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어쩌면 그날 오디션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오디션을 준비하는 건 나 혼자가 아니었다.
“형도 오디션 본다고요?”
“응. 작은 역할이라도 천천히 경험 쌓고 싶어서.”
“형이라면 분명 좋은 역할 잡아 낼 거예요.”
형이 연기에 흥미가 있다는 건 진작 예상했다. ‘파아란’을 준비하면서 연기 메이트로 연습을 도와줬을 때 어렴풋이 유현이 형의 눈이 빛나고 있는 걸 알아봤거든. 하지만 형과 같은 작품의 오디션을 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형 나온다고 절대 양보하거나 그러지 않을 거예요.”
“당연하지.”
우리 둘이 같은 작품의 오디션을 본다는 소식에 멤버들도 한동안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틈만 나면 서로 연기를 봐주었다. 역시 원소속사에서 연기 수업을 받은 효과가 있었나 보다. 유현이 형은 첫 연기임에도 어색함 없이 해냈다. 오히려 신인 특유의 풋풋함이 남아 있어서 많은 캐스팅 디렉터들로부터 러브 콜을 받게 될 모습이 절로 상상됐다.
그동안 지석 캐릭터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과 연구를 했다. 이전에는 밑바닥으로 떨어진 지석의 처절함과 암울함을 부각했다면, 이번에는 그 시련을 극복하고 일어서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강조하기로 했다. 회귀 후의 지석은 이전보다 조금은 희망적인 캐릭터로 해석했다.
그 당시에는 작은 규모의 독립 영화여서 유명 배우들이 오디션에 참가하거나, 캐스팅될 일이 없었음에도 지금처럼 깐깐한 기준이 적용됐다. 그렇게 어렵게 얻은 기회였기 때문에, 대본이 나오고 촬영 전까지 내 대사를 전부 외워 갔다. 이 감독도 처음에는 나의 연기력이나 가능성에 대해 반신반의했지만, 내 집념을 보고 크게 만족했었다.
그때의 기억을 반추하며 떠오르는 대사와 지문을 몇 가지 정리했다. 어찌 보면 족보를 가지고 시험장에 들어가는 것과 같기에,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스스로 자존심이 상할 일이었다.
“살아야죠, 그래도 살아야죠. 세상이 나 하나 없다고 멈추지는 않겠지만, 내 우주가 사라지는 거니까. 그리고, 아주 적지만 저를 응원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나는 포기하면 안 돼요. 내 우주 속의 수많은 행성, 별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살아남을 겁니다…….”
빼곡한 대본 속에서도 여전히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는 대사다. 지석 캐릭터의 캐스팅을 확정 짓고 대본을 처음 보던 날 펑펑 울었던 대사다. 이 대사만큼은 회귀 전의 내가 아니더라도 잘 해낼 자신이 있다. 그때보다 나를 응원하는 사람이 많아졌을지언정, 내가 그들을 위해 아이돌이라는 꿈을 이어 가고 있는 것은 똑같기 때문이다.
연기를 하면서 회귀 전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 때는 그때를 잊고 지금의 나만을 향해 달려가야 하고, 어떨 때는 과거를 불러내야 한다는 것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때도, 지금도 내가 문승빈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왜 유독 지석 캐릭터를 연기할 때만 이렇게 망설여지는 것일까. 그 이유를 이미 너무 잘 알지만, 자꾸만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됐다.
원래의 목적은 나의 회귀가 ‘어쩌면 그날’의 변수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내 인생을 바꿔 준 소중한 작품인 만큼 회귀 전보다 더 좋은 여건에서, 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길 바란 것도 있었고. 하지만 점점 욕심이 생겼다. 처음에는 나보다 더 지석 캐릭터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응원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이 참 간사하게도, 내가 아닌 지석 캐릭터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벽에 막힌 기분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또다시 뛰어넘을 벽이 생겼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자유 연기는 가장 좋아하는 영화의 주인공 연기를 준비했다. 부상을 입은 축구 선수였던 주인공이 숱한 방황 끝에 다시 꿈을 향해 달려가는, 지극히 단순한 스토리였지만 캐릭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완벽한 실력의 선수지만 아직 미성숙한 내면을 가진 주인공이었다.
