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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294화 (294/346)

294화

그동안 정식 그룹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겼기에, 생각조차 안 했던 목표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왔다. 따지고 보면 이곳으로 회귀한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는데, 적어도 이것보다는 현실성 있는 목표겠지.

정식 그룹이 되기 위해서는 현재 크리드가 체결한 5년 계약을 완전히 바꿀 사건이 필요했다. 이 그룹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사건. 그러기 위해서는 코어 엔터로는 부족하다. 투마월 다음 시즌을 통해 데뷔하는 신인 그룹 역시 담당해야 하는 코어 입장에서 크리드를 정식 그룹으로 품고 있기에는 부담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코어가 아닌 다른 국내 소속사는 어려울 텐데…….’

만약 국내 소속사에서 활동을 이어 간다면 각 소속사를 설득해야 한다. 하지만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해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일단 전체 소속사를 아우를 수 있는 현 소속사를 이용해야만 한다.

그렇게 며칠간 골머리를 앓던 중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국내 소속사에서 계약 기간이 끝난 그룹이 해외 소속사와의 계약 기간에 묶여서 해당 멤버들이 FA 시장에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순간 머리 위로 전등이 켜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국내가 어렵다면 해외를 노리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해외 진출이 필요했다. 지금까지 해외 공연을 하거나, 방송에 출연한 적은 있지만 본격적인 해외 진출은 하지 않았다. 지난번 토스맨 당시 미국 진출을 반대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 그때 무리하게 미국 진출을 했으면 아마 단기 계약을 끝으로 흐지부지하게 끝났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정식 그룹에 대한 열망이 없던 시기여서 그 기회의 무게를 가볍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며칠, 몇 주로 완성할 수 없는 장기 프로젝트는 처음이었다. 그만큼 긴장되고, 부담감이 컸다. 그렇게 크리드 다음을 생각해야 한다고 큰소리 쳐 놓고 정식 그룹을 만들겠다고 하는 게 우습다고 생각하겠지만, 이젠 솔직해지기로 했다.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바꾸고 말 거다, 이젠 정말 이 팀 없는 미래를 상상할 수 없으니까. 설령 무모한 도전이라 하더라도 후회 없이 시도하기로 결심했다.

* * *

“내일이 첫 촬영이라고 했죠?”

“응.”

“근데 저랑 계속 연기 연습하는 이유가 뭐예요?”

“소속사에서 하는 연기 수업도 좋긴 하지만, 너무 틀에 박힌 방식이야.”

“기초 쌓는 데에는 필요한 방식인데.”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기도 했다. 연기를 체계적으로 배우고 시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기초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항상 양가감정을 가진다. 만약 정석적인 방법으로 연기를 시작했다면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연기를 하는 배짱을 가지지는 못했겠지. 감독에게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알아. 그래서 병행하는 거야. 너에게는 수업으로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울 수 있잖아.”

“형이 나한테 배운다고 하니까 되게 이상해요.”

“뭐가?”

“뭔가 형은 배우지 않아도 다 잘한다고 생각해서요.”

“내가 인간인 건 알고 있는 거 맞지?”

“가끔 의심하긴 하는데.”

“이 자식이?”

“농담이에요, 농담.”

이 형은 모르겠지. 투마월 때는 정말 AI인 줄 알았다. 감정이나 사람 마음 같은 건 절대 모르고, 공감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까마득히 먼 옛날 일이고, 크리드를 하면서 형의 다양한 모습을 봐서 그런지 억지로 끄집어내지 않는 이상 흐릿한 기억이었다.

“성훈이랑 지석이 첫 만남 부분부터 할게요.”

“지석 부분은 넘기고 해도 괜찮아. 조금 껄끄러울 수 있으니까.”

“지석이 친구 역할이면서 지석이랑 연기하는 부분을 넘기면 어떡해요? 그리고 형 분량 절반이 지석이랑 붙은 장면이어서 어쩔 수 없어요.”

“그러게.”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는 형이다.

“시작할게요?”

“응.”

