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Chance 활동이 끝나고 바로 이어진 두 번째 미국 활동은 데뷔곡이 준 임팩트 덕분에 초반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번에는 알렉스가 먼저 콜라보 제의를 했다. 지난 활동에는 알렉스 혼자였는데, 이번에는 그의 손자, 손녀와 함께했다.
“안녕! 오늘은 할아버지와 함께 왔구나?”
“안녕하세요!”
알렉스는 흐뭇한 얼굴로 스튜디오가 신기한지,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손주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먼저 콜라보 제의를 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더 고맙죠. 덕분에 손주들과 사이도 좋아지고, 젊은 친구들도 나를 알아보더라고요.”
“선생님은 이미 너무 유명해서 다들 알고 있는 게 아니고요?”
“에이, 그래도 이젠 초등학생도 알아본다니까요?”
시대를 풍미한 스타도 손주 앞에서는 평범한 할아버지였다. 괜히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리워져서, 촬영이 끝나고 시간이 빈 날 할머니댁을 찾았다. 크리드로 데뷔한 후에는 항상 영상 통화만 했는데, 깜짝 방문을 하니 두 분 모두 감격스러워하셨다.
“리버!”
“할머니,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너희가 크리드구나, 어서 오렴!”
멤버들을 모두 데리고 간 것이 조금 걱정이었지만, 반갑게 맞아 주시는 모습에 안심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갑자기 찾아왔죠? 멤버들도 많고…….”
“전혀! 우리 손주랑 같은 팀인데~ 항상 만나 보고 싶었단다. TV에서만 보던 친구들이라서 궁금하기도 했고. 배고프지 않니?”
“배고파요-”
부모님께 응석 부리며 자라지 않아서 그런지, 오히려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칭얼거릴 줄도 안다. 부모님 앞에서와는 사뭇 다른 태도에 멤버들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형,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는 완전 애교쟁이인데요?”
“이, 이게 어떻게 애교냐?”
“거의 클로버 앞에서 애교 부릴 때 텐션이던데?”
“리버, 부끄러운 일이 있니? 귀가 엄청 빨개졌어.”
“할머니! 멤버들이 놀려요-”
“놀린다고? 집 밖으로 내보내 버릴까?”
장난기 없는 말투지만, 이미 할머니의 머릿속엔 어떻게 장난을 쳐 볼까- 로 가득할 것이다. 어렸을 때 하도 많이 당해서 이제 더 이상 속지 않는다.
‘엄마가 장난기가 많은 건 할머니 유전이 분명할 거야…….’
다들 멀뚱멀뚱 나와 할머니를 지켜보는 와중에 영어를 이해한 윤빈 형과 유현이 형은 진땀을 빼며 해명했다.
“죄, 죄송해요! 리버의 이런 모습을 저희가 처음 봐서…….”
“기분 상하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푸하하!”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졌다. 배를 쥐고 끅끅대며 웃는 나와 할머니를 보며 어리둥절한 멤버들의 얼굴도 볼 만했다.
“장난, 장난이었어요. 가만 보면 리버 친구들은 항상 잘 속는 거 같아.”
“한국어 잘하시네요……?”
“우리 집에 처음 오는 사람들은 거쳐야 하는 관문 같은 거예요.”
부엌에서 무언가 준비하던 할아버지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넌지시 물었다.
“리버, 할머니가 또 장난쳤니?”
“당신도 리버 친구들 반응을 봤어야 했는데!”
“다행이다……. 승빈이 연기 실력이 괜히 좋은 게 아니었어.”
“미리 온다고 연락 줬으면 음식이라도 준비했을 텐데. 잠깐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렴. 할아버지랑 같이 맛있는 거 만들어 줄게.”
“좋아요!”
“윤빈이가 역시 먹는 걸 좋아하는구나?”
“제 이름도 아세요?”
“그럼~ 리버가 나온 프로그램이랑 챙겨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 외웠지.”
“할머니! 제 이름도 아세요?”
“네가 재봉이 아니니? 제일 막내잖아.”
“맞아요!”
