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사운드 클라우드에 자작곡을 올리고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혹시라도 미션에 실패해서 조기 계약 종료가 되는, 혹은 4년이 되는 날을 끝으로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후회 없이 내가 전하고 싶은 말들을 다 전했으니까.
“이번 노래는 언제 준비했냐? 솔직히 말해 봐. 너, 몸이 한 10개쯤 되지?”
강도현의 장난스럽지만, 눈빛은 진지한 질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시간이 꽤 걸렸어. 처음 가사 쓰고 거의 1년 지나서 나온 거야.”
“1년이나?”
“응. 중간중간 활동도 하고 욕심나서 수정도 많이 했고.”
다행히 팬들의 반응도 좋았다. 놀랐던 것은 왜 이런 가사를 쓴 거냐며 걱정하는 팬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최대한 담담하게 작사하려고 했는데, 내 속마음이 전부 들킨 기분이었다. 부끄러웠지만, 기분 좋은 부끄러움이었다.
팬들이 남긴 메시지와 댓글을 보면서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었다. 팬들의 숙면을 바라고 한 이벤트인데, 도리어 내가 더 큰 선물을 받았다.
* * *
활동 3주 차에 접어들면서 마지막 음악 방송 녹화 날이 되었다.
“오늘 스페셜 MC가 오재성이라고 했지?”
“응.”
포커스 여름 활동이 무산되면서 음악 방송에서 마주칠 일이 없겠다고 안심했는데, 스페셜 MC라는 변수가 발생할 줄이야. 1위 후보 인터뷰와 엔딩 때도 마주칠 게 뻔했다.
“최대한 안 부딪쳐야지.”
“시비 걸어도 상대하지 마.”
“당연하죠. 걱정 마요.”
유현이 형은 오디션 날을 의식한 듯했다. 나 역시 굳이 오재성과 마주쳐서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오늘도 여러분에게 행복을 주는 인기 뮤직! 이번 주는 포커스의 재성 씨가 특별 MC로 함께합니다!”
“반가워요, 인기 뮤직 식구분들! 오재성입니다-”
비록 스페셜 MC지만, 가장 인기 있는 연예인들이 한다는 음악 방송 MC에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오재성의 업계 인지도가 높아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주 1위 후보, 크리드와 오로라입니다!”
“안녕하세요. 크리드분들, 1위 후보 소감이 궁금합니다.”
1위 인터뷰를 하는 오재성의 눈빛이 찰나지만 차가웠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옅게 웃으며 답했다.
“3주 연속 1위 후보에 올라서 정말 영광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클로버분들에게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어요! 만약 저희가 오늘 1위를 한다면, 각자 닮은 동물 모자를 쓰고 앵콜 무대를 하겠습니다!”
“와아- 정말 기대가 됩니다!”
1위 인터뷰를 마치고 먼저 인사를 건넸지만, 오재성은 가볍게 목례만 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나를 보고 흠칫 놀란 것이다. 나를 무시하거나 싫어하는 반응이라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놀라는 반응은 의아했다.
“이번 주 대망의 1위는… 축하합니다, 크리드!”
다행히 이번 활동을 1위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팬들의 함성 속에서 수상 소감을 전했다.
“3주 동안 1위를 할 수 있었던 건 모두 팬 여러분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1위 공약은 인터뷰에서 말한 대로 각자 대표하는 동물 모자를 썼다. 여우인 지운이 형의 모자에는 기다란 꼬리도 달려 있었다. 나는 코디 누나가 챙겨 준 강아지 발 장갑을 끼고 나왔다.
“X친!”
“승빈이 장갑 낀 거야?”
팬들이 좋아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우리의 예상보다 더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나는 이왕 장갑까지 꼈으니 제대로 해 보자는 생각에 손바닥을 접었다 폈다를 두어 번 반복했다. 옆에서 보던 선우 형도 고양이 앞발 장갑으로 그루밍하는 듯한 손동작을 했다.
“강냥즈 너무 귀여워…….”
“아, 귀여워… 왜 저렇게 귀엽지……?”
