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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290화 (290/346)

290화

오디션을 보러 가는 나와 유현이 형을 배웅하기 위해 일찍부터 멤버들이 모두 모였다. 매일 아침은 나, 유현이 형, 지운이 형이 도맡았는데 웬일로 나머지 네 명도 일찍 일어났다. 다행히 요리는 지운이 형과 윤빈 형이 한 듯했다.

“우리가 요리하면 안 좋아할 거 같아서 그냥 응원하기로 했어.”

“맞아요.”

드디어 요리에 대한 열망을 버렸다는 점에서 앞으로 저 둘의 요리로 고통받을 일은 없겠구나, 내심 안심했다. 하지만 뒤이어 펼쳐진 눈앞의 장면에 다시 이마를 짚었다.

“문승빈!”

“정유현! 형…….”

“화이팅!”

언제 포즈까지 정한 건지 한쪽 팔끼리 교차해서 엑스자를 만드는 두 사람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유치하게 그게 뭐냐?”

“선우 형은 아무것도 준비 안 했잖아요-”

“나는 둘째로서! 진중한 조언과 덕담을 해 주려고 했지.”

‘저 형이 진중함?’

아니나 다를까 어디서 들었을 법한 명언집 속 명언을 그대로 외워 온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허술함의 완성은 박재봉, 강도현의 반응이었다. 둘 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놀란 얼굴이었다.

“…대박, 형이 생각해 낸 말이에요?”

“뭐야, 형. 이거 캐붕이에요. 안 어울려!”

‘어휴 저 바보 삼 형제…….’

명언임을 알아챈 지운이 형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웃음을 참고 있었고, 유현이 형은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둘 다 잘하고 와요!”

“긴장하지 말고 잘하고 와.”

“둘이서 주연 자리 차지하고 오라고!”

아침부터 선수 응원단처럼 요란하게 응원하는 모습이 싫지만은 않았다. 윤빈 형이 미국 고등학교 당시 어깨 너머로 배웠던 치어리딩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왜… 왜 다 하는 건데?”

“어제 윤빈 형이 속성으로 가르쳐 줬어요! 완전 파이팅 넘칠 거라고 해서.”

믿었던 지운이 형마저도 이제 이런 이벤트에서 빠지지 않는다. 언제 저렇게 스며든 걸까 싶지만, 진심으로 즐거워하니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오디션장으로 향하는 동안 숙소에서는 없었던 잡념들이 천천히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이래서 멤버들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럿이 함께였다면 이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을 텐데. 그런 나를 알아챈 것인지, 유현이 형이 말을 걸었다.

“어제 잠은 잘 잤어?”

“그럭저럭요.”

“엊그제 나랑 연기 연습하고 조금 다운된 거 같았는데.”

“에이, 그냥 긴장되니까 그런 거죠~”

일부러 과장해서 형의 말을 부정했다. 역시 눈치가 빠른 형이다. 형의 말대로 엊그제 연기 연습 이후 머릿속이 복잡해졌으니까. 하지만 형의 잘못은 아니다. 형의 연기 스타일이 나와 확연히 달랐고, 어쩌면 지금 지석을 연기하는 데 있어서는 그 방식이 더 적합했을 거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너희 둘이 같은 작품 들어가면 정말 좋을 거 같아.”

“맞아요.”

처음에는 왜 형이 나와 같은 작품에 오디션을 보게 되었을까 의문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소속사 입장에서는 먼저 연기했던 나와 함께라면, 이제 막 연기를 시작하는 형을 대중들에게 더 위화감 없이 소개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짐작해 본다.

오디션장에 도착하니 예상대로 엄청난 숫자의 참가자들이 모여 있었다. 며칠에 나눠서 오디션을 본다고 들었는데, 눈으로 가늠해도 수백 명은 넘는 인파였다. 나와 유현이 형은 서로 다른 시간대에 배정이 되어 입구에서 헤어지게 되었다.

“준비 잘해요.”

“너도. 긴장하지 말고.”

“알잖아요, 저 이런 일에 긴장 안 하는 거.”

유현이 형은 피식 웃으며 손 인사를 하고 떠났다. 대기열에서 기다리다 보니 정말 다양한 배우들을 마주쳤다. 신예 배우부터 이미 어느 정도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배우, 아이돌 그리고 이름도 얼굴도 잘 모르는 참가자들도 많았다.