붙임성 좋은 박재봉은 벌써 할머니에게 반쯤 안겨 있었다. 누가 보면 박재봉이 손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많이는 아니지만 열심히 준비했어, 맛있게 먹으렴!”
“와…….”
“이, 이게 많은 게 아니라고……?”
상다리가 부러질 거 같다는 게 과장이 아니었다. 한식부터 디저트까지 음식이 끊이지 않았다. 체중 조절을 해야 하는 시기였지만, 유현이 형도 차마 먹지 말라고 말하지 못했다. 체중 관리로 몇 주 동안 배부르게 먹지 못한 것도 있었으니까. 처음에는 신나서 와구와구 먹던 멤버들도 도무지 줄어들 생각이 없는 음식에 점점 전투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너무 적지? 기다려 봐. 조금 더…….”
“으니으에, 층브니 마나요.”
“저희 여기서 더 먹으면 배 터져요…….”
왜 이렇게 먹지 못하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한참 설득한 끝에, 음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저희 이제 가 봐야 할 거 같아요.”
“맞다, 리버. 우리도 그… 영상 같이 찍어도 될까?”
“영상이요?”
“응. 알렉스 영상 보면서 네 생각이 많이 났어.”
“당연하죠!”
“내가 디렉팅해 줄게! 할머니, 할아버지. 저만 믿으세요! 저 이런 거 진짜 잘하거든요-”
“선우가 토스맨이랑 찍은 영상도 봤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간단한 춤 동작을 알려 드리고 영상을 찍는데 뭔가 마음이 찌르르 울렸다. 촬영된 영상을 보면서 할머니도 과거를 회상하셨다.
“넌 아주 어렸을 때도 춤추고 노래하는 걸 참 좋아했어. 이제 어엿한 성인인데 내 눈에는 아직도 다섯 살도 안 된 꼬마애 같아.”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는 언제나 어린애니까요.”
“그때도 알 수 있었어. 너는 앞으로도 음악과 함께하는 삶을 살겠구나-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네 음악을 전하는 가수가 됐다는 게 너무 자랑스러워.”
울컥하는 마음을 추스르고 두 분을 품에 안았다. 거실에는 아직 내 어린 시절 비디오가 재생되고 있었다. 낡은 화면 속 작은 몸을 열심히 움직이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옹알이와 같은 노랫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작별 인사를 하고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에 계속해서 영상을 돌려 봤다. 회귀 전에는 운명이 없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아주 오래전부터 이 길은 내 운명이었다는 확신이 생겼다.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아이가 본능적으로 찾은 것이 음악이었으니까.
조부모님과의 영상이 공식 계정에 업로드되고, 반응은 이전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아이돌 그룹이기 때문에 젊은 층을 공략할 것이라는 대중의 예상과는 달리 전 세대가 즐길 수 있는 노래라는 점이 강조될 수 있었다.
점점 입소문을 타면서 미국 현지 차트 상위권에 랭크되는 등 유의미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회사 내부에서도 두 번의 성공적인 성과에 2년 이상의 계약을 체결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5개월 남짓 남았다. 다음 활동에는 더 좋은 결과를 내서 기필코 장기 계약이 이뤄지게 할 것이다.
* * *
두 번째 미국 활동이 끝나자마자 3주년 팬 미팅 준비에 들어갔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크리드의 마지막 기념일이기도 하다. 내년은 회귀 전 시점을 넘어서고, 혹시나 미션을 실패할 경우 조기 계약 종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후회가 남지 않게 최고의 순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승빈이가 특히 적극적이네?”
“3주년이니까…….”
“앞으로 4주년, 5주년도 함께 할 건데-”
“그다음도 챙겨야죠.”
잠시 정적이 오갔다. 하지만 곧 지운이 형이 덧붙였다.
“맞아. 그리고 데뷔일은 매번 최고의 날로 보내야지. 안 그래?”
멤버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지운이 형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어 보였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이번 팬 미팅의 전체적인 콘셉은 ‘크리드의 선물 상자’이다. 말 그대로 팬들에게 종합 선물 같은 시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개인 무대에 각자 자작곡을 준비하기로 했다. 윤빈 형이 멤버들을 위해 준비한 트랙에 각자 작사에 참여했다. 나는 미리 공개했던 ‘별자리’ 무대를 준비하기로 했다.
