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꼭 정밀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의사의 말과 멤버들의 원성에 이기지 못하고 CT부터 MRI까지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나서야 퇴원할 수 있었다. 당연히 검사 결과는 지극히 정상이었다. 그래도 한동안은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멤버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다만…….
“다들 제발 나 신경 쓰지 말고 할 일들 할래?”
과하다 싶을 정도로 과잉보호를 해서 온몸에 좀이 쑤실 정도였다. 레슨 중에도 수시로 내 몸 상태를 살펴야 한다며 쉬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고마웠지만, 이제는 유난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유현이 형과 지운이 형은 한술 더 떠서 양손 가득 약들을 챙겨 왔다. 약국이라도 하려는 건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 이걸 다 먹으라고요?”
“응. 이건 비타민이고, 철분제랑 오메가쓰리랑 칼슘도 챙겨 먹고. 이건 한약이고.”
“아침에 이거만 먹어도 배부르겠어요.”
“안 돼, 아침도 꼭 챙겨 먹어야 해.”
“그게 그런 소리가 아니잖아요-”
다들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걱정하고 있음을 티를 냈다. 예를 들어 선우 형과 박재봉은 밤 10시만 되어도 안대와 잠옷을 챙겨 와서는 지금 자야 할 시간이라고 고집을 부렸다.
“아직 10시밖에 안 됐거든요?”
“10시면 자야지.”
“참 나, 이제 멀쩡하거든요? 내가 초등학생도 아니고 무슨 10시에 잠을 자요!”
“안 돼요! 완전 저질 체력이면서!”
“일찍 자야 하는 건 너지, 넌 키도… 아, 이미 많이 컸구나.”
“이 형이 다 준비했으니까 얼른 양치하고 자라니까?”
“뭘 준비까지 해요!”
손에 이끌려 방에 들어가 보니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 조명에 향초에 아주 숙면에 좋은 것들을 죄다 가져왔다. 가장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 것은 침대맡의 인형이었다.
“이건 뭐예요?”
“그거 내가 제일 아끼는 썬냥이야… 내 부적 같은 애거든? 쟤 머리맡에 두고 자면 악몽이랑 불면증을 다 없애 줄 거야.”
“와… 형.”
“너무 너무 감동적이지! 비록 내가 썬냥이가 없어서 악몽을 꿀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난 형이니까 안타까워하지 않아도 돼!”
“머리가 더 아플 거 같으니까 치우세요.”
“그래도-”
그나마 윤빈 형과 지운이 형은 마음에 들었다. 삼시 세끼는 무조건 영양가 있게 먹어야 한다는 둘의 합작으로 아침, 점심, 저녁 배달 음식이 아닌 집밥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둘이서 위튜브와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열심히 찾아서 음식을 해 주는데 감탄이 나오는 맛이었다.
“형들, 식당 열어도 되겠는데요?”
“완전 집밥 윤 선생, 차 선생이잖아요?”
“입에 맞아?”
“완전 최고예요. 솔직히 말하면 구내식당보다 훨씬 맛있어요!”
옆에는 강도현과 선우 형, 박재봉이 볼이 터져라 음식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어쩐지 내 몸보신 목적보다 맛있는 요리를 삼시 세끼 먹는 데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거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강도현은 괜히 주변을 알짱거리는 날이 늘었다. 연습을 하다가 목이 마른 거 같아 보이면 언제 준비했는지 물을 건넸고, 혼잣말로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면 숙소 냉장고에 사 놓는 등 알게 모르게 도움을 줬다. 어릴 때 읽었던 이빨 요정이 떠올랐다.
길어 봤자 하루 이틀 이러고 말겠지 예상했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멤버들의 지극 정성은 유지되고 있었다. 워낙 챙김받고 자란 성격도 아닐뿐더러, 혼자 챙기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다들 어떤 마음으로 돌봐 주는 건지 잘 알지만, 적응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사이 누나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걱정시키기 싫으니 가족들에겐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가족 중 하나는 알아야 하지 않겠냐며 매니저 형이 누나에게만 내 상태를 알렸다고 한다.
[많이 아파?]
