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그리고 또 하나, 운명하면 떠오르는 키워드 3개만 보내 달라고 했잖아요. 아주 재밌는 결과가 나왔어요.”
“재밌는 결과요?”
누나가 가져온 상자에는 단 하나의 오브제만 있었다.
“난 진짜 이럴 줄은 몰랐지, 전부 크리드라고 했어요.”
크리드라고 적혀 있는 무지갯빛 클로버 모양의 오브제. 멤버 중 어느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자세히 보니, 일곱 명의 오브제 색을 합치면 무지개가 완성되는 형태였다.
“와…….”
나 역시 영롱하게 반짝이는 오브제에 한동안 모든 마음을 빼앗겼다.
“너무 예뻐요…….”
“여러분들의 답변이 일치하는 걸 확인하고, 이번 촬영의 스토리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됐어요. 오해나 디렉터님도 만족했고.”
촬영은 개인 오브제를 활용한 컷으로 시작했다. 유현이 형은 아이돌, 박재봉은 가수, 강도현은 무대, 윤빈 형은 음악, 지운이 형은 멤버들, 나는 크리드를 운명으로 골랐다. 이번 사진 촬영은 개인 오브제와 함께하는 컷과, 전체 오브제와 함께하는 두 가지 콘셉의 촬영이었다.
“기분 탓인가? 지난번보다 훨씬 더 잘하는데요?”
“감사합니다!”
한번 촬영을 해서 그런지, 멤버들도 금세 촬영에 적응했다. 유현이 형의 개인 숏을 찍으면서 누나는 홀린 듯 감탄했다.
“유현 군의 얼굴은 정말… 매번 카메라에 담으면서도 놀라요.”
“아… 감사합니다.”
“형, 신경 쓰지 마요. 우리 누나가 미적으로 아름다운 것에 환장을 해서.”
“넌 좀 조용히 해라.”
지난번 촬영 때, 다 죽어 가면서도 작가님이라고 한 것이 꽤 충격이었나 보다. 오늘은 누나라고 하거나 장난을 쳐도 잠시 질색할 뿐, 혼을 내지는 않았다.
“내 얼굴도 매번 놀라지?”
“그럼~ 우리 승빈이 촬영하면 늘 같은 생각 하지.”
“뭔데?”
내심 기대했지만, 역시 우리 남매 사이에 낭만이 있을 리가 없다.
“우리 승빈이… 어제보다 오늘 더 못난이가 됐구나…….”
“아, 누나!”
“이것 봐! 지금 완전 못난이 인형처럼 나왔잖아?”
누나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셔터를 눌렀다. 모니터링해 보니 정말 못난이 인형처럼 나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현장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이 사진을 보며 배를 쥐고 웃었다.
“이거 꼭 비하인드 컷으로 넣어야지!”
“나 크리드 그만하게 하려는 작전이야?”
“왜~ 작가님이 완전 절묘하게 순간 포착하셨는데?”
놀릴 수 있는 타이밍을 놓칠 리가 없는 멤버들이었다.
“아니, 이 사람들 진짜 크리드가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맞아? 멤버가 이런 굴욕을 당했는데 너무해!”
“너무하다는 사람치고 너무 즐거워하는 거 아니냐?”
분명 열받는 상황인데 화가 나기는커녕,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못난아, 네 차례니까 빨리 가.”
“아, 네네~”
“쓰읍, 까불지 말고.”
촬영이 시작되고, 누나도 나도 장난기 없이 진지해졌다. 이번 촬영의 콘셉는 ‘운명을 마주한 사람의 황홀함, 그것을 지켜내겠다는 결연함’이었다. 그래서 처음 콘셉 시안을 받았을 때부터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방금 포즈 되게 좋았는데, 얼굴이 조금만 더 보이게 해 볼래?”
“이렇게?”
“응. 와서 봐 볼래?”
촬영을 이어 가는 우리를 보며 멤버들은 바뀐 분위기가 적응이 안 된다는 듯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서로 못난이다, 너무하다 하면서 싸웠던 사이에서는 나올 수 없는 진지함이라고 생각해서겠지.
“확실히 얼굴 보이는 사진이 더 낫지?”
“응. 그리고 혹시 조명 위치를 조금 왼쪽으로 오게 하는 거 어때? 대비가 확실할 거 같아.”
“괜찮은데? 한번 바꿔서 촬영해 보자.”
