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유현이 형의 촬영이 한창인 어느 날,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미국에서 정식 데뷔요?”
“그래. 토스맨 일 이후에 에이전시 컨택이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아직 시기상조라고 거절했거든. 근데 거기서 다시 제안이 들어왔어. 이번 활동 한정이지만 성과가 좋으면 더 좋은 조건으로 바뀔 거 같아.”
“와, 미국 진출이라니…….”
타이밍 좋게 미국 에이전시에서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단기지만, 이번에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낸다면 충분히 전속 계약도 생각하고 있다는 다소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기다린 만큼, 정말 중요한 기회였다. 그래서 만반의 준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곡은 이전과 같이 공정하게 블라인드 테스트로 선정할 거야.”
“네.”
“윤빈이랑 승빈이도 이번에 참여할 거지?”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쩌면 그날’에 캐스팅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할 날이 올 줄이야. 만약 주연을 맡았다면 노래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을 거였다. 이전에도 촬영과 활동을 병행하긴 했지만, 주연을 맡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비중도 늘고, 책임감도 있어야 할 역할이기 때문에 더 철저한 준비를 해야 했겠지. 역시 잃는 게 있다면 얻는 게 있는 법이다.
이번 미국 진출 곡은 현지화 공략을 위한 철저한 조사를 바탕으로 만들기로 했다. 미국 문화에 익숙한 윤빈 형과 나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이번 활동은 현지에서 크리드의 이름을 알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룹 색이 녹아 있으면서도 대중적인 곡이어야 했다.
“아예 처음부터 챌린지를 노리고 만드는 건 어때요?”
“하긴, 처음부터 그룹이나 노래를 직접적으로 알리기엔 너무 어렵지.”
국내, 아시아에서는 크리드의 인지도가 어느 정도 잡혀 있기 때문에 길거리 혹은 라디오에서 노래가 나오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K팝의 인지도가 높아졌다고 한들 마이너 중의 메이저인 현재 상황에서는 라디오에 노래 한 번 나오는 것에 어마어마한 홍보 활동이 필요하다. 코어가 규모가 작은 소속사는 아니지만, 아직 엔터테인먼트 사업에서는 신생 소속사와 같은 위치이기 때문에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보다는 SNS를 통한 홍보가 훨씬 효율적이었다. 무조건 터질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먼저 곡 주제를 간단히 정하고 시작할까?”
“자신감을 줄 만한 곡이었으면 좋겠어.”
“맞아. 밝은 분위기에 와우 포인트가 많아야겠지?”
“역시 형이랑은 티키타카가 잘 맞는다니까?”
윤빈 형과의 작업은 언제나 순조롭고, 흥미롭다. 하나를 말하면 다섯 가지 아이디어가 나온다. 내 머릿속에서만 있는 멜로디들이 형의 손을 거치면 그대로 실현된다는 점도 놀라운 포인트다.
“제목을 뭐라고 하는 게 좋으려나-”
“제목을 크리드가 연상되게 정하는 건 어때요?”
“크리드를?”
“우리가 ‘크리에이트 유어 아이디, 이드’라는 뜻을 가지고 있잖아요. 이번 노래 주제랑도 잘 맞네요, 생각해 보니까?”
“아예 크리드로 할까?”
“그럼 우리 팀 이름도 절대 못 잊겠네요?”
노래 제목을 그룹 이름과 똑같이 하는 것은 꽤 무모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크리드는 우리 그룹 이름을 위해 만들어진 유일무이한 합성어다. 다른 단어들과 겹쳐서 검색 결과를 찾기 어려운 등의 불상사는 없을 것이다.
가사는 지운이 형과 내가 참여했다. 긍정적인 메시지를 담은 가사를 만들기 위해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가사를 적어 갔다.
[마음껏 그려 봐 네 머릿속 이미지
눈 감고 떠 보면 다시 찾게 될 거야
거짓말처럼 돌아온 너와 나의 클라이맥스]
“여기, 익숙하죠?”
“아유, 당연하죠. 그때 거의 2주 동안 여기서 먹고 자고 했는데.”
그리고 ‘글루미’도 작업에 참여했다. 부영만 사건 이후 ‘글루미’는 소속사를 나와서 스노우튠 프로듀싱 팀에 들어갔다. 스노우튠은 거의 코어 전담 프로듀싱 팀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음 국내 앨범 준비에도 참여하게 되면서 이번 미국 데뷔 앨범에도 함께하게 되었다.