이미 회귀 전 수만 번 읽은 대사와 장면이어서 어색함 없이 연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지석: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거지? 난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성훈: 일단 침착하고 방법을 찾아보자.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볼게.]

[지석: 내 주변에는 불행만 있는 거 같아. 내가 있는 곳마다…….]

[성훈: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니까?]

연기에 몰입하다 보니 저절로 지석을 연기했던 당시의 감정이 밀려왔다. 눈물이 고인 나를 따라 유현이 형의 눈가도 반짝였다. 대사가 끝나자마자 둘 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잽싸게 눈물을 훔쳤다.

“이거 봐. 연기 수업하면서는 한 번도 눈물이 안 났거든. 지문에도 눈물을 흘린다거나, 울컥한다고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 상황에서 어떤 친구가 눈물이 안 나겠어?”

형의 말을 들으니 그동안의 내 연기가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게다가 형이 자신의 연기 방식을 내려놓고 내 연기 스타일을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도 했다는 것이 뿌듯했다. 사실 지석 역할을 놓치고 잠깐은 아닌 척해도 내 연기 스타일에 대한 회의감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나다운 방식으로 연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유현이 형이 다시 상기시켜 줬다.

“다시 시작해 볼까?”

“좋아요!”

연기 연습하는 중간중간 화면에 잡히는 팁이나, 현장에서의 꿀팁을 알려 줬다. 성훈 역할과 붙는 장면이 많았던지라 어떻게 해야 성훈 캐릭터가 돋보일 수 있는지에 대한 데이터도 충분했다.

“김 감독님은 대본 그대로 하는 걸 좋아하는 감독님이긴 하지만, 현장에서 더 좋은 신이 나오면 고집부리지 않고 인정하는 분이세요. 정 감독님도 마찬가지고요. 형이 다양한 버전을 준비해 가서 보여 드리면 더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을 거예요.”

“안 그래도 다른 버전들도 준비했는데 봐줄래?”

“당연하죠-”

역시 알아서 준비를 철저히 하는 형이다.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어 보였다.

* * *

다음 날 첫 촬영을 마친 유현이 형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눈빛만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재미에 눈을 뜬 얼굴이었다. 형은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너, 그래서 대기 시간에 그렇게 연락을 했던 거야?”

“네?”

“혼자 있는데 심심해 죽는 줄 알았어.”

유현이 형은 몰랐겠지, 그 말이 멤버들에게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옆에서 물을 마시던 선우 형은 사례가 걸려 기침을 할 정도였다.

“형이요?”

“형이 혼자 있는데 심심했다고요?”

“형이 심심함도 느껴요?”

“거짓말!”

그리고 형의 말을 이해했을 때에는 민망함이 밀려왔다. 그나마 나는 촬영 현장에 김민정이나, 유현재가 있어서 심심함이 덜했지만, 둘이 촬영에 들어가서 나 혼자 있을 때는 심심함을 참지 못하고 멤버들에게 연락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연기 연습이나 더 하라는 장난 섞인 핀잔을 듣곤 했다. 유현이 형도 딴짓할 거면 안무 연습 더 하라고 한 적이 있다.

형은 멤버들의 쏟아지는 반응이 부담스러웠는지 잠시 뒷걸음을 치며 물었다.

“뭐야, 너희는 언제 나온 거야?”

“형, 죄송하지만 저희는 계속 여기 있었거든요?”

“그니까. 오자마자 문승빈한테 달려오더니 우린 보지도 못했나 봐?”

“헐, 완전 힝이에요, 형.”

“뭐야, 강도현 지금 힝이라고 한 거임? 난 완전 웩이네요.”

“선우 형은 완전 쉣이고요.”

“둘 다 말 진짜 예쁘게 합시다.”

지운이 형이 유치원 선생님처럼 달래고 떼어 놔도 끝을 모르고 으르렁거리는 둘이었다.

“음악 방송이나 예능하고는 완전 다르죠?”

“응. 현장 스태프들도 더 많고, 근데 대기 시간 긴 건 똑같더라.”