다양한 포즈를 준비했지만,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 그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누나, 혹시 위에서도 촬영할 수 있어?”
“안 되는 건 아닌데, 왜?”
“찍고 싶은 포즈가 있어서.”
누나에게 제안한 포즈는 품에 오브제를 품고 웅크린 자세를 위에서 찍는 것이었다. 주변에는 멤버들의 오브제를 배치했다. 멤버들의 오브제를 합친 것이 결국 ‘크리드’니까. 어두운 조명에 오브제와 얼굴에만 조명이 들어갔다. 마치 오브제에서 빛이 나오는 듯한 연출이었다.
표정은 소중한 것을 되찾은 듯, 벅차면서도 안도의 미소를 지어 봤다. 그 많은 일을 겪은 후여서 그런지, 굳이 연기를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표정이었다.
“여기 스모그 약간만 추가해 주세요-”
“승빈아, 발끝 조금만 더 뻗어 봐.”
“방금 눈빛 좋았고, 이번엔 눈 살짝 감아 볼래?”
‘마음에 들었나 보네…….’
한번 꽂히면 지독한 완벽주의자가 되어 버리는 누나였다. 자꾸 무언가를 추가하는 것을 보니 자신이 생각하는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한 게 분명하다. 나 역시 피드백을 받으니 더 열정적으로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
“와… 형, 너무 잘 나왔는데요?”
“작가님 최고예요!”
“오늘의 베스트컷인데?”
촬영에 에너지를 많이 소모한 듯, 땀을 닦아 내며 누나가 칭찬인 듯 칭찬 아닌 말을 했다.
“연기 배운다고 허송세월 보낸 건 아니네.”
“사진 배운다고 유급당했던 게 나쁜 선택은 아니었네.”
“유급?”
“사진 배우겠다고 수업 엄청 빠졌거든, 우리 누나… 으악!”
“한마디를 안 져요-”
“악! 아파!”
누나는 해맑은 미소와 함께 무시무시한 악력으로 볼을 꼬집었다.
“악, 우리 아직 단체 숏 남았다고!”
“아, 맞다.”
조금만 더 세게 쥐었다면 분명 한쪽 볼만 퉁퉁 부은 상태로 찍었을 것이다. 단체 컷은 서로의 손을 겹쳐서 ‘크리드’ 오브제를 드는 사진이었다. 먼저, 손에 포커스를 맞췄다. 일곱 명의 손바닥이 겹친 모양이 꼭 꽃봉오리 같았다. 다음은 같은 자세로 멤버들이 고개를 들어 위를 보는 컷이다.
“방금 승빈이 개인 컷에서 지었던 미소처럼 벅차오르는 미소 지어 주세요!”
“벅차오르는 미소…….”
표정 연기에 애를 먹는 선우 형에게 눈높이에 맞는 설명을 했다.
“우리 정식 그룹 확정된 날 떠올려 봐요.”
“내가 그날 어떤 표정이었는지 기억 안 나는데… 울었던 것만 기억나.”
“눈물이 고일 수도 있는 거죠.”
“그런가… 감이 잡힐 듯 말 듯 하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결과물을 보니 모두 선우 형의 표정에 감탄했다.
“선우 군, 촬영 전에 인공 눈물 넣었어요?”
“네? 아뇨?”
“약간 울먹이는 것처럼 나와서 좋은데요?”
“내가 이런 표정이었구나…….”
선우 형 외에도, 멤버들 모두 놀랄 만큼 표정 연기가 좋아졌다. 저마다 자신만의 벅차오름을 표현했다.
성공적인 촬영을 마치고, 장비를 정리하는 누나에게 다가갔다.
“오늘 수고 많았어.”
“너도~ 그래도 애들이 실력이 엄청 빨리 좋아지네. 지난번 촬영보다 수월하게 끝냈어.”
“당연하지, 우리 멤버들이니까.”
“어이구, 크리드 네가 낳았냐?”
사실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었다. 막상 하려고 하니 쑥쓰러워서 자꾸만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짐 정리를 다 해 가는 중이어서, 지금이 아니면 못 할 말이라고 생각했다. 말을 하면서도 민망함에 머리만 긁적였다.
“이번에도 잘 찍어 줘서… 고마워.”
“우리 막내 다 컸네, 누나한테 고맙다는 말도 다 하고?”
잠시 침묵이 오갔다.