[거울 속 나에게 외쳐 봐
네가 최고야! 가장 빛나는 걸!
움츠릴 시간이 없어
이제는 네 날개를 펼칠 시간이야]
‘글루미’가 준비해 온 가사도 긍정 에너지가 가득했다. 활기찬 분위기에서 작업이 진행되다 보니 윤빈 형도 평소보다 높은 텐션을 유지하며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제목은 ‘크리에이트 유어 아이디’로 해서 크리드이고. 장르는 미디엄 템포 팝. 언제나 너의 리즈 시절을 응원한다는 긍정 에너지가 가득한 노래 정도로 소개하면 될까?”
“적당한 거 같아요. 그럼 이제 챌린지에 대해서도 논의해 봐야겠어요.”
챌린지에 대한 회의는 오해나 디렉터와 선우 형과 함께했다. 인터넷상의 유행이나 트렌드를 누구보다 빨리 알아 오고, 분석해 내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춤 동작을 활용한 챌린지보다는 반전 요소를 주는 게 필요해.”
“반전이요?”
“응. 요즘 유행하는 챌린지들 보면 짧은 영상 안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거든. 대표적으로 너드 같아 보이는 남자나 여자가 갑자기 스타일링을 바꾸더니 킹카나 퀸카로 바뀌는 챌린지가 있지.”
“리즈 시절을 보여 주는 방식으로 차용하면 되겠네요?”
“그렇지! 리즈 시절이라면 참여 연령대의 범위가 더 넓어지겠지. 누군가에게 리즈 시절은 젊은 시절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지금일 수도 있고.”
선우 형의 몇 안 되는 진지한 모습에 오해나 디렉터는 흥미롭다는 듯 감탄했다.
“와, 선우 군, 이런 사람이었어요?”
“저요? 이런 사람이라는 게 무슨…….”
“3년 동안 같이 일했지만 이렇게 진지한 모습 처음 봐요.”
“제가 동생들 앞에서는 형으로서 무게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서 조용한 모습만 보여 드린 거 같네요.”
“음… 그건 아닌 거 같아요.”
“네. 그건 아니에요.”
눈이 마주친 오해나 디렉터와 내가 같은 반응을 보이자 선우 형이 심통이 난 오리처럼 입을 쭈욱 내밀었다.
“저도 진지할 땐 진지하다고요-”
“장난이야, 장난.”
“장난 아니잖아.”
“어떻게 알았지?”
“야, 이…….”
“안 돼, 형. 나쁜 말 쓰면!”
“너, 아주 나를 욕쟁이에 뺀질이로 만들 생각이구나!”
왁왁대는 선우 형 입에 초콜릿을 물린 후에야 조용해졌다.
“어쩐지 형이 왜 이렇게 쉽게 화를 내나 했어요. 당 떨어져서 그런 거네.”
“조용히 해라.”
“넵.”
그렇게 완성한 챌린지는 ‘크리드 챌린지’였다. 먼저 현재 모습으로 시작해서 카메라 버튼을 누르듯이 다가온 뒤, 카메라가 뒤로 넘어간다. 그 후 다시 돌아왔을 때는 [거짓말처럼 돌아온 너와 나의 클라이맥스] 가사에 맞춰 자신이 생각한 전성기의 모습을 담아 내는 것이다.
“시범 삼아 찍어 볼까?”
“형이 한번 보여 줘요.”
“그래, 이 형님이 하는 거 잘 보고 따라 해라!”
멤버들 중에서도 챌린지를 가장 적극적으로 하고, 플랫폼 활용도 활발히 하는 멤버가 선우 형이다. 어디서 알아 온 건지 모르겠을 이상한 챌린지들도 올려서 가끔 팬들과 멤버들을 당황스럽게 할 때도 있지만, 확실히 포인트를 알고 하는 형이다. 그래서 이제는 유행할 법한 챌린지가 나오면 클로버들은 선우 형이 얼마 있다가 영상을 올릴지 내기하는 일까지 생겼다.
“그러고 보니 형 리즈 시절은 언제예요? 리즈 시절 영상도 준비를 해야…….”
“승빈아, 형은 원테이크로 끝낼 거야.”
“여기서요?”
“당연하지. 이 형님의 전성기는 언제나 지금이란다?”
“와우.”
“이야…….”