“맞아. 촬영 딜레이도 되게 많이 되죠?”

“그리고 강대섭 선배님도 만났어.”

“어땠어요?”

“너랑 같은 그룹이라고 정 감독님이 먼저 인사시켜 주셨어. 그분도 낯을 많이 가리나 봐. 서먹한 분위기였는데 내가 먼저 말 걸었지 뭐.”

“잘했어요.”

강대섭이 낯을 가린다는 건 의외였다. 초면인 나에게는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는데. 아니면, 유현이 형이 초면에 다가가기 어려운 인상이어서 그랬나?

“정 감독님도 알게 모르게 잘 챙겨 주셨어.”

“제가 엄청 신신당부했거든요. 형 잘 안 챙겨 주면 다음 작품 같이 안 할 거라고-”

“진짜로 그랬다고?”

“네!”

“너, 정 감독님이 현장에서 얼마나…….”

“지랄 맞죠?”

“야, 말을 무슨 그렇게… 근데 솔직히 맞긴 해.”

하긴, 현장에서의 정 감독의 모습만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정신 나간 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딱 사람 기죽기 좋은 말만 골라 하거나, 직설적으로 행동을 하는 사람이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악의는 없지만, 원하는 만큼의 능력을 보여 주지 않으면 가차 없는 사람이다. 그래도 유현이 형이 싫은 소리를 들었다는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면 어느 정도 정 감독의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김 감독님은 어땠어요?”

“김 감독님도 엄청 별난 분이더라.”

“엄청 고집스럽죠?”

“응. 근데 네 말처럼 대본보다 좋은 신이 나오면 대본 수정도 잘하시더라고. 여러 가지 버전 준비해 갔는데 그 중 하나는 대본이랑 다르게 진행했어.”

그리고 유현이 형이 말한 장면은 내가 도와주고 조언을 줬던 장면이었다. 촬영 현장 얘기를 하는 유현이 형은 보기 드물게 말이 멈추지 않았다. 옆에서 얘기를 듣던 멤버들도 호기심 가득한 눈에서 흥미진진한 얼굴로 변했다.

“나 유현이 형이 저렇게 말 많이 하는 거 처음 봐.”

“근데 멈추라고 하고 싶진 않아.”

“맞아. 언제 또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잖아?”

“그래도 형은 크리드 해야 해요. 형까지 연기에 뺏길 수 없어요.”

“형까지? 야, 나도 크리드가 더 중요하거든?”

“형도 승빈이 형처럼 막 여기저기 상 받으면…….”

“왜 그런 생각을 해, 재봉아.”

“형이 너무 신나 보여서…….”

이어지는 유현이 형의 행동에 모두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유현이 형이 박재봉의 볼을 잡고 이리저리 늘리다가 어루만지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내가 리더인데 설마 그러겠어? 다른 애들은 몰라도.”

“유현이 형 어디서 벼락 맞은 거 아니야……?”

“다른 애들은 몰라도?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나도 크리드가 1순위거든요?”

“나도!”

“형들, 나중 돼서 말 바꾸면 안 되는 거 알죠?”

“이 쪼끄만 머릿속으로 그런 거나 고민하고 있었냐?”

강도현이 빵 반죽을 굴리는 것처럼 박재봉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흐트러뜨렸다.

“아, 머리 망가져요!”

“재봉아, 울다가 웃으면 큰일 나는데?”

“재미없거든요!”

박재봉은 칭얼거리면서도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했다. 투닥거리는 멤버들을 보면서 나와 지운이 형, 유현이 형은 옅게 웃었다.

박재봉의 불안도 결국은 그룹이 정식 그룹이 아니기 때문에 기인한 것이다. 그런 멤버들을 보면서 다시 마음을 굳게 먹었다. 꼭 크리드를 정식 그룹으로 만들 것이라고. 각자 다른 길을 걷게 되더라도 언제든지 크리드로 돌아올 수 있도록 단단히 뿌리를 내릴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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