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정식 그룹이 되고 처음 하는 활동인 만큼 심혈을 기울였다. 게다가 이번 앨범 명이 Destiny라는 점에서 더 의미가 깊었다.
“정식 그룹 된 거 축하해요!”
“감사해요,”
“앞으로도 계속 승빈 군이랑 작업할 수 있어서 내가 더 기쁘네-”
앨범마다 심혈을 기울이며 참여했던 오해나 디렉터였지만, 이번 앨범은 특히나 더 공들였다는 것을 회의가 진행될수록 느낄 수 있었다.
“크리드의 정체성은 결국 ‘운명’이라는 게 너무 좋아.”
“저희끼리도 엄청 놀랐어요. 딱 Destiny 활동 전에 정식 그룹이 돼서요.”
이번 앨범의 콘셉은 마침내 유토피아에 도착한 탐험가다. 서로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한곳에 모여 ‘크리드’라는 유토피아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스토리다.
“타이틀곡은 정해졌나?”
“퍼포먼스도 중요하지만, 멤버 개개인의 목소리가 잘 담길 수 있는 곡을 타이틀로 하려고 해요.”
“이번에도 윤빈 군이 참여하는 거죠?”
“네. 형만큼 우리를 잘 아는 프로듀서는 없으니까요.”
잠깐의 망설임도 없는 나를 보며 오해나 디렉터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왜…….”
“내가 승빈 군 나이 때, 이렇게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이었나? 생각이 들어서요.”
“디렉터님도 자기 확신이 약하던 때가 있었어요?”
“어머, 내가 평생 지금 같았는 줄 알았어요?”
“그야… 디렉터님은 프로페셔널하고,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잖아요. 맞다고 생각하는 길에 주저 없이 도전하고요.”
“난 승빈 군 나이 때 안 그랬어요. 아니, 못 그랬지. 너무 어렸고, 모르는 게 많았으니까.”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오해나 디렉터라니, 도저히 상상이 안 됐다. 오해나 디렉터가 빙긋 웃었다.
“그래도 기분 좋네요. 그때 내가 바랐던 내 모습에 어느 정도 도달한 거 같다고 확인받았으니까.”
“저도 아직 갈 길이 멀었는걸요.”
“그래도 승빈 군은 뭔가…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너무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크리드라는 그룹에 승빈 군이 꼭 필요한 존재인 거고요.”
‘꼭 필요한 존재…….’
“크리드의 정식 그룹 계약이 더 기쁜 이유는, 서툴지언정 방향을 잃지 않는 여러분의 여정을 더 오래 볼 수 있기 때문이에요.”
서툴지언정 방향을 잃지 않다는 말이 가슴에 깊숙이 박혔다. 하나도 빠짐없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린 순간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서로를 지탱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방향을 잃지 않았던 것 아닐까.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에이, 그러면 쉽게 지쳐요. 그저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면 돼요. 내가 후회가 남지 않는다면, 그걸 보는 사람들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이건 내가 여기까지 오면서 얻은 인생의 팁.”
오해나 디렉터를 코어에 남게 한 것은 이곳에서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다. 정말 멋진 어른이자 조력자였으니까.
“맞다. 이번에 앨범 디자인은 크리드하고 인연이 깊은 분들과 작업하게 됐어요.”
“저희랑 인연이 깊은 분들이요?”
“다음 회의에는 멤버들이랑 같이 와요. 작업하는 분들이 크리드를 정-말 좋아하는 분들이라…….”
“네!”
우리와 인연이 깊은 작가라니, 멤버들도 내내 궁금해했다.
“헐, 설마?”
“왜요, 선우 형. 누구 아는 사람 있어요?”
“모모 보보 작가님 아니야?”
“…대박.”
“우리 아직도 좋아하시나……?”
“야,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하냐? 아직도 우리 좋아하셔-”
“형이 어떻게 알아요?”
“나? 작가님들 엔스타랑 짹짹이 다 팔로우하고 있거든.”