자신감 가득한 선우 형의 발언에 나와 오해나 디렉터는 할 말을 잃었다. 늘 이상한 형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첫 만남에 홍삼 캔디 내밀면서 베스트 프렌드가 되겠다던 모습 그대로였다.
형은 나와 오해나 디렉터가 지켜보는 앞에서도 능숙하게 챌린지 촬영을 마쳤다. 중간중간 모니터링도 하면서 찍는 모습이 제법 본격적이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저 형은 지금 예술을 한다는 마음으로 찍고 있는 거야…….’
그리고 결과물도 기가 막혔다. 쉽게 감탄하지 않는 오해나 디렉터도 형의 영상을 보고 진심으로 칭찬했다.
“선우 군도 구르는 재주가 있네요?”
“하핳! 제가 챌린지 하나는… 근데 구르는 재주요?”
“아, 아니. 너무 잘해서 놀랐다고요~”
칭찬에 금세 기분이 좋아진 형이 나에게도 비법을 전수해 준다며 한 시간 동안 챌린지 영상 팁을 알려 줬다. 얼렁뚱땅 완성한 챌린지 영상을 보며 한참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선우 형의 끝없는 열정에 오해나 디렉터도 영상을 찍을 뻔했지만, 발 빠르게 회의실을 떠났다. 결국 나 혼자 선우 형의 스파르타식 강습을 받으며 영상을 완성했다.
“헉, 헉. 형, 이제 그만 찍어요-”
“아, 뭔가 아쉬운데, 아직…….”
“재봉이랑 강도현은 잘 찍지 않을까요?”
“숙소 가서 한 명씩 다 시켜 봐야겠다!”
한 말은 무조건 지키는 성격은 우리 멤버들의 공통점인 게 분명하다. 숙소에 가자마자 거실에서 TV를 보던 멤버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 챌린지를 찍게 했으니까.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를 보는 멤버들에게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고삐 풀린 선우 형을 말릴 수 없었다.
“뭐, 뭐냐?”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유현이 형은 거실에 널브러진 멤버들을 보며 당황스러움에 말까지 더듬었다. 그 사이에서 홀로 지친 기색 없이 챌린지 영상을 찍는 선우 형은 맑은 눈의 광인과 같았다. 나는 저 눈과 마주치면 끝이라고 눈으로 말했고, 유현이 형은 조용히 시선을 허공에 둔 채 방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미국 진출 성공하려면 이 정도 퀄리티로는 안 된다니까?”
“죽여 줘…….”
* * *
미국 앨범을 한창 준비하는 와중에 포커스가 리패키지 앨범을 내며 바로 컴백했다. 강도현이 합류한 첫 활동이었다. 미국 활동 준비 동안은 활동에서 제외해 달라는 코어의 요청이 있었지만, 이미 세계관과 콘셉트도 다 준비했다는 이유로 VM은 딱 잘라 거부했다.
“숙소는 계속 여기 쓰기로 한 거야?”
“응. 가끔 숙소 리얼리티 찍을 때만 가기로 했어.”
“너도 고생이다,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아서.”
“어쩌겠냐- 내가 너무 잘나서 양쪽에서 내가 필요하다는데.”
이제 더 이상 땅굴을 파지 않는 태도에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 일은 다른 곳에 있었다. 뜻밖에도 오재성이 몰라보게 달라졌다는 반응으로 한동안 화제였다.
[오재성 무슨 일임? 악마한테 영혼이라도 판거냐?]
-킹리적갓심ㅇㅇ 갑자기 실력이 ㅈㄴ늘었어
-실력만이 아니라 얼굴도 전보다 잘생겨 보이지 않음?
-실력은 그럭저럭이어도 아이돌력은 ㅈㄴ없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천년돌 될 수 있는거임?
-오재성붐은 온다
직캠으로 무대를 보니 확실히 이전보다 능숙해졌다. 상태창으로 확인한 포인트도 이전보다 확실히 올라 있었다. 상태창의 수혜를 제대로 누리고 있구나- 하지만 아직 견제할 만큼의 레벨은 아니었다. 오재성의 변화는 멤버들 사이에서도 화제였다.
“쟤가 갑자기 이렇게 성장한다고?”
“혼자 치트 키라도 썼을 리도 없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연기와 관련해서는 상태창이 영향을 주지 못한 듯했다. 그래도 오재성은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아이돌로서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연기 기회가 많아질 거라며 반가워하고 있을 놈이었다.
그리고 제아무리 날뛰어 봐도 얼마 남지 않았다, 저 녀석의 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