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미국 데뷔곡 ‘CR:ID’ 발매에 앞서서, 현지화 전략으로 토스맨의 지원을 받았다. 1년 전 토스맨 챌린지가 인기를 얻으면서 토스맨과도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은 덕이었다. 노래에 토스맨이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토스맨 챌린지를 통해 홍보하는 것을 제안했다.
토스맨도 지난번 챌린지로 인지도가 더 높아졌고, 채널 규모도 커졌기 때문에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곧바로 수락했다.
[어떤 챌린지를 구상 중인데?]
“토스맨의 토스 챌린지와 함께, 크리드 챌린지를 합칠 생각이야. 현재 모습의 내가 마이크를 넘기면서 화면이 전환되면 리즈 시절의 내가 나타나서 노래를 이어 가는 거지.”
[오, 완전 쿨한데? 미국은 언제 올 거야?]
“다음 주에 한번 들를 생각이야.”
[그래! 오면 꼭 연락해.]
오랜만에 만난 토스맨은 여전히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대표로 함께 간 선우 형과 콜라보 영상을 찍는데 누구 하나 텐션으로는 지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내 기만 빨리는 기분이었다.
선우 형 역시 멤버들로는 충족하지 못했던 에너지를 토스맨이 채워 줬는지, 영상을 찍는 내내 만족도 200%로 보였다.
“야, 역시 텐션이 맞는 사람들끼리 해야 한다니까? 지치지 않잖아?”
“이 친구, 너무 재밌는데? 전에 그 영어 조금 못하지만 자신감은 엄청 났던 애 맞지?”
“이제 영어 꽤 잘해. 말 잘하는 게 좋을걸?”
성격이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자칫 가벼워 보이는 언행 때문에 미리 부드럽게 주의를 줬다.
“승빈아, 얘 지금 뭐라고 하는 거냐?”
전부 다 번역하면 선우 형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줄 것 같아서 적당히 통역해 줬다.
“형 자신감이 엄청나다는데요?”
“당연한 얘기를 하고 있네! 토스맨, 우리 이제부터 베스트 프렌즈. 오케이?”
“완전 좋지!”
“얘 지금 좋다고 한 거지?”
“네네.”
헤어질 때쯤 돼서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서로 애칭도 만들었다. 토스랑 핑퐁이란다. 왜 핑퐁이냐고 하자,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게 핑퐁 게임 같아서란다.
“공이 게임판에서 이리저리 토스하는 거니까… 둘이 애초에 잘 맞을 운명이었네.”
“대박!”
“뭐야, 그런 말은 어떻게 알아?”
“이 정도는 영어 아니야? 한국인이랑 게임 몇 번 해 봐. 이런 단어는 그냥 영어 같다니까?”
미국에 온 김에 토스맨 채널 라이브에도 참여했다. 당일 정해진 라이브 방송이어서 거의 기습 라이브였다. 전 세계의 팬들이 라이브 방송에 참여했고, 새 앨범에 대한 홍보 효과를 톡톡히 볼 수 있었다.
“핑퐁, 또 놀러 와!”
“너도 한국 좀 놀러 와.”
“그럴게!”
헤어질 때는 서로 우는 시늉까지 하며 아쉬워하는데, 아주 그냥 환상의 쿵짝이었다.
영상은 음원 공개와 함께 토스맨 채널과 크리드 채널에 동시에 공개됐다. 1년이 지났지만, 여러 가지 밈으로 활용될 만큼 파급력을 가진 사건이어서 대중들의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그리고 토스맨이 홍보에 참여하면서 다른 셀럽들의 샤라웃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엄청난 성과였다.
자연스럽게 일반인들에 대한 참여도도 올라갔다. 각자의 리즈 시절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 게 예상보다 더 큰 파급력을 만들어 냈다. 흐름에 맞춰서 해시태그를 활용한 이벤트 프로모션도 시작했다.
* * *
미국 앨범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 2월이 됐다. 오랜만에 김 감독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어쩌면 그날’ 오디션 이후 처음이었다. 유현이 형을 응원하러 갔던 날에도 김 감독과는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일부러 피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확실히 나와 마주하는 것이 불편했으리라 생각했다.
“김 감독님,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오랜만이에요, 승빈 씨.]