선우 형이 내민 화면에는 모모&보보 작가의 작업물이 있었다. 여전히 상반된 스타일이었다.
“어떡해? 나 완전 떨려……!”
“맞아, 작가님 중 한 분이 선우 형 팬 아니었어요? 막 지하철 광고도 내셨던 거 같은데.”
“나 이번 앨범 가보로 간직할 거야… 나중에 내 후손들한테 이 할아버지가 얼마나 성공한 아이돌이었는지 맨날 맨날 말해 줘야지.”
“한 분은 유현이 형이 최애셨지?”
“형, 뭐라도 디자인해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작가님이 엄-청 팬이신데.”
“그분이 전에 유현이 형 디자인 놀리는 사람들 비판하는 글도 올렸었잖아.”
유현이 형은 소리 없이 귀가 붉어져 있었다.
“…그만 놀려.”
저렇게 말해 놓고 엽서 디자인 시안을 가져와서 뭐가 낫냐고 묻는 형이었다.
“와… 우.”
“뭐가 제일 낫냐……?”
“아니, 형. 저 이제 좀 아쉬워지려고 해요. 왜 괜찮아 보이지? 왜 실력이 좋아진 거예요?”
“그만 놀리고, 뭐가 제일 괜찮냐고-”
“이거요.”
민망해하면서도 정성껏 준비하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유현이 형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외로 귀엽다니까 진짜.
* * *
코어 소속사에 도착한 모연과 보현은 입구에서 한참 동안 서성였다.
“긴장하지 말자니까? 여기 오늘 우리 일 하러 온 거야.”
“나도 알아요! 그치만, 선우를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다잖아…….”
모연은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그녀 역시도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긴장 상태였다.
“네가 열어.”
“싫어요. 누나가 열어요.”
“다음에 티켓팅 안 도와준다?”
“참나, 내가 더 잘하거든요?”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고 모연과 보현은 얼어붙었다.
“누구 찾으세요?”
“…승빈?”
“으아악!”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비명을 참지 못한 모연의 입을 보현이 급히 막았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승빈과 크리드 멤버들은 토끼 눈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귀엽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답도 없다고 생각하는 둘이었다.
“어? 작가님, 벌써 왔어요?”
회의실에 있던 오해나 디렉터가 문을 열었다. 이미 저 둘이 크리드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눈에는 귀여울 뿐이었다.
“모모 보보 작가님이세요? 안녕하세요!”
“헐, 작가님을 실제로 뵙는 날이 오다니, 잘 부탁드려요!”
박선우가 덥썩 보현의 손을 잡았고, 그는 입도 제대로 다물지 못한 채 눈만 깜빡였다.
“선우, 선우다…….”
“저 완전 팬이에요!”
“팬이요? 누구? 저요?”
“네!”
“누, 누나 내가 지금 듣고 있는 게 맞아?”
모연은 어이가 없었다. 절대 밖에서, 특히 일과 관련한 곳에서는 ‘누나’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는데 최애 앞에서 단단히 정신줄을 놓다니.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최애가 팬이라니, 내심 부럽기도 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도 보현과 같은 처지가 되었지만.
“안녕하세요, 작가님. 작업 잘 보고 있어요. 저도… 팬입니다.”
“…….”
“그리고 이거… 제가 준비했어요.”
최애가 건넨 엽서에 그녀는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어나가 세상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모연의 미적 감각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도, 하고 싶지도 않은 디자인이었지만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악한 디자인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이걸 준비하기 위해 쏟은 시간과 정성이 감동이었다.
“유현이 형이 엄청 열심히 준비했어요, 작가님 선물이라고!”
“정, 정말요?”
“저한테 어떤 게 제일 예쁘냐고 백번은 물어본 거 같아요-”
오래 살고 보니 최애에게 선물을 받는 날이 오는구나- 그녀는 지금의 명성을 얻기까지 보낸 시간이 더욱 소중해졌다.
“팬 미팅은 끝나고 이어서 하고, 이제 일 얘기 좀 해 볼까요?”
