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검고 찐득한 액체들이 화면 가득 흘러내리다가 빛과 함께 순식간에 걷어졌다. 그리고 도착한 곳에는 TV 속 투마월 시즌 2를 보고 있는 오재성이 있었다. 수첩에는 여러 연습생의 이름이 마구잡이로 적혀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각 연습생의 특징과 장, 단점을 정리해 둔 것이었다.
“기왕 회귀하는 거 투마이월드 전이었으면 바로 참가했을 텐데.”
지난 삶의 여파 때문일까. 이번에는 애초에 아이돌로 인지도를 얻고 나서 배우로 전향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메모장에는 별표 쳐진 연습생들이 더러 보였다. 그중에는 선우 형, 유현이 형, 윤빈 형도 있었다. 그리고 가장 큰 별 표시가 된 곳에는 지운이 형의 이름이 있었다.
[차지운]
-개인 연습생. 외모, 신체 조건 최상, 능력치 중상, 학폭 논란이 있었지만 해명, 코어 팬덤은 강하지만 대중성이 약함. 파이널까지는 가겠지만 데뷔는 어려워 보임.
-적합.
“애초에 작정하고 지운이 형과 엮일 생각이었구나.”
그런데 데뷔가 어려워 보이는 지운이 형이 왜 적합 표시가 된 것인지는 의문이었다. 그리고 그 의문은 투마이월드 시즌 2 파이널이 끝난 후로 시간이 전환되면서 해소됐다.
“예상대로 차지운이 데뷔에 실패했어. 이제 8위로 떨어진 차지운을 모셔 가려고 소속사들이 몰려오겠지. 분명 차지운의 마지막 단물을 빼먹으려는 소속사들일 거야. 그럼 아마도 신인 그룹 멤버를 뽑기 위한 오디션 공고를 이리저리 뿌리겠지.”
처음으로 마주한 오재성의 치밀함이었다. 이 시기는 VM에서 떨어진 내가 딱 티벡스 소속사의 신인 그룹 오디션을 발견한 때였다. 하지만 하나는 알고, 둘은 몰랐다. 이것이 사기에 가까운 오디션이자, 그룹 결성이었다는 것을.
“너희는 이제부터 티벡스야!”
“감사합니다!”
“드디어 데뷔한다!”
공간과 시간은 또 전환되어 티벡스 멤버가 확정된 날로 옮겨 갔다. 어차피 서로 얼굴 안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정해진 데뷔여서 각자 기뻐하기 바빴다.
“먼저 들어갈게, 너무 늦게까지 연습하진 말고.”
“네! 맞다. 형, 데뷔 축하해요. 형이랑 같이 데뷔해서 기뻐요.”
“고마워. 우리 잘해 보자.”
지운이 형과 마지막까지 연습실에서 남아 있던 오재성은 짐을 챙기고 나가는 지운이 형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속삭였다.
“네가 내 미래다, 차지운. 잘 부탁한다.”
오재성이 약간 흥분한 듯한 얼굴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저 곧 데뷔해요.]
메시지를 보내는 손가락에 망설임이 없다.
[배우는 포기한 거니?]
일순간 냉기가 흐르는 얼굴과 함께 손가락이 멈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결심한 듯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쓴다.
[요즘 누가 바보같이 배우부터 해요? 아이돌 했다가 배우 하는 게 더 쉬워요.]
[꼭 성공할게요.]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핸드폰을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이후의 답장은 확인할 수 없었다.
빠르게 티벡스 지난 활동이 눈앞에서 스쳐 지나갔다. 첫 데뷔의 순간, 첫 팬 사인회, 그나마 초반 지운이 형의 인기로 보냈던 몇 안 되는 영광의 순간들. 그리고 찾아온 현실. 점점 떨어지는 앨범 판매량과 대중들의 관심도에 팀이 휘청거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래서 이때 이렇게나 신경질적이었구나.”
