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원래는 이렇게 무거운 무대를 할 계획이 아니었다. 나 역시 가장 재계약 가능성이 적은 걸 대중과 팬들이 잘 아는 강도현이 무거운 내용으로 가사를 쓴다면 불필요한 말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가벼운 주제로 가사를 쓰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강도현의 뜻을 굽히기엔 역부족이었다.
“미안, 난 하고 싶은 말은 해야 직성이 풀려서.”
“그래야 너답지.”
강도현이 걱정되면서도 동시에 반가운 대답이었다. 막무가내라고 느껴질 만큼 자신감에 넘친 모습이 가장 강도현답고, 잘 어울리니까. 저 대답을 듣고 나서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을 솔직하게 적어 보라고 하고, 가장 적절한 표현에 대해 함께 고민했다.
랩 메이킹은 해 본 적이 없어서 도움이 되긴 할까 걱정이었다. 랩은 특히나 글자 수와 라임이 중요하니까. 그런데 강도현은 내가 가사를 수정하거나, 표현을 제안하면 원래 그 가사가 들어가야 했던 것처럼 멜로디나 비트를 수정해 왔다.
내가 잠깐 생각에 잠긴 와중에도 무대는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무겁게 눌러 쓴 모자를 던져 냈을 때, 눈가의 화장은 이미 번진 지 오래였다. 코끝이 붉어질 정도로 울컥한 얼굴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워 보였다.
[무모한 줄 알지만
다시 영원을 약속해 볼게
믿어 달란 말도 미안하지만
자존심 따윈 더 이상 중요치 않아]
강도현이 자존심 따윈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데까지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까, 어느덧 6년이 넘은, 강도현과 알고 지낸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노래가 끝나고, 무대 위로 멤버들이 올라오자 강도현은 긴장이 풀렸는지 잠시 주저앉았다.
“도현이가 이번 무대 준비하는 동안 엄청 부담감을 많이 느꼈을 거예요. 클로버가 응원 많이 해 주세요!”
지운이 형의 말에 관객석에서 응원의 말과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르던 강도현이 천천히 일어섰다.
“괜찮아?”
“응. 심장 터지는 줄 알았네…….”
“잘했어, 인마.”
“괜찮았냐?”
“울 뻔한 거 빼고?”
“안 울었거든!”
“울컥한 걸로 정정해 드릴게-”
“거기 두 분, 마이크도 안 끄고 뭐 하세요?”
“도현아, 울컥이라니. 거의 울었으면서!”
“선우 형!”
“자, 싸우지 말고 무대 소개 좀 해 주세요-”
아웅다웅하는 우리 셋을 중재한 것은 언제나처럼 지운이 형이었다. 강도현은 씩씩대다가도 무대 소개에 곧장 진지한 눈이 되었다.
“이번 노래 제목은 ‘Promise’인데, 제목 그대로 제가 여러분에게 약속하고 싶은 말들을 가사로 적은 곡이고 무대예요. 무거운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저희가 올해 뭔가 일들이 엄청 많았잖아요? 좋은 일도 많았지만, 우리 팀에 대해 안 좋은 일들도 있었죠. 그 중심엔 항상 제가 있었고… 그래서 팬분들이 많이 걱정하셨을 거 같아요. 저라는 사람에 대한 확신도 줄었을 것 같고.”
“아니야!”
“역시 클로버는 목소리가 커… 아무튼! 그래서 이번 무대를 통해 여러분에게 약속하고 싶었어요.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저도 온 힘을 다해 우리 팀과 함께하겠다고요.”
강도현의 말에 눈물을 보이는 팬들도 있었다. 윤빈 형과 지운이 형도 연신 물을 들이켰다.
“아이, 역시 분위기 무거워졌네… 죄송해요. 하지만 딱 여기까지만! 오늘 즐거운 날이고 뒤에 더 엄청난 무대들이 있으니까 다들 이전처럼 즐겨 주세요! 알겠죠?”
“야, 안 그래도 윤빈 형이랑 지운이 형 울컥한 거 참으려고 하마 됐어!”
“무대하다가 화장실 가고 싶다고 하는 거 아니야?”
“안 그래도 갔다 오려고.”
“근데 지운이 형, 바로 다음이 형 차례인데요?”
“윤빈아, 나랑 순서 바꿀래?”
“쏘리, 형.”
