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더 이상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애초에 나를 이곳에 부른 이유는 지운이 형에게 비밀을 폭로하기 위해서였구나.
“지운이 형은 왜 끌어들이는 거야, 우리랑은 아무 상관 없잖아!”
“정말? 따지고 보면 우리가 다시 만난 건 지운이 형 덕분이잖아?”
지운이 형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그게 무슨…….”
“형, 돌아가요. 여기 위험해요!”
툭, 오재성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난간 너머로 던졌다.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다음에 떨어지는 건 담배가 아닐 거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어차피 곧 끝날 세계지만, 형도 알아야 하지 않겠어?”
“한마디만 더 지껄이면……!”
“왜, 죽이기라도 하게? 웃기다, 승빈아. 죽으러 온 사람한테 죽인다는 말 하면 퍽이나 무섭겠어.”
“승빈아, 이게 무슨 소리야?”
혼란스러워하는 형을 보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괴로웠다. 평생 숨기고 싶었던 비밀이었으니까.
“형은 문승빈이 형과 같은 그룹이 된 게 우연이라고 생각해요?”
“…….”
“만약 형이 문승빈 때문에 죽을 뻔했다면 어떨 거 같아요?”
“오재성!”
“가장 밑바닥의 모습을 보이게 했다면?”
“이해가 되게 말을 할래? 나 지금 너희가 무슨 말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으니까!”
난간 위를 줄타기하듯 아슬하게 서 있던 오재성이 지운이 형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말로만 들으면 현실감이 떨어지긴 한다, 그쵸?”
찢어지는 두통과 함께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이 몸을 휘감았다.
“안 돼!”
오재성에게 달려들려 하자 상태창이 통제 불능으로 발광하기 시작했다. 오재성 역시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하지만,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상태창의 충돌이 이렇게 강하게 일어난 것은 처음이었다.
지운이 형의 비명이 들렸고, 죽을힘을 다해 형에게 걸어오는 오재성을 밀어냈다. 하지만, 절망스럽게도 서서히 시공간은 어그러지고 있었다. 공포감에 눈물 젖은 형의 얼굴이 보였다. 기어갈 힘도 없이 뒤틀려 가는 공간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상태창은 사방이 막힌 곳으로 나를 밀어 넣었고, 주변에서는 소름 끼치는 속삭임들이 들려왔다.
[차지운은 너 때문에 죽은 거야.]
[네가 망친 불쌍한 인생들을 봐.]
[결국엔 네 죄책감 때문이잖아?]
[차지운은 분명 너를 원망할 거야.]
“아니야…….”
귀를 틀어막았지만 소용없었다. 최대한 정신을 붙잡고 이 공간을 벗어나야 했다. 입구도, 출구도 없는 곳인 걸 진작 알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발악하던 나를 한순간에 무너뜨린 것은 형의 목소리였다.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거야, 네가 한 짓들.]
형의 마지막 순간 속 얼굴이 사방을 가득 채웠다. 모든 것을 포기한 공허한 눈을 차마 볼 수 없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외마디 한숨과 함께 주저앉았다.
“이제 다 끝났어…….”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났다.
* * *
정신을 차렸지만, 눈앞에 펼쳐진 장면들에 이곳이 현실이 아닌 것을 직감했다. 그곳에는 내 기억과는 전혀 다른 시간을 사는 내가 있었으니까.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나와 똑같은 얼굴을 했지만, 나는 알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승빈이를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네가 왜……?”
그곳에서 나는 투마월 시즌2 8위로 탈락한 후, 크리드가 아닌 ‘티벡스’의 멤버였다. 장면은 빠르게 전환되어 티벡스라는 그룹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활동했는지를 보여 줬다.
“그래서…….”
그래서 그랬구나. 내 취미가 시집 읽기인 걸 아는 것도, 화음을 잘 맞춘다는 말도 안 되는 재능을 알려 준 것도, 무릎이 아픈 걸 알고 있던 것도. 학폭 논란에 누구보다 빨리 친구를 찾아 준 것도. 내가 어떤 음식을 잘 만드는지도.