당시의 오재성은 작은 일에도 불같이 화를 내고, 그룹의 미래에 비관적이었다. 오재성이 휘갈겨 쓴 일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대한민국을 흔들었던 프로그램 8위나 한 놈을 데리고도 이 정도 그룹밖에 못 만드는 무능한 소속사와, 어떻게 8위를 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새X에다가 도움도 안 되는 얼간이들과 한 그룹이라니. 분명 기회를 줬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형벌인 거 같다. 세상이 X발, 양심이 있으면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이제 오재성이 지운이 형의 작업물에 사사건건 태클을 걸고,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이해가 갔다.
“형, 진짜 우리… 조금만 더 잘하면 분명 뜰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재성아.”
“근데 그러려면 이런 건 너무 약해요. 더 강하고, 사람들한테 관심받을 수 있는 한 방이 필요하다고요. 형 노래에 우리 미래가 달린 거 알잖아. 응? 우리 벌써 3년 차잖아…….”
“미안해, 내가 더 잘해 볼게.”
아이돌 활동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내가 모르는 곳에서 지운이 형을 들들 볶았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본인의 절박함을 남의 목을 옥죄면서 해소한다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오늘 차지운이 만든 노래를 들었다. 이 정도로 할 수 있는 X끼가 왜 그동안은 제대로 하지 않았던 거냐고. 지난 앨범 때 이런 노래를 넣었으면 조금이라도 반응이 오지 않았을까? 이미 다 뒤져 버린 그룹에 심폐 소생술을 한다고 뭐가 나아질까? 차지운만 믿고 티벡스가 됐는데!]
“이게 다 저 새끼가 무능해서야…….”
오재성이 이를 갈며 다 쓴 일기 위에 연필로 난도질하듯 검은 선들을 북북 그었다. 오재성의 배우라는 꿈에 대한 간절함은 충분히 알았지만, 분노의 방향이 잘못되어도 한참은 잘못되었다.
아이돌 출신 배우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한 만큼 아이돌은 되기에도 쉽고, 성공하기도 쉬운 직업이라고 쉽게 폄하했을 것이다. 그러니 당시에 지운이 형이 전곡을 프로듀싱하고, 나와 안무와 앨범 콘셉트, 심지어 세계관도 만들었다는 것을 몰랐겠지. 저렇게 속 편한 원망만 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스러운 것이 있었다. 만약 회귀를 했다면 분명 아이돌로서의 성공을 위한 상태창이 있었을 텐데, 오재성은 상태창을 활용한다거나, 아이돌로서의 능력치가 좋아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어쩌면 상태창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때 머리에 스쳐 가는 생각 하나가 떠올랐고, 탄식이 나왔다.
“그래, 만약 애초에 배우가 되기 위해 준비했다면 상태창이 보였을 텐데…….”
나에게는 상태창이 보이고, 오재성에게는 나타나지 않았던 이유가 이제 명확해졌다. 왜 몇 번의 회귀를 거치고 나서도 발전이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이해가 됐다.
화면은 또 전환되어 내가 어쩌면 그날로 신인상을 수상하던 날로 향했다. 좁은 숙소에서 지운이 형과 TV 속 나를 보던 오재성은 신경질적으로 전원을 끄고 방으로 들어갔다. 다시 TV를 켜려던 지운이 형에게 윽박을 지르는 모습에 일말의 동정심도 사라졌다.
“X발 진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부들거리는 주먹이 향해야 할 곳은 나와 지운이 형이 아니라, 배우라는 꿈에 다시 한번 정면으로 도전하지 못한 자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보여 준 장면은 문자 메시지였다.
[새로 작품 들어가게 됐어요.]
[근데 다 부숴 버리고 싶어요.]
황급히 지운다.
곧 지운이 형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형! 우리 내일 진짜 잘해 봐요!]
오재성의 두 번째 엔딩이었다.
“이제 드디어 이번 세상인가?”
눈을 뜨고 날짜를 확인하던 오재성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러고는 또다시 계획을 세웠다. 이번에는 절대 망할 일이 없도록 대기업인 VM 오디션을 본 거다. 당시 강도현과 김병대가 투마이월드 시즌 2에 한창 출연 중이었고, 차기 그룹을 위해 새로운 연습생을 뽑던 시기였다. VM 창사 이래 가장 연습생으로 들어가기 쉬운 시기였는데 운도 좋은 녀석이었다. TV로 투마이월드를 시청하던 오재성이 비릿하게 웃으며 혼잣말했다.