능글맞게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윤빈 형과 지운이 형의 합동 작전이 효과가 있었다. 지운이 형의 무대를 위해 모두 무대 뒤로 내려왔고, 그제야 강도현은 참았던 눈물을 쏟아 냈다. 갑자기 멤버들에 대한 사랑이 넘쳐나는지 한 명 한 명 껴안기까지 했다. 팬들 앞에서는 죽어도 눈물을 보여 주기 싫었나 보다.
“이 형은 잘해 놓고 왜 울어요!?”
“조용히 해, 이 자식아…….”
“참 나, 징그러우니까 좀 떨어져요-”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별 반항 없이 안겨 줬다. 왜 가만히 있냐는 말에 거부하면 더 엉겨 붙어 올 거 아니냐고 하니, 아니라고는 안 한다.
“너랑 데뷔해서 다행이다.”
대답 없이 펑펑 우는 애 등을 가만히 두들겼다. 나 역시 그렇다는 답 대신이었다.
* * *
지운이 형의 무대엔 물이 사용됐다. 동양풍의 신비로운 매력이 돋보이는 솔로곡이다. 현대 무용이 잘 어울리는 형의 매력을 완벽하게 살린 안무까지, 형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기 충분했다. 물 위에서 춤을 추는 형의 모습은 성별과 상관없이 모두의 넋을 나가게 하기 충분했다. 현장에 있던 스태프들도 저마다 형의 실력과 비주얼에 대해 감탄했다.
[심장 위로 붉게 피어나는 꽃
새롭게 눈 뜨는 감각
이 모든 순간에
절대 눈 감지 마]
나풀거리는 셔츠와 검정 슬랙스는 형의 춤선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물에 젖은 셔츠 때문에 형의 몸이 조금씩 보였는데, 말랐지만 오랫동안 춤을 추면서 만들어진 근육들이 적당히 잡혀 있었다. 물 때문에 젖은 머리가 얼굴 위로 아무렇게나 달라붙었지만 형의 비주얼에는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처연한 분위기를 더해 주는 효과까지 있었다. 무쌍의 길게 뻗은 눈, 뚜렷한 티 존과 하얀 피부까지, 동양풍 콘셉에 완벽하게 걸맞는 비주얼이었다.
[네 앞에 피어난 붉은 꽃
져 버리는 날 흩날리는
꽃잎이 되어 또다시
네 마음 위에 내려앉으리]
무대를 마친 형은 방금 전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은 어디 가고, 젖은 머리와 옷이 민망한 듯 웅크려 앉았다.
“여기 학생 클로버들, 괜찮아요?”
“네!”
“완전 괜찮아요!”
“갑자기 청불 팬 미팅 되는 거 아닌가 걱정했어요-”
지운이 형은 민망한 듯 얼굴을 감싸고 모기만 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저 앞에 클로버 좀 비춰 주세요, 너무 웃겨요!”
[차지운 복근 내 미래보다 선명하다!]
“형이 이번 무대 준비한다고 운동을 어찌나 열심히 하던지-”
“맞아요. 더 할 게 어디 있다고!”
“지운이 형, 욕심쟁이!”
아니라며 손사래 쳤지만,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가 있었다. 하여간 재밌는 형이다.
윤빈 형의 솔로곡 무대는 형의 에너제틱한 매력을 제대로 보여 줬다. 농구복을 입고 등장했는데, 팬들의 반응이 그 어느 때보다 폭발적이었다. 과거 고등학교 농구 선수로 활동했다는 말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 농구복을 보고 싶다는 말이 많았다. 형이 농구복을 선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다양한 운동으로 다져진 몸을 보니 저절로 내 팔과 복근을 보게 됐다.
“운동을 얼마나 해야 저렇게 되는 거지…….”
“다시 태어나야 할 듯?”
강도현이 옆에서 깐족거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에 같은 팀이 돼서 다행이라고 눈물 흘리던 놈이 맞나?
중간중간 농구공을 이용한 안무를 하는데, 정말 미국의 하이스쿨 영화를 보는 듯했다.
[목표를 향해 Go get it!
멈추지 말고 One Two Step
언제나 얼굴엔 넘치는 Smile]
무대 내내 이빨이 다 보일 정도로 환히 웃는 얼굴은 보는 사람도 기분 좋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건강한 에너지가 넘치는 무대였다.