멤버들의 트랙을 하나하나 들으면서, 윤빈 형이 얼마나 멤버들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지 실감했다. 각 멤버의 음색과 이미지에 딱 맞는 곡들이었다. 크리드로 활동하면서 모두 한 번씩은 작사에 참여해서 그런지, 멤버들의 작사 실력도 성장했다. 지운이 형의 피드백을 받으면서 하나둘 완성되는 과정을 보는 것도 즐거웠다.
팬 미팅 회의를 위해 오해나 디렉터와 만났다. 올해는 컴백 일정이 특히나 많아서 오해나 디렉터를 만나는 날이 잦아졌다.
“벌써 3주년이나 됐네?”
“네. 시간 정말 빠르죠?”
“그러게. 첫 번째 팬 미팅 준비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건 그렇고, 이번 팬 미팅 콘셉이 선물 상자라고 했나?”
“네.”
“전체적인 무대 세트는 선물 상자로 하고, 등장을 상자 안에서 해야겠네. 너희가 선물 그 자체가 돼야 하니까, 리본 묶고 나와도 귀엽겠다.”
이후 무대 기획과, VCR 촬영 콘셉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선물을 배달하는 선물 요정이 되어서 전 세계 클로버의 집에 선물 상자와 초대장을 두고 오는 스토리로 정했다.
“그럼, 아예 티켓 디자인을 초대장 형식으로 할까요?”
“그거 재밌겠는데?”
초대장에는 멤버들의 손 글씨를 넣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디자인은 유현이 형에게 맡길 예정이다. 바빠서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만.
“티켓 디자인? 내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아무래도 너무 바쁘겠죠……?”
“그거랑은 상관없지!”
“네?”
“안 할 이유가 없잖아?”
예상외로 긍정적이다 못해 적극적이기까지 한 유현이 형이다. 정말 본인의 디자인 실력으로 괜찮냐는 의미 말고는 다른 뜻이 없었다.
“클로버들도 형 디자인 엄청 좋아하잖아요.”
“너무 장난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형, 디자인에 자신감을 가져요!”
잠시 고민하던 유현이 형은 내 말에 자신감이 생겼는지, 일주일도 안 돼서 다양한 시안을 가져왔다.
“정말 난해한데…….”
“갈수록 실력이…….”
“성장했어.”
오해나 디렉터는 신기하다는 듯 시안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분명 그림판으로 그린 조악함인데 어딘가 세련됐다. 요즘 유행하는 키치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 형의 유일한 단점이라고 생각했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유현이 형은 티는 내지 않아도 은근히 신경 쓰였는지, 나를 볼 때마다 어떤 시안이 결정됐는지 은근슬쩍 물어보곤 했다. 그때마다 팬 미팅 당일 확인하라는 답으로 일관했다.
* * *
“형, 이거 봐 봐요. 티켓 반응 엄청 좋은데요?”
“그래?”
[티켓 유현이 디자인인가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근데 진짜 디자인 실력 좋아지지 않음?
-ㅇㅇ유현이 첫 디자인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임
-솔직히 요즘 스타일 아님?
-우리 유현이 유일하게 못하던 것도 사라져가는구나…
└그 정도까지는;;
[초대장 디자인 티켓은 처음 보넼ㅋㅋ]
옆동네에서 왔는데 부럽다;; 우린 맨날 구린 디자인 종이티켓인데ㅠㅠㅠㅠ 카드 티켓이어서 더 부러우뮤ㅠㅠㅠ
-우리도 원래 종이티켓이었는데 불편하다는 말 나오고 나서 소속사에서 피드백한거임ㅋㅋㅋ
└대박 ㅈㄴ부러워
-무려 멤버가 디자인한거임ㅎㅎ그래서 더 좋아
댓글로 팬들의 반응을 천천히 읽어 보던 유현이 형도 기쁨을 숨길 수 없어 보였다. 뒤에서 보니 광대가 자꾸만 움찔거리고 있었거든. 하여간 귀여운 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