“우리… 막내?”
“어으, 못 해 먹겠다. 너도 지금 좀 오그라들었지?”
“오그라드는 게 문제가 아니라, 속이 울렁거렸어.”
“그래, 이래야 내 동생이지-”
이전에 다 꼬집지 못한 것까지 해낼 생각인지, 위 아래로 볼을 반죽하는 누나다.
“엄마 아빠한테 안부 전할게. 너-무 잘 지낸다고.”
“어제 연락드렸는데?”
“뭐야, 이제 연락 자주 해?”
“누나 뭐 하고 지내냐고 하시던데? 연락 좀 자주 해~”
“문승빈한테 부모님 안부 듣는 날이 다 오고, 오래 살았네…….”
문득 어제 엄마와 오갔던 마지막 메시지가 떠올랐다.
[너나 해빈이나 너무 잘 자라 줘서 고마워.]
[역시 내 아들, 딸다워.]
[항상 기억해, 너는 우리의 자랑이라는 걸.]
“오늘 저녁 같이 먹을래? 엄마 아빠한테 사진 안 보낸 지도 오래됐고…….”
분주히 정리하던 누나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옅게 웃었다.
“좋아.”
하지만, 역시 5분 이상 낭만이 지속되지 않는 것은 여전했다.
“아~ 성공한 아이돌 동생이 사 주는 고기맛 좀 봐 볼까?”
‘내 이럴 줄 알았어-’
누나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영수증을 보며 눈물 흘릴 새도 없이 누나의 손에 이끌려 온갖 포토부스 투어를 했다. 오랜만에 보낸 사진에 부모님 모두 반가워했다.
회귀 전에는 가족으로 인해 힘을 얻는다는 말에 크게 공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소중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 * *
“제 첫 인터뷰 상대가 승빈 군이었는데, 이렇게 정식 그룹이 되고 다시 인터뷰하게 되니 감회가 새롭네요.”
“이번엔 단체 인터뷰여서 저 역시 새로워요.”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얼굴의 기자분은 처음 만난 날보다 더 능숙하게 인터뷰를 진행했다.
“정식 그룹이 된 크리드는 이전과 어떤 점에서 가장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서로에 대한 믿음이 더 끈끈해졌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모두 다른 소속사이고, 프로젝트 그룹으로 모였기 때문에 의견을 하나로 모으기가 정말 힘든 일이거든요. 물론 정식 그룹으로 계속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은 일곱 명 모두 같았지만, 저희의 마음만으로는 될 수 없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 어려운 일을 현실로 만드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믿음이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모두에게 크리드가 가장 우선순위였다는 점에서 멤버들에게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유현이 형의 깔끔한 답변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크리드의 음악색과 세계관에도 변화가 있을까요?”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크리드의 음악색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겁니다. 다만, 세계관에는 변화가 있을 거 같아요. 더 늘어난 활동 기간과 정식 그룹이라는 정체성 확립 덕분에 더 광범위하고 풍부한 이야기를 담은 세계관이 되지 않을까요?”
“몇 년 전에 승빈 군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에서 만난 재봉 군은 무척 앳된 소년이었는데, 스무 살이 되면서 정말 멋진 어른이 된 거 같은데요? 이렇게 똑부러진 답변도 할 줄이야.”
“에이, 기자님이 그때 저랑 인터뷰하지 않으셔서 모르셨구나? 저 원래 똑부러지고 말도 잘했어요~”
의기양양한 박재봉의 너스레에 멤버들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기자님도 눈치 챈 것 같지만 조용히 웃으며 박재봉의 말에 호응했다.
“우와, 평소에 귀여운 막내 이미지가 강해서 미처 몰랐어요.”
인터뷰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우리 팀에 대한 관심과 준비성이 질문에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벌써 마지막 질문이네요. 크리드는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음… ‘영원함’이에요. 물론, 영원한 건 없죠. 다 변하고, 사라진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다 알면서도 속고 싶은 게 있기 마련이잖아요? 저에겐 크리드가 그래요. 영원한 건 없다는 세상 속에서도 영원하다고 믿고 싶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영원하다고 믿고 싶게 만드는 존재…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게 정말 부러운데요?”
말할 때는 낯간지러웠지만, 누구 하나 장난치지 않고 진지하게 공감하는 눈빛에 확신했다. 어쩌면, 영원이라는 것은 존재할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