관계자는 전했다.
-아 나 또 문승빈 뽕차오르네
-오직 문승빈만이 연기할 수 있는 캐릭터래 ㅈㄴ기대돼;;
-내새끼 너무 잘나서 소름돋음
-축구감독 문승빈이라니…이건 무조건 된다.
-ㅁㅊ이거 유현재도 나오는 영화 아님?
└ㅠㅠㅠㅠ영훈태주조합을 2년만에 다시 보다니ㅠㅠㅠㅠ
-스크린 데뷔부터 김성진 감독 주연자리 먹은 게 내 최애라니…
-근데 또 문승빈만 개인활동인거임?ㅋ…
└응 크리드 멤버 중에 개인 활동 프로듀싱 하는 애들 빼고 안 하는 애들 없음~
└가세요 그나마 있는 니 최애 인지도도 다 없애버리기 전에
문득, 어제 크림에서 승빈이 내일 좋은 소식이 있을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기대를 남기고 간게 떠올랐다. 자작곡이나, 자체 콘텐츠가 나올 것이라 예상한 자신이 승빈을 너무 과소평가했다고 탄식했다.
지난 ‘어쩌면 그날’ 오디션에 승빈도 참여했다는 후기 글을 봤었기 때문에 유현의 캐스팅 소식을 축하하면서도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같은 감독의 영화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되다니. 역시 문승빈 덕질을 하면 자다가도 떡밥이 떨어진다.
“이렇게 좋은 날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문스트럭 @Moonstruck_Bean 1분 전
[크리드 문승빈 영화 데뷔 축하 #RJ 이벤트
승빈이의 스크린 데뷔 확정을 축하하며 리짹 이벤트합니다:D
리짹해주신 분 중 추첨을 통해 2분께 승빈이를 닮은 귀여운 강아지 인형을 보내드립니다!
대상은 클로버 한정X 타팬 참여 가능]
-이거 그때 그 홍탕에 빠졌던 인형인가?
-가지고 싶었는데ㅠㅠㅠㅠ
-이 집 승퍼피 내꺼
이벤트 글을 업로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승빈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승비니: 혜진아!]
“아, 이름 부를때마다 심장 아파…….”
@@를 붙이면 자동으로 설정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데, 이미 2년 가까이 구독을 하면서도 훅 들어오는 이름 공격은 적응이 안 되는 문스트럭이다. 처음에는 크림으로 유사를 먹는 기분이 어떤지 궁금해서 자기, 애칭 등으로 설정했지만 은근한 현타와 함께 누나 혹은 본명으로 바꾸게 되었다.
[승비니: 어제 내가 좋은 소식 있을거라고 했잖아ㅎㅎ]
[승비니: 너무 좋은 작품이어서 처음에 캐스팅 제의 왔을 때 엄청 놀랐다!]
[승비니: 그리고 이건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승비니: 크리드 활동에는 절대 지장 안 가게 내가 더 노력할게]
“하여간 괜한 걱정들은… 다른 아이돌도 아니고 승빈이인데.”
이전의 수많은 예능 촬영, 드라마 촬영 속에서 한 번도 크리드 활동에 불참하거나, 무대 위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 준 적 없다. 그래서 문스트럭은 이번에도 승빈을 믿었다.
* * *
대본 리딩 현장에는 내가 제일 먼저 도착했는지 아직 조용했다.
“안녕하세요, 크리드 문승빈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어머, 승빈 씨. 일찍 왔네요!”
“작가님, 잘 지내셨죠?”
“그럼~ 파아란 이후로 오랜만이네?”
“네. 한번 얼굴 뵙고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이번 김 감독의 작품의 시나리오는 ‘파아란’의 시나리오 작가분과 공동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도 한동안 화제였다. 그동안 드라마계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던 정 작가와 떠오르는 영화계 블루칩인 김 감독의 공동 작업이었으니까.
“에이, 요즘 크리드 바쁜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우리 딸도 크리드 너무 좋아해. 내가 너랑 같이 작업하게 됐다고 하니까 엄마가 달라 보인다고 하는 거야.”
“작가님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데…….”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작가 열 손가락에 드는 작가님도 자녀 앞에서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구나, 하긴 나도 가족한테는 평범한 남자애일 뿐이니까.
