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연기를 마치고 감독님들과 똑바로 눈을 맞출 수 없었다. 제대로 해내지 못한 것이 분했으니까. 입술을 깨물었다. 힘 조절이 안 됐는지 어렴풋이 피 맛이 느껴졌다.
“연기는 잘 봤어요. 역시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다만, 승빈 씨에게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올 게 왔구나.
“네.”
“지문이랑 다르게 연기한 이유가 있을까요?”
“현장에서 촬영할 것을 염두에 두고…….”
“현장? 벌써부터 현장에서 촬영할 걸 생각해요?”
“…….”
김 감독은 대본대로 진행하지 않은 것에 못마땅한 반응이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서운함이 밀려왔다. 김 감독과는 정 감독과 견주어도 아쉽지 않을 만큼 친한 사이였으니까. 하지만 이내 내가 어리석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회귀 전 김 감독의 첫인상을 그새 까맣게 잊었구나.
회귀 전 처음 만났던 김 감독은 본인 작품에 대한 프라이드가 엄청난 사람이었다. 물론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으니 뭐라 할 말은 없다.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촬영이 시작되고 수 차례 충돌했었다.
나는 현장에서 그때그때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주저 않고 수정을 제안하는 편이었고, 김 감독은 최대한 대본대로 진행하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내 의견을 반영해 줄 의지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방금 저 장면을 시작으로 우리의 사이는 달라졌었다. 왜냐하면 저 장면을 촬영할 때, 왼쪽 얼굴보다 오른쪽으로 빛이 들어오는 것이 미묘한 차이지만 더 좋은 컷을 만들어 냈거든. 모니터링을 하던 김 감독은 내 의견에 반박을 하려다가도 수정된 연출이 더 좋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했다.
“형, 솔직히 말해 봐요. 그때 내 말대로 하기 싫었죠?”
“진짜 솔직히 말하면 자존심 상하기도 하고, 연기 처음이라는 애가 이런 생각을 어떻게 했지? 싶은 호기심도 생겼고, 저게 재능인가? 약간 무력감이 들기도 했지.”
“와, 천재 소리 듣는 감독한테 이런 말 들으니까 진짜 기분 좋다.”
“근데 저런 감정보다도 덕분에 영화 완성도가 더 높아지는 게 신났지.”
그 사건 후부터는 수정 제안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된 후에도 치열하게 서로 의견 공유를 하고, 논쟁하며 최상의 컷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최고의 듀오였지.
그래서 유현이 형과의 연기 연습에서도 대본대로 연기하지 않았던 거였다. 내 머릿속에는 이미 우리가 만들었던 최상의 신을 찍을 수 있는 방법이 들어 있었기에, 대본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기가 더 어려웠다.
한편으로는 정말 공정한 심사평에 안심했다. 혹여라도 둘이 나와 아는 사이라는 이유로 편애하거나, 알게 모르게 점수를 더 주는 일만은 없기를 바랐는데 역시 승부에는 냉정한 사람들이었다. 김 감독은 정 감독보다 더했다. 정 감독은 옆에서 그래도 자유연기는 오늘 참석한 참가자 중 제일 좋았다며 호평을 해 주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당연히 지석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이 말엔 살짝 울컥했다. 그렇게 세게 말할 필요는 없었잖아.
“아닙니다.”
“정 감독님 말대로 승빈 군 연기는 훌륭해요. 하지만 함께 일하기 좋고, 서로 합이 잘 맞는가도 중요한 평가 조건이라서…….”
이미 알고 있는 말을 빙빙 돌려 들으니 더 처참한 기분이었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수고 많으셨습니다! 결과는 정해지는 대로 소속사에 전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기실을 빠져나오는데 오재성이 어깨를 돌려세웠다.
“그렇게 도발을 하더니 꼴좋다?”
“이 작품에 네가 참여할 일은 없을 거니까 배우를 할 거면 제대로 처음부터 시작해, 오재성.”
“이 X끼가, 아까 전부터 보자 보자 하니까……!”
오재성의 주먹이 슬로 모션이 걸린 것처럼 눈앞으로 다가온다. 맞으면 꽤나 아프겠다는 생각 따위나 하고 있던 중에 누군가 오재성의 손목을 낚아챘다.