그중에는 지금 가장 상승 가도를 달리고 있는 배우 강대섭도 있었다.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에 모두 섣불리 그의 곁에 다가가지 못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나 역시 굳이 아는 척을 하거나, 인사를 할 입장은 아니었기 때문에 대본에만 집중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먼저 나에게 인사를 했다. 모자에 마스크까지 써서 아무도 못 알아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문승빈 맞죠?”

“아… 안녕하세요, 강대섭 선배님.”

“파아란에서 연기 잘 봤어요.”

“감사합니다! 저도 선배님 작품 다 챙겨 볼 정도로 팬입니다.”

“내 작품을요? ‘도시의 빛’이랑 ‘당신이 눈을 감은 순간’ 봤나? 하하.”

“그 둘은 당연히 봤죠. 하지만 전 선배님 영화 데뷔작인 ‘푸른 밤’을 더 좋아합니다.”

이전에는 당연히 기껏해야 대표작 봐 놓고 팬이라고 하는 얼뜨기일 거라고 생각한 얼굴이었는데, 대표작이 아닌 데뷔작을 좋아한다고 하니 강대섭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강대섭의 필모그래피를 모두 찾아봤던 이유는, 그가 회귀 전 나와 굉장히 비슷한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5년 가까이 되는 무명 생활을 가졌지만, 지난해 ‘도시의 빛’이라는 작품에서 ‘신스틸러’라는 극찬과 함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올해 초 드라마 ‘당신이 눈을 감은 순간’에서 남자 주인공을 맡으면서 업계 블루칩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와 비슷한 삶을 살아온 그의 연기에 관심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절차였다.

“왜 푸른 밤이 더 좋았지?”

“뭔가… 정제되지 않았지만, 가장 편한 마음으로 촬영하셨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정말 정교하고 완벽에 가까운 연기를 하고 계시지만 그때는 신인이셨잖아요. 물론 이전부터 연극을 오래 하셔서 연기력은 탄탄했지만, 첫 영화 데뷔였으니까요. 하지만 그 정돈되지 않은 연기가 주인공 ‘종훈’에게는 더 잘 어울렸던 거 같습니다.”

“듣던 대로 평범한 친구는 아니네.”

“네?”

“최 피디님한테 얘기 자주 들었어요. 어린 친구인데 비범하다고.”

‘최 피디가 여기서 왜 나와……?’

“아, 예전에 최 피디님이 연출 참여했던 연극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최 피디님이 연극 연출도 하셨어요?”

“피디님이 그 얘기는 안 했었나 보네.”

“네.”

“아, 내가 시간 빼앗은 거 같네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먼저 말 걸어 주셔서 영광이었습니다.”

“준비 잘하고 좋은 결과 있길 바라요.”

“감사합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인상 깊었다. 회귀 전에는 ‘당신이 눈을 감은 순간’ 이후 이렇다 할 흥행 작품을 내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서서히 인기를 잃었던 배우였기 때문에 오늘의 만남이 더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정말 좋은 배우인데 이번 생에는 잘 풀렸으면 좋겠네.’

오랜 대기 시간 끝에 드디어 직전 순번까지 오게 됐다. 스태프가 안내하는 대기실로 향했고, 문을 열자마자 마주친 얼굴에 절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타임에는 아이돌 출신분들이 많네요~?”

텅 빈 대기실에 앉아 있는 한 사람. 오재성이었다. 오재성 역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두어 번 비볐다. 이내 살기가 느껴지도록 노려보더니, 안내 스태프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손에 든 대본을 탁 소리가 나게 내리꽂았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분노였다.

“이번에도냐?”

“뭐가 이번에도… 윽!”

그동안 오재성을 봐도 가벼운 두통으로 그쳤던 고통이 갑자기 백 배, 아니 만 배는 되어 나를 강타했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통증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깨질 거 같은 머리와 귓속에는 오재성의 짐승과도 같은 울부짖음이 둥둥 울리고 있었다.

“X발 새X야, 두 번이면 족하잖아!”

희미해지는 시야 속 대기실은 또다시 어지럽게 엉클어지고 있었다. 또 시작이구나.

‘왜 하필 지금!’

다른 점은 오재성 저놈도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는 것이다. 왜 저러고 있는 건지 의문이 생기기도 전에 익숙한 흐름 속에 내 정신과 몸은 전 소속사 건물로 이동해 있었다.