“우와. 자유 연기로 ‘볼 컨트롤’ 서대호 연기 준비하는 거예요?”
“응. 너도 이거 봤어?”
“그럼요!”
“옛날 영화여서 모를 줄 알았는데.”
“제가 또 영화에 관심이 있거든요-”
박재봉이 영화에 관심이 있는 것은 의외였다. 평소 책이나 드라마를 챙겨 보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영화 역시 관심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덕분에 이번에는 유현이 형이 아닌 재봉이와 연기 연습을 했다. 적어도 이 영화와 주인공에 대해서는 가장 이해도가 높은 사람이었다.
[나레이션: 경기장 속에서 나는 자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였다. 쏟아지는 관중들의 관심과 환호 속에서 나는 점점 몸집을 키워 나갔다.]
“와… 형 연기 하는 걸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직접 보니까 느낌 되게 다른데요?”
“그래? 조금 아쉬운 부분은 없었어?”
“음… 서대호 선수였다면 더 드라마틱한 감정 표현을 할 거 같아요. 지금 장면이 역전 골을 터트리고 나오는 거잖아요. 기쁨을 감추지 못했을걸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 의견을 반영하고 해당 나레이션에서 평소보다 더 큰 리액션을 추가했다.
“완전 좋은데요?”
“그래? 다행이다.”
“형 연기하는 거, 볼 때마다 낯선데… 뭔가, 멋져요.”
낯간지러운 말을 잘도 하는 녀석이다.
“연기를 배운 적 없었는데도 어색함이 없는 게 신기해요. 되게 편해 보여.”
시간이 지나도 연기를 공부하고, 잘하기 위해 노력했던 열정은 사라지지 않는구나. 내심 뿌듯했다.
“선우 형이랑 라디오 디제이 한다고 했었지?”
“네! 지금 하는 디제이분 입대하고 나면 곧 후임으로 들어갈 예정이래요.”
“그래. 잘해 봐, 작가님이랑 피디님하고 잘 지내면 나중에 다른 방면으로도 기회가 많을 거야.”
“지난주에 미팅했었거든요? 근데 저 엄청 마음에 들어 하시는 거 같았어요! 처음에는 제가 너무 어리기도 하고, 귀여운 이미지가 강해서 잘 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으셨대요.”
“근데 어떻게 했어?”
“상황극 하는 대본을 주셨거든요? 제가 또 이런 거 시키면 잘하잖아요~ 작가님하고 피디님 눈빛이 싹 바뀌던데요? 특히 피디님은 엄청 나이가 많으셨는데 회의 끝날 때쯤 되니까 저를 거의 손자 보듯이 보시더라고요.”
특유의 친화력과 연장자들을 대하는 방식이 이번에도 좋은 시너지를 발휘했구나. 부쩍 자란 키만큼이나 어른스러워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나중에 게스트로 형들 나오면 엄청 재밌을 거 같아요.”
“맞아. 근데 뭔가 기분 이상할 거 같다.”
“베테랑 디제이로서 형들을 잘 이끌어 가 줄게요.”
“그때쯤 되면 벌써 베테랑인 거야?”
“당연하죠~”
자신감에 가득한 얼굴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코끝을 아프지 않게 쥐고 흔들자 엄살을 부린다.
“투마월 때도 맨날 이러더니- 이제 제가 형보다 키도 커져서 서서는 못 할걸요?”
“까불고 있어-”
“악, 코 떨어져요!”
이렇게 하나둘 겸업 준비를 착실히 하는 모습을 보며 내심 안심이 됐다. 지운이 형과 윤빈 형은 작사 작곡 활동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이렇게 각자 자리를 잘 잡아 두면 나중에 활동이 끝나고 나서도…….’
“형?”
“아, 미안.”
‘다시 모일 날이 오겠지.’