“이제 괜찮아.”
[하여간 아픈 거 죽어도 말 안 하는 건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안 변했다니까?]
“매니저 형이 오버한 거라니까.”
[엄마 아빠한테는 말 안 할 거임.]
“응. 고맙.”
[숙소로 뭐 보냈으니까 챙겨 먹어.]
“안 그래도 되는데.”
[누나 말 들으면 뭐라고?]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와, 이거 진짜 오랜만이네.”
[옳지.]
거의 반년 만의 통화였다. 나도 바빴지만 누나 역시 개인전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기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괜히 걱정시킨 게 아닌가 망설였지만, 매니저 형의 말이 맞았다. 누나가 보낸 것은 각종 고기였다. 지운이 형과 윤빈 형에게 보여 주자 안 그래도 고기 요리 레시피를 공부 중이었다며 금세 요리를 완성했다. 나중에 저 둘로 요리 콘텐츠를 해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오디션 결과가 통보됐다는 소속사의 연락을 받고 유현이 형과 함께 회사로 향했다. 마음의 준비는 이미 마친 상황이어서 형이라도 꼭 캐스팅되길 바랐다. 상기됐지만 어딘가 무거운 이사님의 얼굴을 보며 무슨 말을 하실지 예상이 됐다.
“좋은 소식과 아쉬운 소식이 있어.”
“…저희 둘 중 하나만 됐나 보네요.”
“응. 유현이는 원래 염두에 두고 있던 ‘성훈’ 역할에 캐스팅됐고, 승빈이는 아쉽게 불발됐다. 둘 다 좋은 소식 전해 주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어.”
“축하해요, 형!”
“…….”
유현이 형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기뻐하길 바랐는데, 역으로 내가 미안해졌다.
“혹시 지석 역은 누가 됐어요?”
“강대섭 배우가 하게 됐어.”
강대섭 배우의 이름을 듣고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지만, 혹시나 오재성이 주인공이 된다면 현장에서 형에게도 안 좋을뿐더러, 큰 사건이 바뀌는 흐름을 오재성이 잡게 된다면 앞으로 더 거대한 파장을 가져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유현이 형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화가 날 상황은 아니었는데, 화가 난 얼굴이었다.
“정 감독님께 잘 부탁드린다고 할게요, 제가 형도 연기 잘한다고 몇 번 말했었거든요.”
“…….”
나란히 걷던 발걸음을 멈췄다. 몇 발자국 앞서 가던 유현이 형이 뒤늦게 알아채고 몸을 돌렸다. 나는 말없이 형을 응시했다. 형이 먼저 말을 해 주길 바랐던 거 같다. 하지만 이번에도 형은 침묵했다. 그렇게 아무 진전도 없이 연습실을 향했다. 연습실에 도착해 문을 열자마자 멤버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축하해!”
“둘 다 캐스팅됐지?”
“어떤 역할 맡았어?”
“기념으로 맛있는 거 먹자!”
나도 잠시 당황했지만, 곧 다른 멤버들 틈에 껴서 축하했다.
“맞아! 유현이 형 첫 연기 도전이니까 연습 끝나고 맛있는 거 먹자!”
“너도 먹고 싶은 거 있어? 둘 다 축하해야지!”
“그만해.”
“네?”
“못 들었어?그만 하라고!”
“형, 왜 그래요?”
유현이 형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결국 큰소리가 났다. 순식간에 분위기는 가라앉았고, 멤버들은 영문도 모른 채 조용히 자리로 돌아갔다.
“저 형 진짜 왜 저래?”
강도현이 조금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넘기며 물었다.
“나는 오디션 떨어졌거든.”
“뭐?”
“미, 미안해. 우린 당연히 둘 다 됐을 거라고 생각해서…….”
“아니야. 미안해할 필요 없어.”
그제야 멤버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형은 정말 연습에만 몰두했다. 형 입장에서는 자신 혼자 캐스팅된 것을 축하받는 것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오히려 나는 이런 분위기가 더 불편했다. 내가 뽑히지 못했다 하더라도, 형이 캐스팅된 것은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었으니까. 덩달아 멤버들도 내 눈치를 보는 것이 불편했다.