“왜 이렇게 안 나오나 했는데, 여기서 주먹이나 맞고 있었어?”
“뭐야, 이 X끼는?”
“선배한테 욕도 할 줄 알았어? 그동안 다 연기였나 보네. 제법이다? 드라마에서 봤을 땐 참담했던 거 같은데.”
먼저 오디션을 마친 유현이 형이었다. 싸움과는 연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지만, 타고난 피지컬이 오재성보다 뛰어나서 그 자체만으로도 위압감을 주었다.
“죄송합니다. 근데 이건…….”
“어차피 들킨 마당에 연기 그만하지?”
원래 무표정이 냉하고 무서운 사람이었지만, 지금 저 얼굴은 지금껏 본 얼굴 중 제일 차가웠다. 잠시 주춤하던 오재성이 게슴츠레 흘겨보며 나를 스쳐 갔다. 그리고 내 어깨를 두드리며 작게 속삭였다.
“아, 이게 상태창인가?”
“…뭐?”
“네가 어떻게 데뷔한 건지 늘 궁금했는데.”
이번엔 내 주먹이 나갈 뻔했지만, 오재성은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갖다 댔다. 조용히 하는 게 좋을 거라는 의미겠지. 명백한 도발이자, 경고에 소름이 돋았다. 유현이 형이 없었다면 당장 달려들어 어떻게 된 일인지 캐물었겠지만, 여기서 그랬다간 회귀한 사실이 탄로 날 것이다. 물론 말해도 형은 믿지 않겠지만.
“재수 없는 놈인 건 알았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신, 신경 쓰지 마세요.”
“설마 이전에도 손찌검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
“당연하죠. 그리고 제가 순순히 맞고만 있었겠어요?”
“하긴. 그나저나 너 아까 전부터… 뭐야, 괜찮아?”
점이 될 만큼 멀어진 오재성의 뒷모습을 보다가 절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참아 왔던 두통이 밀려왔다.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나를 유현이 형이 부축했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거예요. 괜찮아요.”
“괜찮긴! 기다려 봐. 매니저 형이랑 연락하고 올게.”
대기실 복도에 놓인 의자에 겨우 앉아서 숨을 골랐다.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몰려온다는 말처럼, 강도현과의 트러블로 코피를 쏟아 내고 체력이 말이 아닌 상황에서 이런 충격까지 받으니 혼미했다. 체력 포인트를 보니 거의 바닥을 찍고 있었다.
그동안 상태창이 안 보이던 오재성에게 갑자기 상태창이 보이기 시작한다니? 아무래도 오디션 이전에 있었던 회귀자 간의 충돌이 시스템 이상을 발생시킨 게 분명하다. 나 혼자 충격을 받은 게 아니고, 오재성도 바닥에 주저앉아 괴로워했던 이유였겠지.
상황은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제 상태창의 존재를 알아 버린 오재성은 상태창을 이용해서 발전할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이건 아주 사소한 걱정이다. 정말 큰 문제는 상태창이 어떤 미션을 내리느냐다. 어쩌면 나와 크리드에 위험이 될 만한 미션을 내릴지도 모른다.
‘정말 그렇게 되면 우리 멤버들은 어떻게 하지?’
유현이 형과의 통화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매니저 형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승빈아! 괜찮아?”
내가 오디션 막바지 순서여서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벌써 ‘문승빈 실신’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떴을 것이다. 유현이 형의 외투로 얼굴을 가리고 그대로 차로 향했다.
“둘 다 너무 수고, 응?”
“뭐야, 이 형 상태가 왜 이래?”
“뭐, 뭐야.”
차에 들어가니 멤버들이 있었다. 게다가 요란하게 꾸민 것까지 비현실적이었다.
“애들아, 일단 승빈이 좀 쉬어야겠다.”
“네, 일단 여기 누워.”
멤버들의 손에 잡혀 자리에 앉았다. 상태창은 어지럽게 발광하기 시작했다. 속이 메스꺼웠다. 심장이 한계치까지 두근대는 감각은 투마월 파이널 이후 처음이었다. 나를 걱정하는 멤버들의 목소리가 점점 하나로 합쳐지다가 웅웅거리는 이명 소리로 바뀌고 있었다.