넋을 놓고 최애 영접을 하던 모연과 보현은 겨우 정신을 붙잡고, 준비한 디자인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준비한 시안 몇 개 같이 보면서 진행할게요.”
둘이 준비한 디자인은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었다. 오히려 멤버들에겐 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고역이었다. 보현의 감성이 담긴 시안은 동화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였고, 모연의 시안은 모던하면서도 깔끔했다.
“전부 다 우리 앨범 커버로 쓰고 싶은데요?”
“그니까! 이 중에서 어떻게 골라요? 너무 어려워요-”
“커버 안 된 애들도 꼭 앨범 안에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그럼 저희는 너무 좋죠~”
준비한 디자인이 전부 채택되는 것은 욕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먼저 제안을 해 주니 두 사람의 입장에서는 고마울 뿐이었다.
“준비한 레퍼런스는 탐험가에 어울리는 것들로 구성했어요.”
“우와, 완전 저희가 찾고 싶었던 분위기 아니에요?”
“역시 작가님들 최고!”
박선우가 활짝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지금껏 일로 만난 사람 앞에서 이렇게까지 잇몸을 만개하고 웃은 적이 있었나? 모연과 보현은 서로에게 소름이 끼쳤다. 분명 집에 들어가면 오늘 서로가 크리드에게 보인 모습을 놀리느라 바쁠 것이다.
회의는 4시간이 넘도록 끝나지 않았지만, 누구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멤버들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작가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경험과 경력에 걸맞게 신선한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진상이거나 자신의 고집만 주장하던 이들과 함께했던 회의와는 차원이 달랐다.
멤버들이 적극적인 이유도 있지만, 모연과 보현 역시 작은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보현의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저희도 정말 즐거웠어요!”
“진짜 최고의 앨범으로 만들어 드릴게요!”
“작가님들 실력 최고인 걸 누가 몰라요? 기대할게요.”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서자마자 모연은 보현의 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꼬집게 했다. 모연은 놓치지 않고 보현의 볼을 잡아당겼다.
“아프지?”
“으… 으프으.”
“꿈이 아니구나…….”
“아니, 왜 꿈이 아닌 걸 제 볼을 희생해서 확인하는 건데요?”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크리드를 주제로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집에 도착한 모연은 곧장 품에 소중히 챙겨 온 유현의 엽서를 액자에 넣어 한쪽 벽에 걸었다.
“내가 진짜 인생의 역작을 만들어 내고 만다.”
모연의 방을 엿보던 보현은, 그녀의 뒷모습에서 오랜만에 불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정말 기대되는 작업을 할 때나 볼 수 있는 희귀한 모습이었기에, 새롭게 타오르는 불씨가 내심 반가웠다.
* * *
앨범 촬영은 이번에도 누나의 도움을 받았다. 생각해 보니, 이번 앨범은 나와 한 번이라도 인연을 맺었던 이들의 참여가 높았다.
“모연 언니한테 들었어, 네가 완전 아이디어 뱅크라는데?”
“정말?”
“응. 이거 봐 봐.”
[승빈이가 진짜 좋은 아이디어가 많았어]
[완전 아이디어뱅크야 천재 강아지!]
“이번 콘셉이 Destiny, 운명이라며?”
“응.”
“흠… 그럼 사진이랑 영상 촬영하기 전에 뭐 하나 알아보고 시작해야겠는데?”
이미 콘셉에 대한 안내도 받았는데 더 알아 둬야 할 게 있을까?
“뭘 알아 놔?”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운명이란 무엇인지?”
“…운명?”
“응. 각자의 운명이 모여서 크리드라는 하나의 운명 공동체가 된 거니까.”
지난번에 이미 촬영을 해 봤지만, 여전히 일터에서 마주하는 누나는 익숙하지 않다.
“자, 여러분이 생각하는 운명을 오브제로 만든 거예요.”
“대박.”
“분명 엄청 이상하게 그려서 냈는데 왜 작품이…….”
물론 내 운명은 딱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바로 크리드 자체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