무대와 팬들이 있는 곳이 가까워서 웬만한 팬들의 말이 다 들렸다. 사방에서 귀엽다는 말이 쏟아지자 조금 민망했지만, 점점 자신감이 붙었다. 처음에는 민망해하던 선우 형과 강도현도 곧 뻔뻔하게 잔망을 부렸다.
“못 하겠다고 엄청 찡찡대더니…….”
“클로버! 제가 재미있는 거 보여 줄게요!”
강도현이 자신만만하게 외치더니, 솜사탕을 물에 씻는 너구리 흉내를 냈다. 허망한 표정을 따라 하는데, 왜 강도현이 너구리를 닮았다고 하는지 3년 만에 이해할 수 있었다.
“네가 왜 너구리인지 알겠어.”
“나도 내가 왜 너구리……? 했는데 이젠 그냥 내가 너구리고 너구리가 나인 거 같음.”
팬들의 너구리라이팅에 완벽히 적응한 강도현이다.
“지금까지 본 투 샤인! 크리드였습니다! 1위 고마워요!”
“잘 들어가요-”
“클로버 짱!”
데뷔하고 셀 수 없이 받은 1위지만 받을 때마다 기분 좋은 떨림을 느낀다. 티벡스 시절에는 한 번만 손에 쥐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대기실로 돌아와 스태프들의 축하를 받던 중, 누군가 대기실 문을 노크했다. 나가 보니 오재성이 서 있었다. 기분 나쁜 두통이 서서히 느껴지고 있었다.
“…뭐야?”
“선배님하고 대화 좀 하고 싶어서요.”
“승빈아, 무슨 일… 오재성?”
“안녕하세요, 정유현 선배님.”
유현이 형은 반사적으로 나를 뒤로 밀었다.
“얘 혼자는 못 보내겠는데?”
“…….”
“저 괜찮아요. 잠깐 갔다 올게요.”
“지난번 일 사과드리려고 온 거예요.”
“그럼 나랑 애들 보는 앞에서 하면 되겠네.”
냉랭한 유현이 형의 목소리에 대기실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정확한 내막을 알 리 없는 멤버들과 스태프들은 조용히 서로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당연히 무시할 줄 알았는데, 순순히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는 오재성이었다.
“그때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허!”
“이제 승빈 선배랑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뻔뻔한 오재성의 행동에 유현이 형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얘 또 이상한 짓 하려고 하면 바로 연락해.”
“알았어요.”
자존심과 고집 하나는 누구에게 지지 않는 놈이 이렇게 순순히 사과하고 비위를 맞춘 것이 의심스러웠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까지 숙이고 들어오는 거지?
“용건만 말해.”
“…없애?”
“뭐라고?”
“이 빌어먹을 상태창, 어떻게 없애냐고!”
안절부절못하며 손톱을 물어뜯던 오재성이 따지듯 물었다. 자세히 보니 눈에도 실핏줄이 군데군데 터져 있었다. 그런데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이가 없었다. 상태창을 어떻게 없애냐고?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쓸모없는 상태창 어떻게 없애냐고!”
“내 성공이 상태창 덕분이라고 하던 게 누구더라?”
오재성은 머리를 부여잡고 신경질적으로 헤집었다.
“X같은 미션을 시도 때도 없이 던지는데, 실패하면 자꾸 멤버들한테 일이 생겨! 처음에는 쉬운 미션들이고, 능력을 올리는 스탯창도 보여서 능력을 빠르게 올릴 수 있었는데 이제는 아니야……. 지난 활동 1위 미션을 실패하니까 열애설이 터지고, 이번 미션을 실패하니까 갑질 논란이 터졌어. 다음 미션은 뭐였는지 알아? 다가오는 여름 활동 1위 하기였어. 그런데, 갑질 논란 때문에 무산돼 버려서 꼼짝없이 또 벌칙을 받게 생겼다고!”
“그럼 내가 지금까지 쉬운 방법으로만 올라왔다고 생각했냐?”