“이번 생애엔 둘이 투마이월드를 같이 나오네?”
“이제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그리고 둘이 한 번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도 재밌을 거고.”
지운이 형의 학폭 논란과 나의 여러 논란을 보면서 오재성은 누구보다 기뻐했다. 지난 생은 배우라는 꿈에 집중하지 못해서였다면, 이번 생은 꿈보다도 복수와 파멸을 바란 생인 듯했다. 그래서 확신했다. 이번 생 역시 네 뜻대로 되진 않을 것이라고.
“문승빈이랑 차지운은 지금 모르는 사이 아닌가? 근데 왜 저렇게 위화감이 없지?”
아마 오재성은 이때부터 나도 회귀자라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설마 둘이 같이 데뷔하겠어?”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우리 둘이 함께 데뷔하는 날, 기가 찬 듯 헛웃음 짓는 오재성의 얼굴이 보였다. 고소한 마음에 입꼬리가 잠시 올라갔다. 이제 왜 지운이 형을 그렇게까지 미워했는지, 나를 망치려 들었는지 전부 이해가 됐다. 그렇다고 그 방향 잃은 분노를 인정할 수는 없지만.
기나긴 회상을 끝으로 드디어 현실로 돌아왔다. 세 번의 생애를 지나왔는데, 현실에서는 10초도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정신력을 집중했다. 여기서 코피를 흘리거나, 기절이라도 하면 지석에 대한 도전도 하지 못한 채 끝날 것이다. 멱살을 쥐고 금방이라도 주먹을 내리꽂을 듯한 오재성을 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너, 정말, 배우가 하고 싶었구나……?”
“뭐라고?”
“근데 재성아, 제발 이번 생은 똑바로 살자, 제발…….”
“아까부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빙빙 돌아가지 말고, 정면 승부를 해. 다음 생이 또 있다면?”
“이 X친놈이……!”
오재성의 주먹이 머리 위로 올라온 순간, 대기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멱살을 내려놓은 오재성이 순식간에 표정을 바꿨다. 마치 친한 사람의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듯 거짓 연기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선배님, 옷에 주름이 많네요? 아, 제가 옷 정리를 좀 해 드리느라…….”
“오재성, 문승빈 참가자님. 들어오세요.”
드디어 오디션이 시작됐다. 서 있는 것이 기적인 상태지만 속으로 몇 번이고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내 상태를 알아본 정 감독이 걱정 어린 눈과 마주쳤지만 고개를 저으며, 웃어 보였다. 조금의 오해라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오재성 참가자 먼저 연기 볼게요.”
“네!”
나름 열심히 준비를 했는지 확실히 이전보다는 자연스러운 연기를 해냈다. 정 감독 역시 이전에 ‘파아란’을 함께 작업했을 때보다 발전한 모습을 본 거 같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김 감독은 그보다 더 솔직했다.
“주인공을 할 만큼의 연기력은 아니었어요. 그건 알죠?”
“…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연기를 마친 오재성의 얼굴엔 기쁨과 아쉬움이 공존했다. 아무래도 상반된 평가를 받아서겠지. 드디어 내 차례가 오고, 먼저 준비한 자유 연기를 했다. 정 감독은 믿고 있었다는 듯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리고 랜덤 지정 연기가 시작되었고,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마음으로 정해진 신을 전달받았다.
[드디어 불행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난 지석, 아침 해가 뜨면서 불빛이 지석의 왼쪽 얼굴로 쏟아진다.]
[지석: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이게 정말 끝일까요? 끝이어야 하는데…….]
집중력을 잃지 않고 최대한 지문에 따라 연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직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과 함께 다시 회귀 전 현장 속 나의 몸이 기억하는 대로 움직이고 말았다.
한참 내 연기를 보다가 대본으로 눈을 옮기는 김 감독을 보며 직감했다. 아, 지석이를 놓쳤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