“어쩌면 그날 촬영도 막바지라고 들었어요.”
[네. 다음 주면 마지막 촬영입니다.]
겨우 이런 안부 인사를 하려고 전화를 한 건 아닐 테고, 김 감독이 무언가 빙빙 돌려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무슨 일로 먼저 전화를 다 주셨어요-”
[오디션에서 현장에서 할 촬영도 고려해서 연기했다고 했었죠?]
“아… 네.”
오디션에서의 일을 꺼내는 김 감독의 저의를 알 수 없었다. 그때 일을 사과하려는 것도 아닐 테고.
[엊그제 그 신을 촬영했어요.]
“네.”
[그런데, 승빈 씨 말이 맞더라고요.]
“그게 무슨…….”
[승빈씨 말처럼 빛의 방향이 주는 차이가 엄청 컸어요. 나는 단순히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장면이었기 때문에 몰랐던 부분이었어요.]
김 감독의 말을 듣자마자 알 수 없는 감정에 혼란스러웠다. 내 연기가 틀리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좀 더 일찍 알아챘다면 지석 역할은 나에게 돌아왔을까 하는 아쉬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뒤늦게나마 나에 대한 오해가 풀린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런 우연이 다 있네요.”
[우연이 아니라 승빈 씨의 관찰력과 작품에 대한 열정이었던 거죠.]
“…감사합니다.”
[이제 와서 이렇게 전화로 말하는 게 경우가 아닌 거 잘 알지만, 다음 작품은 꼭 승빈 씨와 하고 싶어요.]
김 감독의 제안에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김 감독이 얼마나 본인 작품에 대한 프라이드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인지 알기 때문이다.
[사실 유현 씨와 현장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공유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대부분이 승빈 씨와 얘기를 나눈 아이디어라고 들었습니다. 늦었지만, 인정해요. 승빈 씨를 캐스팅하지 않은 건 제 잘못이었어요. 정말 미안해요.]
“아닙니다. 강대섭 선배님은 저보다 좋은 연기자시고, 오디션 날은 저 스스로도 만족스럽지 않은 연기였습니다. 제가 캐스팅되지 않은 건 저도 납득할 수 있는 결과였어요.”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승빈 씨가 현장에 있었다면 더 다채로운 영화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문득 김 감독의 다음 필모를 떠올렸다. 그리고 순간 등줄기부터 소름이 돋았다. 이 세계는 소름 끼치도록 등가 교환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반드시 희생이 필요하고, 잃은 것이 있다면 또 다른 것을 얻게 된다.
김 감독의 다음 작품은 ‘드리밍’이다. ‘어쩌면 그날’과는 정반대의 분위기로, 스포츠 성장물이었다. 당시 ‘어쩌면 그날’로 주목받는 신인 감독으로 급부상한 그가 밝은 분위기의 스포츠물을 후속작으로 가져온다고 하자 모두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그가 대학 시절 보여 줬던 작품과도 결이 다른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날’이 흥행에 성공한 후 김 감독은 나에게 ‘드리밍’ 작업을 제안했었다. 하지만 2번 연속 주인공이 같은 배우라면 대중들은 새로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며 아쉽지만 제안을 고사했다. 김 감독은 아쉬워하면서도 내 의견에 동의했다.
김 감독의 ‘드리밍’은 모두의 걱정과 흥행에 대한 의심 속에서도 중박은 쳤다. 배우의 연기가 아쉽다는 평은 있었지만, 스토리와 연출이 다 한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에는 연기도 완벽한 영화로 남게 해야지.’
“다음 작품에 함께하자고 먼저 제안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작품이 있는데, 나중에 한번 얼굴 보고 얘기할까요?]
“네. 그런데 저희가 지금…….”
[알아요. 미국 활동 중이죠? 당연히 그 활동 끝나고 나서의 일을 말한 거예요. 아직 수정해야 할 점들도 있고. 소속사에는 미리 얘기했어요, 다음 작품에 꼭 승빈 씨 캐스팅하고 싶다고.]
“감사합니다.”
