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강도현은 포커스 활동에도 빠르게 적응했다. 오재성과 김병대가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거나, 비아냥댈 때도 있다고 했지만, 고작 그런 걸로 기가 죽을 놈이 아니었다.
하지만 팬덤 사이는 여전히 냉전이었다. 겸업만을 기다렸다는 듯 합류를 시킨 소속사에 대한 비난과 강도현이 어느 그룹을 더 언급했는지, 더 친해 보이는지 자신들의 입맛대로 재단하는 이들도 넘쳐났다.
[도현이만 보고 간다ㅇㅇ]
-그래도 포커싱으로 불리는건 싫음
└우리도 느그로버로 불리기 싫음
-ㅇㅇ 내 새끼만 보고 갈거임
-크리드 타멤프인데 강프들도 고생많다ㅠㅠ
-도현이도 노력하는데 팬들도 노력해야지ㅠ...
-언급 횟수 세면서 애 억까하는 거 진짜 정병이다
이런 반응을 모를 리가 없다. 겸업 시작 전에는 대중 반응에 유독 신경을 쓰던 녀석이어서 걱정했지만, 강도현도 나름대로 두 입장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었다.
“멤버들이 잘해 주냐?”
“초반에는 텃세 부리는 애들도 있었지.”
“김병대?”
“소름, 너 포커스로 활동하냐?”
“근데 김병대는 너랑 같이 연습생 생활도 꽤 했는데 텃세를 부려?”
“말도 마. 투마월에서 떨어진 걸 아직도 마음에 담고 있다니까?”
“하긴 8위로 떨어졌으니 뒤끝이 남을 수밖에-”
강도현은 코웃음을 치며 활동 동안 있었던 일들을 천천히 얘기해 줬다. 듣다 보니 분명 자존심 상하고, 속상할 법한 일이나 대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기는 걸 보니 강도현도 많이 어른스러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진짜 걔들보다 부족하거나 뒤처진다고 느꼈으면 자존심 상했겠지만, 전혀 아니라서…….”
기지개를 켜며 심드렁하게 말하는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왜 웃냐며 미간을 찌푸리는 강도현에게 별일 아니라고 둘러댔지만, 저 근거 있는 자신감이 자랑스러웠다.
“너 잘나서 웃었어.”
“뭐라고?”
“너 기 안 죽고 잘난 거 자랑스러워서 웃었다고.”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못 믿겠으면, 믿지 말든가-”
강도현이 민망함을 숨기지 못하고 헤드록을 걸어왔다. 자기 잘난 걸 너무 잘 아는 놈 같다가도 칭찬에는 면역이 없는 게 여전했다.
“몰라. 빨리 미국 데뷔해서 크리드 활동하고 싶어.”
“활동하다가 힘든 일 있으면 꼭 말하고.”
“당연하지. 네가 먼저 말했다?”
“아, 말실수한 거 같은데?”
이번 미국 활동은 크리드가 정식 그룹이 되는 데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 역할을 할 것이다. 이런 강도현의 진심을 듣고 나니 더 완벽하게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 * *
“유현이 형 엄청 놀라겠죠?”
“그랬으면 좋겠다.”
유현이 형의 영화 촬영 응원차 멤버들과 함께 밥차와 커피차를 준비했다. 물론 형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미리 말하면 죽어도 하지 말라고 할 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프라이즈로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하고.
메뉴와 메뉴명, 현수막과 스티커 멘트도 멤버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했다. 만약 유현이 형의 응원차가 아니었다면 형이 디자인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럼 분명 더 유쾌한 서포트가 되었을 것이다. 언제 봐도 놀라운 미적 감각이었으니까.
[어쩌면 그날 배우, 제작진분들! 유현이 형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성훈이가 쏩니다!]
“‘연기 새싹 유현이의 연기 데뷔를 응원해 주세요!’는 어때요?”
“음~ 별로.”
특이한 작명 센스처럼 문구 센스도 상상 이상인 박재봉이다. 입술을 삐죽이던 박재봉도 연기 새싹이라고 하면 유현이 형 자존심이 상할 거라며 단념했다. 하지만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그게 문제가 아닐 텐데-’
유현이 형은 팬들이 보낸 커피차와 밥차로 알고 있었는지, 현장에서 서프라이즈로 등장한 우리를 보고 입까지 틀어막으며 놀랐다.