기가 차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나 역시 실패 시 멤버들에게 대미지가 가는 미션을 수없이 경험했다. 하지만, 이런 미션은 내가 더 적극적으로 미션 성공을 위해 움직이도록 했다. 나 혼자 실패하고, 피해를 받았다면 이렇게까지 열심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미션 성공 여부에 따라 애들의 미래가 나쁜 쪽으로 흐를 수 있다는 생각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겠어? 잃고 싶지 않으면 네가 더 강해져야지. 안 그래?”
“헛소리하지 마! 넌 알고 있지? 난 지난 2번의 회귀에서 단 한 번도 상태창을 본 적이 없어. 너는 이제 처음인데 상태창이 계속 보였던 거잖아. 솔직히 말해, 나한테 상태창이 보이게 한 것도 다 네 계략이었던 거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일부러 상태창의 X같은 부분만 나한테 떠넘긴 거잖아?”
“…말할 가치도 없는 거 같다. 할 말 다 했으면 간다.”
뒤돌아 빠져나가려는 내 손목을 낚아채더니 퍽 소리가 나도록 벽으로 밀쳤다.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반사적으로 억 소리가 났다. 조금만 방심했다면 머리를 크게 부딪쳤을 것이다.
“뭐 하는 짓이야!”
“해결된 게 단 하나도 없는데 어딜 도망가려고?”
오재성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두통도 점점 강해졌다. 하지만,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녀석도 두통을 호소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회귀자와 상태창의 충돌이었다면 이번에는 상태창끼리의 충돌이어서 오재성에게도 고통이 전염된 것이겠지.
“점점 실패에 대한 벌이 강해지고 있는데, 다음 타깃은 누가 되겠냐고! 세 명이나 일이 터지면 포커스는 답이 없어진다고!”
“이미 답 없는 그룹에… 윽!”
결국 참지 못한 오재성이 주먹을 날렸다. 입 안이 터지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상도덕도 없는 X끼, 다른 곳도 아니고 아이돌 얼굴을 건드려? 주머니에서는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지만, 충격과 함께 바닥으로 내팽겨졌다.
어차피 배우가 되는 게 목적인 오재성이 포커스에 이토록 집착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대기업에 소속되기 위한 안전장치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닐까?
“승빈아!”
아, 전화를 한 사람이 유현이 형이었구나. 옆에는 윤빈 형도 있네.
‘저 형은 왜 데리고 온 거지?’
윤빈 형은 말싸움이나 기 싸움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어서 의외였다. 항상 피지컬로 압도하는 사람이었지. 그런데 벽에 몰린 내 앞의 오재성을 한 손으로 제압해서 밀어내는 걸 보고, 왜 윤빈 형을 데려왔는지 한 번에 이해했다. 방금 전 떨어진 핸드폰 진동이 형의 연락이었구나.
“내가 이래서 혼자 안 보내겠다고 한 건데!”
“야, 야. 오재성!”
윤빈 형이 걱정 어린 눈으로 혹시 다친 곳이 없나 꼼꼼히 살피던 중, 오재성은 현장에서 도주했다. 부리나케 달려가는 뒷모습을 유현이 형과 윤빈 형이 노려봤다. 나 역시 있는 힘껏 째려봤다.
“타이밍 대박. 어떻게 지금 바로 왔어요?”
“맞은 곳은 없지?”
“너 볼이 왜 빨개? 설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부은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오재성을 팰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일단 유현이 형과 윤빈 형을 진정시켰다. 윤빈 형이 저렇게 화내는 것은 처음 봤다. 감정 표현에 풍부한 형이지만 분노나, 짜증 같은 네거티브한 감정은 잘 드러내지 않는 형이었으니까.
형들의 부축을 받고 조용히 바로 차로 이동했다. 아직 터진 입에서 피 맛이 났다. 하지만 피 맛이 비리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오재성의 상태창에 대한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나 역시 상태창이 제멋대로 미션을 주고, 폭주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동시다발적으로 타인에게 해를 주는 미션을 준 적은 없었는데.
이게 오재성에게 더 좋은 일이 생기기 위한 액땜인지, 아니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탐낸 자에 대한 형벌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