“우연이 아니었어…….”
작고 컸던 의문들이 퍼즐 맞추듯 제 자리를 찾아갔다. 티벡스라는 그룹의 끝은 암울했다. 승빈이만이 연기라는 새로운 길을 찾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데,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승빈이라도 연기라는 새로운 꿈을 찾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의 나는 작은 소속사에서 승빈과 함께 아등바등 음악과 안무를 만들고 있었다. 아무도 몰라주는 방송국에서 목청껏 그룹을 홍보하고 있었다. 인기 없는 아이돌이라고 무시하는 이들이 주는 굴욕에도 나는 웃고 있었다. 저 세계에서의 나는, 이곳의 나와는 반대의 삶을 살고 있었다. 아이돌이라는 꿈을 놓지 않았다는 것만은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그냥, 무대가 좋았어.”
나의 마지막을 두 눈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핸드폰을 던지며 텅 빈 눈으로 걸어가는 나의 뒷모습을 볼 때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만 흘리는 기계가 된 기분이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안 돼요, 저희 지운이 형 살려 주세요, 저 진짜 이렇게 형 보내고 도저히 살 자신이 없어요. 선생님, 제발…….”
그런 나만큼이나 절규하는 승빈이 쓰러지는 장면을 끝으로 찐득했던 검은 장막이 사라졌다.
“그래서였어…….”
네가 왜 다른 사람들과 벽을 세웠던 내게 먼저 다가왔는지, 파이널 날 나의 데뷔를 너의 데뷔보다 축하했는지, 왜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울었는지. 작은 사고에도 내 얼굴을 보는 것조차 미안해했는지. 이제 다 이해가 됐다.
손이 떨려 왔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내도 마르지 않았다. 짓물린 눈가가 따끔거렸다. 나를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가시밭길을 자처한 것이다. 새로 주어진 아이돌의 기회, 충분히 나 같은 건 모른 체하고 자신만을 위해 살 수도 있었다. 내가 승빈이었다면, 이만큼 최선을 다 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희생할 수 있었을까?
“충격이 많이 컸나 보네, 형.”
“…….”
“승빈이를 너무 미워하진 마요. 누구나 성공한 삶을 살고 싶은 건 당연하잖아. 그리고 짧지만, 형도 성공한 아이돌이 뭔지 맛도 봤고. 뭐… 곧 끝나겠지만.”
“재성아.”
“기구했던 형, 문승빈 그리고 내 과거를 보니까 어때요?”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
“물론 그럴 수…….”
“네가.”
방금까지 비릿한 웃음을 보이던 오재성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 순간 탄식했다. 너는 정말 끝까지 뻔뻔하구나.
“내가 이걸 보면 승빈이를 원망할 거라고 생각했니?”
무릎을 털고 일어섰다. 천천히 오재성을 향해 걸었다.
“난 오히려 이 세계를 선물해 준 승빈이가 고마워.”
“…고맙다고요?”
“재성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거야, 네가 한 짓들.”
혼란스러워하는 오재성의 얼굴을 끝으로 눈을 떴을 땐, 다시 차가운 옥상 아스팔트 위였다. 체감상 몇 시간이 지난 거 같은데,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승빈아!”
곧장 승빈이 쓰러진 곳으로 달려갔다. 오재성은 무언가에 조종이라도 당하는 듯 머리를 움켜쥐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승빈이 역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승빈아, 일어나 봐! 정신 차리라고!”
* * *
온몸을 짓누르는 감각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여전히 형의 얼굴과 목소리가 사방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그때, 형의 절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승빈아, 일어나 봐! 정신 차리라고!]
그리고 또 나를 붙잡는 오재성의 목소리.
[지금 일어나 봤자 형에게 어떻게 설명하려고? 그냥 아무도 모른 채 끝내는 게 형에게 더 도움이 되는 일 아니겠어?]
설상가상으로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상태창이 반짝거리며 선택창을 보였다.