[오늘도 원래는 직접 찾아가서 말해야 맞는 건데, 크리드가 워낙 잘나가다 보니까-]
역시 추진력 하나는 엄청난 사람이다. 이번 생은 김 감독과 작업할 기회가 더 이상 없을 줄 알았는데, 내 뜻대로 되는 게 없는 거 같다가도 잃은 것에 대한 보상은 확실한 세계였다.
[지금 작업한 대본까지 소속사로 보냈어요. 나중에 꼭 읽어 봐요.]
“당연하죠. 오늘 바로 확인할게요.”
[염치없지만, 이 작품 할 때는 정말 잘해 줄게요.]
“저 그럼 감독님만 믿고 앞으로 들어오는 작품들 다 거절합니다?”
[당연하죠.]
수화기 너머로 너털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마음의 짐이 줄었는지, 한결 편해진 대화가 이어졌다. 안 그래 보여도 마음이 여린 사람이다. 오디션 일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두는 걸 보면.
[영화 개봉하고 혹시 괜찮으면 보러 와 줘요.]
“당연하죠! 감독님 작품이고 저희 형 연기 데뷔작인데 보러 가야죠.”
[고마워요.]
기분 좋은 예고편을 미리 본 기분이다. 무언가 새롭게 시작하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떨림을 준다. 하지만, 들떴던 기분도 잠시였다. 문득 망설여졌다. 이 기회를 잡아도 되는 걸까? 정식 그룹으로 만들겠다는 프로젝트를 설계하고 있는 내가?
순식간에 머리에 피가 식는 기분이 들었다. 실패하게 되면 조기 계약 종료라는데. 내가 이 기회를 잡을 자격이 있을까?
복잡한 머리가 정리되지 않은 채로 연습실에 돌아왔다. 멤버들 모두 안무 연습으로 파김치가 된 상태였다. 그나마 체력이 남은 강도현만 혼자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대표님?”
“아니, 김 감독님.”
“엥, 그 감독님이 왜? 너 떨어트린 사람 아니야?”
“그냥 오랜만에 안부 전화 하신 거야.”
“거짓말. 같이 작품 하자고 하셨지?”
‘이럴 때만 눈치가 빠르다니까?’
“그렇긴 한데…….”
“해야겠네!”
너무나도 단호한 강도현의 반응에 오히려 내가 주춤했다.
“하지만, 우리 이제 활동도 시작하고…….”
“언제는 같이 못 했었나? 할 수 있을 때 다 해 봐야지-”
‘나도 단순하게 생각하고 싶다.’
이후에는 무슨 정신으로 연습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반쯤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상태여서 정말 오랜만에 안무 선생님에게 지적도 받았다. 연습으로는 속을 썩이는 멤버가 아니었는데, 반복되는 실수와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에 평소보다 일찍 안무 연습이 끝났다.
“승빈이가 정신 못 차리는 거 보면 너희 엄청 바쁘긴 한가 보다. 오늘은 여기까지!”
“헐, 승빈이 힘들 때만 일찍 끝내 주시는 거예요?”
“도현이는 연습 더 할까?”
“아, 아뇨! 당연히 쉬어야죠!”
연습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런데 갑자기 선우 형이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양옆의 멤버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비몽사몽 하던 멤버들도 처음에는 왜 단잠을 깨우냐며 짜증을 내다가 선우 형과 마찬가지로 탄성을 내질렀다.
“X친, 이게 뭐야?”
“이거 진짜지? 뭐, 합성 이런 거 아니고?”
“이게 합성이면 미친 거지!”
“무슨 일이야, 애들아?”
“형, 형. 이거 봐요!”
맨 뒤에 있던 나와 지운이 형만 영문을 알 수 없어 답답했다. 매니저 형은 얼마나 큰일이길래 그러냐며 핸드폰을 보더니 차를 멈춰 세웠다.
“이 배우 완전 유명하잖아!”
“미국 국민 배우일걸?”
“젊었을 때 진짜 잘생겼었네…….”
“아니, 이런 사람이 우리 챌린지를 어떻게 알았지?”
“우리도 좀 알려 줘, 선우 형-”
힘겹게 틈에 들어가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알렉스?”
화면 속 영상을 확인하자마자 순식간에 머릿속이 상쾌하게 정리되는 기분을 느꼈다. 어쩌면, 생각보다 더 빨리 미국 에이전시와의 정식 계약을 체결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