“너희, 뭐야?”
“형 응원하려고 왔죠!”
유현이 형은 잠시 당황한 얼굴이었지만,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현장에서 다른 배우들과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강대섭 배우와 함께 걸어오는 걸 보니 그사이 꽤 가까워진 듯했다. 가볍게 장난도 치는 모습을 보면서 유현이 형도 참 많이 변했구나 실감했다.
“승빈 씨, 오랜만이네요?”
“안녕하세요, 선배님!”
“같이 작품 하면 좋았을 텐데-”
“다음에 좋은 기회가 생기면, 저도 그때 꼭 같이 작품하고 싶어요.
“선배님하고도 아는 사이야?”
유현이 형은 나와 강대섭이 구면인 것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응. 최 피디님한테 승빈 씨에 대해 많이 들었거든. 그러다가 오디션 날 우연히 만나서 내가 먼저 말 걸었지.”
“저 그때 엄청 놀랐잖아요.”
“난 승빈 씨가 내 필모를 다 알고 있어서 더 놀랐는데- 그리고 말 편하게 해요. 유현이 동생이고, 나도 전부터 친해지고 싶었거든.”
유현이 형이 낯을 가린다고 했을 때 생겼던 의문이 풀렸다. 그날 엄청 용기를 낸 거였구나.
“그럼, 형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당연하지!”
서글서글한 미소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비록 이번 세계에서는 내가 아닌 지석이지만, 새로운 주인을 잘 찾아갔다는 확신이 들었다. 부디 이번에는 그가 반짝 뜨고 사라지는 인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배우가 될 수 있길 소망한다.
마침 나를 알아본 정 감독이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승빈아!”
“감독님, 안녕하세요?”
“잘 지냈지?”
“네. 유현이 형 잘 챙겨 주셔서 감사해요.”
“누구 부탁인데-”
현장에 오기 전까지는 혹시 감독님과 마주쳤을 때 어색하면 어떡하지- 걱정했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감독님이 먼저 어색함 없이 말을 붙여서 나도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현 씨가 워낙 똑똑하게 연기를 해서.”
“제가 말했잖아요, 잘할 거라고.”
“네가 많이 도와준다며?”
“형이 그런 얘기도 했어요?”
“연기를 따로 배웠냐고 물었는데, 소속사에서 연기 수업도 받지만 너한테 더 많이 배운다고 하던데?”
제3자에게 듣는 칭찬은 언제나 쑥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좋다. 게다가 나한테 더 많이 배운다니, 유현이 형에게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오디션 때 일은…….”
“저 정말 괜찮아요. 오늘은 유현이 형 응원하고, 감독님한테도 안부 인사 전하려고 온 거예요.”
“…그래. 오늘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다. 커피랑 잘 먹을게.”
“네. 저희 형 잘 부탁드리고요!”
“어휴, 네가 그렇게 말 안 해도 알아서 잘하는 애더라!”
“저보다는 아닐 거니까-”
“아주 그냥 한마디도 안 져요! 이제 들어가 봐. 곧 촬영 시작하니까.”
“네!”
짧은 대화를 마치고 멤버들에게 돌아왔는데, 모두 신기한 걸 본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뭐야? 정 감독님이랑 이 정도로 친했어?”
“나, 네가 감독님한테 장난칠 때 내가 더 긴장했었잖아-”
“감독님이 잘 받아 주셔서 그런 거지.”
“너한테만 해당하는 거 같은데?”
반박할 수 없었다. 실제로 정 감독과 스스럼없이 지낸 아이돌은 회귀 전에도 내가 유일무이했으니까. 곧 촬영이 시작되고 짧게나마 유현이 형이 연기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강대섭 배우와의 호흡도 좋았고, 내가 해 줬던 조언이나 피드백도 잊지 않고 연기에 녹여 냈다. 이렇게 열정적이고, 치열한 사람들 틈에서 연기할 수 있다는 게 내심 질투 나기도 했다.
“이제 가 볼까?”
“그래.”
아쉽지만 각자의 자리가 있었다. 약간의 미련을 남겨 두고 다시 내가 집중해야 할 곳으로 향했다.
* * *
평소와 같이 퇴근하고 밀린 덕질을 하려던 K는 어떤 영상을 보고 바로 문스트럭에게 연락했다. 메시지를 보내면서도 제 눈을 의심하던 그녀였다.