* * *
유현이 형과의 연기 연습은 서로에게 좋은 시너지를 주었다. 역시 이 형은 연기도 곧잘 해낸다. 요즘 들어 새삼 멤버들의 능력치에 감탄하는 일이 많아진다. 투마월 때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랜 시간 활동하고 나도 비슷한 실력이 되면서 무뎌지게 된 거겠지.
유현이 형의 연기를 보는 건 나에게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평소 감정 기복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일정함을 유지하는 형이기 때문에 다양한 감정 연기를 해내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형, 이 장면도 한번 해 봐요.”
“이건 너무… 망나니 아니야?”
“아직 어쩌면 그날이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는데 다양하게 준비해 보는 거죠-”
그렇다 보니 형에게 연기 연습을 핑계로 여러 가지 캐릭터 연기를 미션으로 주었다. 이전에도 코믹 연기, 눈물 연기, 로맨스 연기 다 시켜 봤는데 그때마다 망설이다가도 척척 해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나 이변은 없었다. 저런 멀끔한 얼굴과 성격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개망나니 연기도 위화감 없이 해냈다.
“와… 형, 제가 형 알고 지낸 시간보다 요 며칠 동안 더 많은 감정 표현을 본 거 같아요.”
“…….”
“비법이 뭐예요?”
“비법까지야… 그냥 주어진 대본대로 행동하면 되는 거 아닌가?”
MBTI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하등의 쓸모 없다지만, 이 형은 분명 T가 100퍼센트일 것이다.
“그래도 익숙한 감정이어야 더 쉽게 되지 않을까요?”
“어차피 난 그 캐릭터 자체가 아닌데, 내 감정이나 경험을 밀어 넣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아…….”
“짧은 순간이지만 이 캐릭터가 어떤 성격이고,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나름대로 해석해 보는 거지.”
“그렇게 빨리 파악이 돼요?”
“방금 네가 보여 준 저 망나니 같은 캐릭터, 소중한 사람을 잃고 반항심에 저런 성격이 된 거라는 설정이 들어가면 더 좋은 캐릭터가 될 거 같아서 연기할 때도 마냥 미워 보이지 않게 하려고 했어.”
“와…….”
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에서 잠시 충격을 받았다. 말이 없어진 나를 힐끔 보던 유현이 형이 대본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네 차례야. 이 대사 한번 해 봐.”
“…네.”
형이 가져온 대사는 ‘어쩌면 그날’의 한 장면이었다. 지석이 믿었던 친구로부터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의 장면이었다. 회귀 전 촬영 현장에서도 가장 몰입한 장면이어서 대본은 굳이 찾아볼 필요도 없이 바로 연기에 들어갔다. 정식 촬영은 아니지만 몰입해서 연기를 마쳤다. 그런데 유현이 형은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왜요……? 너무 오버했나?”
“아니? 연기는 정말 잘했어. 근데 대본이랑 다른데……?”
“네?”
“너는 지금 당황스러워하면서 연기했잖아. 근데 여기 지문엔 화를 낸다고 나와 있어. 그리고 대사도 다르고.”
“그럴 리가…….”
대본을 유심히 보니 유현이 형의 말이 맞았다. 익숙하지만, 내 기억과는 다른 대사였다.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 당황스러웠다.
‘이게 왜 바뀌었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찾았다. 이건 돌발 상황이 아니었다. 돌발 행동을 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왜냐하면 이 장면은 현장에서 김 감독과 상의를 해서 바꾼 장면이다. 사기를 당한 지석 캐릭터가 곧바로 분노의 감정을 가지는 것은 부자연스럽다고 의견을 제시했었다. 굳게 믿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믿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한 당황스러움이 먼저 나와야 할 감정이라고 김 감독과 현장에서 꽤 오랜 시간 동안 실랑이하다가 바꿨었지.
아, 그동안 나를 감싸고 있던 찝찝함의 원인을 알아차렸다. 나는 완성된 ‘어쩌면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꾸만 그때의 나를 기준으로 지석 캐릭터를 해석했던 거였다. 당장 3일밖에 남지 않은 기간 동안 내가 이전의 지석을 모두 지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리고 오디션 전날까지도 나는 끝내 지석이었던 기억을 놓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