드디어 마지막으로 내 솔로곡 무대만 남았다. 거울 앞에 서서 마지막으로 의상을 점검했다. 오랜만에 보는 내 모습이다. 그때는 지금의 나를 예상조차 못 했겠지. 옆에 있던 지운이 형이 물병을 건네며 반대 손으로 주먹을 내밀었다. 나는 익숙하게 주먹을 부딪쳤다.
“잘하고 와.”
“당연하죠.”
리프트가 올라가고, 머리 위로 조명이 쏟아진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흘러나오는 전주에 몸을 맡겼다.
* * *
“애들 솔로곡 무대, 너무 혜자 아니냐고요-”
“그러니까요! 얘들, 몸이 10개인 게 분명해요. 어떻게 그 스케줄 속에서 솔로곡을 준비할 수 있지? 게다가 다 자작곡이라니…….”
“승빈이 최애라고 하셨죠? 솔로 무대 뭐 할까요?”
“저도 너무 궁금해요… 이번에 공개한 자작곡도 라이브로 꼭 듣고 싶은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둡지만, 무대 위 승빈의 실루엣이 보였다. 곧 조명이 들어오고, 문스트럭은 외마디 비명이 터졌다. 수수한 셔츠와 청바지 차림새에 주변 팬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뭐야, 문승빈만 스타일링 왜 이래?”
“너무 뭐가 없는 거 아님?”
“너무 차이가 큰데?”
하지만, 문스트럭을 비롯한 승빈의 팬들은 저 옷이 어떤 옷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왜, 왜요?”
“저거 승빈이… 투마월 오디션 때 입었던 옷이에요.”
“헐, X친.”
평범하기 그지없던 승빈의 방에서, 아직은 앳된 얼굴에 뭐든 열심히 하겠다는 열정으로 가득했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리고 익숙한 전주, 승빈의 솔로곡 ‘별자리’였다.
오직 꿈 하나로 기약 없는 도전에 뛰어든 열여덟 승빈이, 이제는 최정상의 아이돌이 되었다는 것이 소름 끼치도록 자랑스러웠다.
[끝도 없는 이 우주 속
너는 내 별자리를 선택했고
나는 네게 빛을 보냈어
그날의 목격자가 되어
모두가 날 잊는대도 네가 기억해 주길
단 하나의 소망을 담아 흩어질게]
직접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승빈은 꿈꾸는 소년 그 자체였다. 스타일링은 가장 수수했지만, 문스트럭의 눈에는 그 누구보다 빛나 보였다. 반짝이는 눈만으로도 지금 승빈이 얼마나 행복한지 가늠할 수 있었다.
승빈이 손을 뻗어 양쪽으로 흔들며 관객 호응을 유도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하나둘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 공연장을 밝히기 시작했다. 승빈이 클로버를 생각하며 만든 곡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사 한 줄 한 줄에 귀를 기울였다.
[내 빛을 지나쳤대도 괜찮아
몇 번이고 외롭게 부서진대도
다시 한번 너의 별로 편지를 보낼게]
마지막 가사에는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오직 기타 소리와 승빈의 목소리만 들렸다. 팬들도 모두 숨을 죽이고 승빈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노래가 끝나고 한동안 여운이 사라지지 않았다. 조명이 꺼지고, 멤버들이 무대 위로 올라오고 나서야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엠씨인 다다는 벅찬 목소리로 질문했다.
“이번 의상은 승빈 씨가 특별이 제안한 거라면서요?”
“네. 사실 이 옷이 제가 투마월 오디션 영상 때 입은 옷이거든요.”
“그땐 그냥 승빈 씨의 집이었잖아요.”
“맞아요. 워낙 급하게 찍은 영상이어서 사실 하나도 꾸미지 못하고, 정말 날것의 상태로 찍은 영상이기도 하고요.”
“어떻게 그 옷을 다시 입고 무대를 할 생각을 했어요? 천재예요? 맞죠, 클로버?”
“네!”
문스트럭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뭔가… 그때의 저에게도 보여 주고 싶은 무대여서 그랬던 거 같아요. 그때는 한 치 앞도 몰랐지만, 훗날 이렇게 많은 팬 앞에서 팬분들만을 위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될 거라고.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요.”
문승빈 때문에 흘린 눈물로 분명 한강도 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문스트럭이었다. 오늘 최소 두 컵은 더 추가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