그리고 회의실에서 오재성과 이사님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회귀 전 기억인 듯했다. 못마땅한 듯 퉁명한 말투의 오재성과 그런 오재성의 심기를 건드릴까 노심초사하는 이사님의 모습이었다.

“이제 우리가 티벡스를 더 유지하기도 힘들고…….”

“독립 영화요?”

“미안하다. 우리가 상업 영화까지 꽂아 줄 능력은 안 되는 거 너도 알잖니. 그렇지만, 꽤 주목받는 감독이야. 여기서 잘 보이면 다른 감독들 눈에 들 수도 있고.”

“거의 내정된 역할이라는 거죠?”

“맞아. 이미 감독이랑 얘기 다 끝났고, 넌 가서 대충 장단만 맞추고 오면 돼.”

“제목도 ‘어쩌면 그날’? X나 구리네…….”

생각지도 못한 제목에 잠시 충격을 받았다. 어쩌면 그날의 캐스팅 과정에서 이런 계약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사는 나와 오재성 둘에게 ‘어쩌면 그날’ 오디션을 권했으니까.

애초에 나는 들러리였던 거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내가 지석 역할을 기대 이상으로 해낸 것이고, 소속사에서는 어차피 둘 중 하나만 걸리면 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내가 캐스팅될 수 있었던 거다.

화면은 이성을 잃은 오재성과 이사님의 대화로 바뀐다.

“애초에 이런 말은 없었잖아요!”

“문승빈이 아니면 그냥 영화를 안 만들겠다고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니? 그룹 중에 하나라도 살아야 너희도 살길이 있지.”

“살길이 있어요? 정신 차리세요, 이사님. 티벡스는 망했어요, 가망이 없다고요!”

“다른 역할이라도…….”

“지금 장난해요? 문승빈이 주연인데 내가 조연 따위로 나와야 한다고요?”

“미안하다, 재성아. 그래도 이번에 어렵게 웹 드라마 자리 하나 잡았다. 그거는 무조건 네가 할 거야. 어차피 문승빈은 저 영화 하게 두고…….”

“미래가 있는 감독이라면서요!”

“그, 그거야 네가 작은 영화라고 안 한다고 할까 봐 그런 거고……!”

다시 화면은 어쩌면 그날로 대박이 난 후 태도가 바뀐 이사님과 나를 지켜보는 오재성의 뒷모습을 보여 줬다.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재성이 꽤 큰 비중으로 들어간 웹 드라마는 주연 배우의 병크와 함께 존재감 없이 조기 종영 하게 되었으니까.

소리가 울리도록 비상구 벽을 주먹으로 내리친 오재성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절규했다.

“문승빈, 저 쥐새X 때문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차지운 하나 믿고 티벡스 들어온 건데, 무능한 놈들 때문에 망돌로 몇 년을 허비했는데… 이제 좀 배우로 시작하나 싶으니까 문승빈이……!”

차지운 하나 믿고 티벡스에 들어왔는데, 배우로 시작하려고 하니 내가 막았다? 왜 오재성이 지운이 형을 그렇게도 미워하고, 나를 파멸시키려고 했는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면이 또다시 일그러지면서 뜻밖의 장소로 이동했다.

“재성아, 미안하다. 이번에 캐스팅 취소됐다. 제작사 측에서 아이돌 출신을 뽑아야 화제성도 챙기고…….”

“이번에도 아이돌이네요. 벌써 몇 번째죠?”

“하지만 다음엔 꼭 좋은 작품 할 수 있을 거야.”

[죄송해요. 이번에도]

황급히 지운다.

[저 더 좋은 작품 들어와서 그거 하려고요.]

오재성이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낀다. 처음으로 저 녀석에게서 연민을 느낄 무렵 화면을 또다시 빠르게 전환된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오재성!”

나는 곧장 오재성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차들이 오가고 있었지만, 어차피 내 몸을 통과하는 것에 불과했다.

“다음 생에는 이딴 무명 배우 말고… 제대로 된 배우로 살아 보자. 기왕이면 아이돌 배우?”

“미친놈아!”

“다음 생이라는 게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오재성은 깊은 암흑 속으로 추락했다.

그게 바로 오재성의 첫 번째 엔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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