숨은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고, 걱정스러워하는 눈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끈을 놓칠 것만 같다는 두려움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이토록 통제력을 잃은 적이 없었다.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감각과 함께 미친 듯이 기침이 나오기 시작했다.
“커억!”
“승빈아!”
“형!”
눈앞에 보인 것은 피로 가득한 손바닥이었다. 멤버들의 비명 소리와 패닉 상태인 매니저 형의 얼굴을 보면서도 반대로 내 몸은 나른해지고 있었다.
‘기어코 각혈을 하게 만드는구나…….’
* * *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 모르겠지만, 눈 떠 보니 보이는 건 병실 천장이었다. 떠오르는 게 없다. 피를 토하고, 그대로 기절을 한 거 같은데. 아, 중간중간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게 뭐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시야가 온전히 돌아올 때쯤 멤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빈이 일어났어!”
“승빈아!”
겨우 고개를 돌릴 힘만 있었다. 박재봉과 윤빈 형은 이미 눈가가 다 짓물릴 정도로 운 거 같았고, 강도현은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걸 보면 온 힘을 다해 눈물을 참는 듯 보였다. 선우 형은 나와 눈을 마주치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가 무너지듯 자리에 앉았다. 유현이 형은 간호사분께 말하고 오겠다며 침착하게 병실을 나섰다.
“지운이 형은?”
그때 손에 무언가 잡혔고, 내려다보니 지운이 형이 손을 붙든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어제 기절하고, 지금 일어난 거야.”
“아…….”
“지운이 형이 밤새 기도했어요. 그러다가 방금 잠들었고요.”
희미한 정신 속에 들었던 건 지운이 형의 기도 소리였구나. 차마 형을 깨울 수 없어서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강도현이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올려다보니 닭똥 같은 눈물을 쏟고 있었다.
“뭐, 뭐냐?”
“나 때문이냐? 내가 그렇게…….”
“아니야, 네 잘못 아니야. 이건 그냥 조금 피곤해서 그런 거뿐이야.”
“조금 피곤해서 피 토하는 미친 X끼가 어디 있어!?”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는 강도현을 어떻게 하면 달랠 수 있는지 아직 아픈 머리를 붙잡고 고민했다. 이런 일로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보기보다 마음이 여린 녀석이어서 혼자 오해하고 괴로워할 게 분명했다.
“내가 왜 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내가 설마 멤버들을 스트레스라고 생각하겠냐?”
“…….”
자유로운 게 한쪽 팔뿐이어서 그거로라도 강도현의 등을 토닥였다. 아무리 그래도 갓 스물 된 애가 눈앞에서 각혈하는 걸 봤으니 충격이 컸을 것이다.
“이 형님이 안아 줄 테니까 울지 마라, 동생아.”
“누, 누가 동생이냐? 그리고 허리 아프니까 좀 놓지?”
자세히 보니 정말 구부정하게 몸을 수그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선우 형도 긴장이 풀렸는지 힘 빠진 웃음소리를 내며 아예 의자 위로 녹아내리듯 누웠다. 울먹거리던 박재봉과 윤빈 형도 눈물을 닦았다. 그사이 유현이 형이 돌아왔다. 의사가 몇 가지 질문을 하며 상태를 확인하더니 의식이 돌아왔으니 정밀 검사를 받고 가라는 말과 함께 병실을 떠났다.
“너, 괜찮아?”
“당연하죠- 그 전에 얘네부터 어떻게 해 봐요. 울고불고 난리 났어. 완전 애들이라니까요?”
“너는 진짜…….”
소란 속에서 지운이 형이 드디어 일어났다. 형은 곧장 나를 안아 왔고, 멤버들도 누가 먼저랄 거 없이 안겨 왔다.
“다행이야.”
“너 못 일어날까 봐 무서웠어, 진짜로.”
그렇다고 더 우는 건 계획에 없었는데 말이지.
“나도. 사실 조금 무서웠어.”
그래도 말랑해진 분위기를 핑계로 나도 오랜만에 진심을 뱉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