연습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서도 냉랭한 분위기는 이어졌다. 결국 내가 유현이 형을 붙잡았다. 이렇게 불편한 상태는 하루라도 더 시간을 끌면 안 된다는 것을 수많은 경험을 통해 배웠거든. 윤빈 형에게는 미안했지만, 잠시 방을 차지했다.
“형이 말을 안 하면 전 몰라요.”
“…….”
“좋은 소식이라고 했잖아요. 저도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어요. 형이 그렇게 화가 난 얼굴이면 제가 어떻게 해요? 나만 안 됐다고 땡깡이라도 부릴까요? 근데 전 그럴 마음이 전혀 없어요!”
“나만 좋은 소식인 게 무슨 소용이야. 나는 네가 당연히 될 거라고 생각했어. 만약 아쉬운 소식을 듣는다면 그건 당연히 나였어야 했고.”
“전 이미 예상하고 있었어요. 형이 제 오디션을 본 것도 아니잖아요.”
“네가 얼마나 잘하는지 내가 아는데……!”
전혀 다른 방향의 분노였다. 그러니까 지금 저 형은 내가 떨어진 것에 화가 났다는 거잖아. 그때가 돼서야 긴장이 풀렸다. 혹시라도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면 어떻게 풀어야 하나 고민이었거든.
“저도 아쉬워요, 형이랑 같이 연기해 보고 싶었는데.”
“… 나 혼자일 거잖아.”
“네?”
“아, 됐어. 레슨 늦겠다.”
“알겠다. 연기 촬영 현장은 처음이어서 긴장돼서 그런 거였구나?”
나는 형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좀 떨어져.”
“제가 정 감독님한테 잘 부탁드린다고 할 거니까 걱정 말라니까요?”
“필요 없어.”
“대섭 선배한테도 저랑 같은 그룹이라고 하면 분명 잘 챙겨 주실 거예요. 아~ 내가 눈치가 없었네. 우리 형 낯가리는 걸 까먹고 있었네-”
“…말을 말자.
형이 그런 사람이 아닌 거쯤은 알고 있다. 분명 현장에서도 잘 적응할 것이다. 하지만, 혼자일 거 아니냐는 말은 의외였다. 하긴, 아무래도 3년 가까이 팀으로 활동해서 항상 일곱 명이 북적거리는 분위기 속에 있다가 갑자기 혼자 현장에 가면 어색하겠지. 가끔 이렇게 의외의 모습을 보여 줄 때마다 흠칫하지만 고맙기도 했다. 그만큼 나를 믿어서 하는 말이니까.
대화를 마치고 유현이 형을 거실로 끌고 왔다. 그동안 멤버들은 연습실에서 하지 못했던 축하를 제대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유현이 형의 연기 데뷔를 축하합니다!”
“승빈이도 꼭 좋은 작품 만나길 바라고!”
조용히 자리에 앉은 유현이 형이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연습실에서 한 말은… 내가 심했다. 진심은 아니었어.”
“연습실이요?”
“형이 무슨 말을, 아! 괜찮아요. 그건 저희 잘못 맞으니까!”
“맞아, 맞아. 우리가 너무 자만했어요. 당연히 둘 다 될 줄 알았지!”
“맞아. 거긴 분명 후회할걸요? 유현이 형이랑 승빈이 형이 같이 연기할 기회를 제 발로 차 버린 거잖아요!”
“그니까,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뻔했는데-”
뒤끝 없는 멤버들 덕분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환기되었다. 그제야 유현이 형도 한결 편안한 얼굴로 대화에 참여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 지석 역할에 미련은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까지 욕심을 부릴 일이 아니었다. 정말로 ‘어쩌면 그날’이라는 좋은 작품이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길 바라고 시작한 일이었으니까. 무리하게 도전한 것에 후회하지 않지만, 이 일 때문에 멤버들과 어색한 사이가 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마음속에 한 가지 거대한 프로젝트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나에게 이 팀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새삼 깨달았으니까. 프로젝트명은 간단하다.
[크리드 정식 그룹 만들기]
온 힘을 다해 도전할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