[K: 야 이거 A가 알면 ㅈ되는거 아니냐?]
[A 안 그래도 요즘 야근 많아가지고 활화산 상태던데;;]
[K: VM 놈들은 이런걸 자컨에 그대로 올리고 무슨 정신머리지;;]
[(링크) 이거 맞지?]
K와 문스트럭은 이 영상이 절대 A의 눈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랐다. 분명 노발대발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영상은 삽시간에 퍼졌고 A의 눈을 속일 수 없었다.
[A: ㅅㅂ… 도현이 이런 취급 받으면서 포커스 한 거냐?]
사건의 전말은 포커스의 콘텐츠로부터 시작된다. ‘포커스타임’으로, 활동기 대기실과 일상을 담은 자체 콘텐츠였다. 그런데, 이 영상에서 포커스 멤버들이 누군가를 저격하는 발언을 한 것이 담겼다.
[이런 건 늦게 들어온 애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놔둬, 아직도 자기가 어디 그룹인지 모르나 보지.]
다른 멤버들의 인터뷰에 가려져 크진 않지만, 선명하게 들렸다. 도현이 들어오자 잠시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 모르쇠로 일관하는 장면과 함께 나와서 더 큰 논란이 되었다. 해당 장면을 두고 클로버는 분개했고, 포커싱은 논란이 커질 것을 경계했다.
[클로버인 강프인데 지금 그냥 ㅈㄴ 속상함]
애가 왜 그렇게 크림 메시지 자주 왔는지 알겠음… 라이브 방송으로는 또 포커스 멤버처럼 지내야 했던 거잖아. 근데 저런 취급 받으면서 지내는걸 이제야 알았다는 게 너무 속상하고 억장이 무너짐
-애가 착해서 내색도 못했다는게 너무 미치겠음
-케어 저따위로 할거면 크리드로 돌려줘ㅠㅠㅠ
-너무 미안해ㅠㅠ 해줄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서ㅠㅠㅠㅠ
-다들 크림에다가 좋은 말 많이 해주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임ㅎ…누추한 곳에 내 귀한 새끼가
[ㅈ로버 강앰들 너무 유난임ㅎ;;]
정확하게 들린 것도 아니고, 진짜 강이 해야 할 일이 있던 거일수도 있잖아. 이때싶으로 포커스 합류한거 욕하면서 포커스 내려치는 거 너무 속 보임ㅋㅋㅋ…
-진심 즈그새끼 겸업하게 된 걸로 한 ㅈㄴ처먹어
-도현이도 계약직 말고 정규직을 바랄텐데ㅠㅠ 팬들이 알아서 계약직 만들기 하고 있네
-저게 사실이어도 ㅈㄴ사이다인데? 강도현이 포커스 스케줄에서 클로버 언급한 게 한 두 번이냐?
└ㅇㅇ이거 솔직히 말 나올줄 알았는데 너무 조용하더라ㅎ
└조용은 무슨;; 이미 활동 초에 마플 ㅈㄴ돌고 처맞았는데 더 욕먹길 바랐나봐?
뒤늦게 VM에서는 포커스의 단체 사진을 올렸다. 최대한 친해 보이게 찍으려는 노력이 가상한 단체 사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현이 합류하고 나서는 항상 형식적인 단체 사진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사진에서 느껴지는 VM의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대응은 팬들의 화를 더 키우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 과열된 두 팬덤 사이에 흥미로운 미션이 하나 던져졌다.
[ㅁㅊ 대상 후보 떴다]
루커스, 멜로디즈, 정수지, 크리드
이 중에 세 부분 다 노미된건 루커스랑 크리드
-??
-크리드?
-내가 지금 보고 있는게 크리드 맞음?
-미쳤넼ㅋㅋㅋ
-와 크리드 이번 앨범 추이 미쳤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찐으로 대상 후보에 올랐네
연말 시상식 대상 후보가 뜨자마자 A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텍스트로만 봐도 비장함이 느껴졌다. K와 문스트럭은 메시지를 확인하고 절로 목울대가 넘실댈 정도로 침을 삼켰다. 메시지를 보내는 A의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비단 A만의 반응은 아니었다. 전 세계 강도현 팬들과 클로버들은 모두 같은 생각일 거였다.
[A: 이번 대상, 무조건 크리드가 가져간다.]
분노한 그녀들에게 못할 일이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