[※Reset의 기회※]
다시 한번 회귀를 선택하시겠습니까?
그곳에서 회귀자는 처음부터 부와 명예를 가지며 모두의 사랑을 받는 성공한 아이돌로 살 수도 있습니다.
단, 이 세계에서의 인연과는 함께할 수 없습니다.
차지운을 비롯한 회귀자의 회귀와 관련한 인물들은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집니다.
선택은 단 한 번, 취소와 변경은 불가합니다.
[YES/NO]
정신이 혼미해질수록 절박함이 사라진다. 쉬운 길을 찾는다. 지금 이곳을 벗어나더라도 형이 내 말을 믿어 줄까? 저 말대로 이곳에서의 기억은 사라지는 게 더 마땅한 것일까?
‘나만 사라지면 모두가 안전하고, 행복하게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거잖아…….’
하지만, 뒤이은 지운이 형의 외침에 약해진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나 계속 이곳에 있고 싶어. 절대, 절대 잊고 싶지 않아!]
“돌아가야 해…….”
쉬운 길을 걷는 일, 나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곧장 ‘NO’를 선택했다. 자꾸만 ‘YES’를 선택하도록 조건을 덧붙이는 상태창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지긋지긋했던 환상의 공간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정신이 들어? 승빈아……!”
“…지운이 형.”
“그래, 나 여기 있어. 이제 괜찮아.”
“미안해요, 나 때문에…….”
“네가 왜 미안해, 나는 네 덕분에 새 삶을 얻었는데, 네가 왜…….”
그 말에 숨이 넘어갈 듯이 울고 또 울었다. 어째서 형은 한순간도 나를 미워하지 않은 것일까.
“하, 눈물겨운 우정이네.”
“…오재성!”
“내가 꼭 내 몸을 버려서 이 세계의 끝을 봐야겠냐? 선택의 기회를 줘도 날려 먹는 미련한 놈.”
겨우 일어선 오재성이 다시 난간을 향해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막, 막아야 해요, 형.”
“알아. 근데 일어설 수 있겠어?”
“네. 저 좀 일으켜 주세요.”
나만큼이나 오재성도 큰 대미지를 입은 상태였다. 세 걸음을 채 가기도 전에 주저앉고, 쓰러지기 일쑤였다.
지운이 형의 부축을 받으며 가진 힘을 다 쥐어짜 냈다. 난간 위로 먼저 올라선 것은 오재성이었다.
“이제 다 끝내자… 이번 회귀에서는 다시 마주치지 말자고.”
공허한 눈의 오재성이 힘없이 입꼬리를 올리며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안 돼!”
오재성의 몸이 넘어가는 순간 지운이 형은 손을, 나는 발을 붙잡았다. 오재성은 발버둥 쳤지만 온 힘을 다해 막았다.
“놔! 놓으라고!”
“너 이대로 또 다른 세계로 회귀한다고 지금이랑 다른 삶을 살 거 같아?”
“지금보다 더 지옥이 있을까? 이거 놔! 으아악!”
상태창이 날뛰기 시작한 것인지 오재성이 괴로움에 몸을 비틀었다.
“네가 변하지 않는데! 상황이, 환경이 바뀐다고 뭐가 달라질 거 같아?”
“그만 도망쳐!”
격렬하게 저항하던 오재성의 움직임이 잠시 멎었다. 그 틈을 타 난간 위에서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애초에 나에게 모질지 않았으면 됐잖아… 내 꿈 한 번만 이뤄 줘도 되는 거였잖아…….”
“네가 단 한 번이라도 배우라는 꿈에 직진했다면, 다른 도움을 받으려고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상태창도, 운명도 네 편이 되었을 거야.”
“…헛소리하지 마.”
“내가 널 살린 건, 이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이고. 네가… 한 번쯤은 후회 없이 살아 보길 바라서야.”
“아냐… 내가 잘못된 게 아냐… 이게 다… 이게 다!”
혼자서 중얼거리던 오재성이 갑자기 실성하듯 웃다가 흐느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