“안녕하세요, 유현재입니다… 어? 작가님, 안녕하세요? 승빈아, 오랜만이다?”
“주연 둘이 제일 먼저 도착하네-”
“오랜만이에요, 형.”
“이번에도 잘 부탁한다.”
“저도요.”
“맞다. 너 내 솔로곡 들어 봤냐?”
“당연하죠. 형이 노래 나온 날 바로 메시지 보냈잖아요. 주변에 홍보도 했어요.”
유현재는 2년 전 파아란 활동 이후 좀처럼 얼굴을 볼 일이 없었다. 크리드가 국, 내외를 불문하고 활동이 빽빽하게 이어지고 있던 반면에, 하이드는 유현재의 연기 활동과 동시에 1년이 넘도록 공백기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지난해 말, 멤버 다수와 계약을 해지하고 팀은 해체됐다.
하지만 유현재의 아이돌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올 초 솔로로 재데뷔를 했는데, 유현재에게 모든 것을 올인했는지 괜찮은 퀄리티의 곡을 발표했다. 그리고 하이드 전체 인기를 하드 캐리 했던 멤버인 만큼, 탄탄한 코어 팬층을 가지고 있어서 앨범 판매량과 뮤직비디오 조회수도 좋은 성적을 거뒀다.
“기다려라. 내가 하이드로는 못 했지만, 솔로로 꼭 콘서트 할 거니까.”
“그때 꼭 저 초대해 줘야 하는 거 알죠?”
“당연하지.”
시간이 지나면서 유현재의 날카로움도 점점 둥글어지는 듯했지만, 편해진 사람 한정이었다.
“근데 그 오…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걔는 왜 갑자기 군대를 간 거냐?”
“글쎄요? 많이들 쓰는 방법 아닌가요? 뭔가 일이 터지면 다들 군대부터 가잖아요.”
“포커스 다른 놈들도 안 갔는데, 혼자 갈 정도면- 얼마나 큰 잘못을 한 거냐?”
정말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그러게요. 저도 궁금해요, 왜 그렇게 된 건지.”
“뭐, 연예계에 미스터리한 일이 한둘인가? 사실 별로 관심도 없었어. 그냥 궁금했을 뿐이지.”
턱을 괴고 잠시 고민하던 유현재가 화제를 전환했다.
“하, 근데 왜 네가 감독님이고 내가 고등학생 역할인 거냐…….”
“이봐요, 그렇게 말하면 제가 너무 나이 들어 보이잖아요? 지석이도 겨우 대학생인데-”
“내가 너한테 형이라고 해야 하잖아-”
“익숙해지게 미리미리 형이라고 부르세요- 현장에서 야, 너 하면 안 되잖아요?”
“으… 나 지금 토할 뻔했어.”
“저도 썩 반갑지는 않네요…….”
유현재와 시답잖은 얘기를 하는 중에 다른 배우들과 김 감독도 도착했다. 밝고 활기찬 작품인 만큼 대본 리딩 현장도 에너지로 가득했다.
“각자 자신의 캐릭터를 어떻게 해석했는지가 궁금한데, 간단하게라도 말해 줄 수 있나요?”
‘이번에도 역시…….’
회귀 전 ‘어쩌면 그날’ 대본 리딩 때도 캐릭터에 대한 해석을 요구해서 많은 출연진을 당황시킨 감독님다웠다.
“지석이란 친구는, 유망주였지만 무릎 부상으로 축구를 그만둔 대학생이에요. 그러다가 대학교 봉사 점수를 받기 위해 동네 축구팀의 코치를 맡게 된 인물이죠. 모두에게 친절하고 밝아 보이지만, 축구와 부상에 대한 트라우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친구예요. 과거에 대한 후회가 베이스인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 축구팀에 온전히 마음을 주지 못한 이유가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자신과 너무 닮았으니까요. 그들을 보면서 자신의 현재를 직면하는 게 두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결국엔 그들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과거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갈 추진력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왁자지껄했던 분위기가 사뭇 진지해졌다. 김 감독님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갑작스러운 요구에도 잘 대답해 줘서 고마워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지석이의 또 다른 면을 말해 줬네요.”
이 세계에서 다시 만난 새로운 지석이다. 온전히 나만의 캐릭터로 완성할 테다. 혼자만의 다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