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강도현의 입장에서는 머리에 찬물을 끼얹는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원상태가 되었다. 아니, 더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다음을 생각해야 해?”
“냉정하게 생각해. 우리 이제 2년 반밖에 남지 않았어. 크리드가 아니게 되면 넌 VM으로 돌아갈 거고, 남은 아이돌 생활은 포커스 멤버로 보내야 한다고.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벌써부터 스스로 팀과 소속사 내의 입지를 작게 만들면 앞으로 연예계 생활 어떻게 할 건데? 크리드가 네 커리어의 전부가 아니잖아.”
말을 하는 나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연예계에서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 한 번은 해야 할 말이었다.
강도현은 부들거리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리고 잔뜩 상처받은 눈으로 물었다.
“넌 뭐가 그렇게 현실적이냐?”
“…….”
“누가 보면 너만 연예계 생활 한 10년은 한 줄 알겠어.”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
“모든 일에 플랜 비가 필요한 건 아니잖아.”
“그럼 미래는 생각 안 하고 지금 당장의 일만 생각한다고?”
“미래가 어떻게 될 줄 알고? 만약에 크리드가 끝나고 포커스로 가서 미움받는다고 해도 나는 매 순간 거짓이나 후회 없이 살고 싶어.”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회귀 전에도 큰 시련 없이 타고난 재능과 실력으로 성공적인 아이돌 생활을 했으니 플랜 비를 세울 필요가 없었겠지. 내 삶은 언제나 플랜 비부터 제트까지 차선책으로 가득했는데.
강도현에 대한 열등감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꽤 오랜 시간 잊고 살았던 감정이었다.
결국 내가 먼저 자리를 피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얼굴 보고 더 있다가는 분명 날것의 마음을 표출할 것이 분명했다. 누가 맞고 틀리고를 따지기 위한 대화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강도현은 늘 그랬듯 자기답게 반응했을 뿐이다. 같은 팀이 되고, 상태창 스텟이 비슷해졌다고 한들 잊고 있는 게 있었다. 우리는 출발선이 달랐다는 것을. 같은 멤버이자 친구를 두고 이런 자격지심을 느껴야 하는 것이 괴로웠다.
숙소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냉전 상태였다. 평소 시끄러웠던 강도현이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입 한 번 열지 않자, 모두 무언가 잘못됨을 감지한 듯했다.
[선우 형: 강도현 무슨 일 있음?]
[글쎄요.]
[선우 형: 네가 왜 몰라?]
[제가 어떻게 다 알아요?]
[선우 형: 그야 넌 다 아니까……?]
머리가 복잡해져서 더 이상 답변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잠은 오지 않았다.
찬물로 세수를 하며 거울 너머 내 얼굴을 한참 보았다. 회귀 전 내 모습에 얽매이지 말자고 셀 수 없이 많은 시간 다짐했지만, 아직도 어렵다. 그러다 문득, 그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곳에서의 시간은 크리드로 보내는 5년이 전부라면?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상태창이 섬광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절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고, 급기야 헛구역질까지 나왔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아니었다면 멤버 중 한 명이 헛구역질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망할 상태창은 좀처럼 진정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원하는 걸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저리 지랄발광을 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그리고 익숙한 감각. 또 제멋대로 시공간이 뒤틀린다.
‘내가 더 알아야 할 얘기가 남아 있던 거냐고…….’
서서히 몸에 힘이 풀어지고 저항할 겨를도 없었다. 도착한 곳은 VM 연습실이었다. 여러 장면이 빠르게 흩어 지나갔다. 밤새 연습하던 나를 창문 너머로 지켜보던 강도현, 함께 연습하며 부족했던 춤 실력을 도와주던 강도현. 여기까지는 큰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뜻밖의 장면은 그다음이었다.
“도현이 너는 타고난 것도 많고, 이번에 데뷔는 거의 확정이지.”
“에이, 저도 더 열심히 연습해야죠.”
“뭐, 같이 데뷔하고 싶거나 좀 괜찮다 싶은 애들 있어? 이번 데뷔조 만들어지면 네가 리더를 할 텐데, 멤버 구성에 도움이 될 만한 애들이 있나 싶어서.”
“승빈이요.”
문어대가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나 역시 의외의 답변에 놀랐다.
“네. 승빈이가 제일 먼저 나와서 제일 늦게 연습 끝내요.”
“그런데 발전이 없잖아.”
“아니요? 한순간 포텐이 터질 가능성이 많은 애예요. 그리고 승빈이는 신중해요. 같은 무대를 준비해도 플랜 비를 준비하는 건 승빈이밖에…….”
“하지만 그렇게 차선책만 준비하는 놈은 한 방이 없어. 하나도 제대로 못 해낸다고 해야 하나?”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난번 월말 평가에서 저희 팀만 갑자기 바뀐 지정곡에도 당황하지 않고 해냈던 건 승빈이가 준비하자고 설득한 플랜 비 덕분이었어요. 그래서 팀에는 꼭 승빈이 같은…….”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갑자기 대표님이 부르시네.”
“…네.”
‘이래 버리면 마음껏 미워도 못 하잖아.’
난 언제나 강도현의 재능을, 자신감을 동경했다. 그런데 그런 놈이 나를 챙기기까지 했다니. 씁쓸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문어대가리에 대한 분노와 나에게는 상냥하지 않았던 운명에 대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럼에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만약 VM에서 데뷔했다면 지운이 형을 만나지 못했으니까. 우리 셋이 크리드가 되지 못했을 거니까.
짧은 파노라마가 끝나고 점점 선명해지는 정신 속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누가 물을… 야, 문승빈!”
물소리가 멎고 거대한 그림자가 빛을 가렸다. 눈을 감아도 보이던 섬광이 멎었다. 채 반도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힘겹게 올렸다. 강도현이었다. 허탈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에 힘 빠진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강도현은 나의 그림자였다. 웃긴 일이었다. 강도현 뒤로는 여전히 상태창이 발광하고 있었으니까. 언제나 나의 어두운 과거를 떠올리면 이 녀석의 얼굴이 있었고, 그래서 나는 강도현이 여전히 나의 어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눈을 가리고 머리를 어지럽히는 빛들 사이에서 평온함을 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어두운 그림자였다.
“웃기는 X끼야, 진짜…….”
“정신이 좀 드냐?”
“어, 목소리 좀 낮춰… 머리 울려.”
“아, 미안. 잠깐만. 너, 코피 난다.”
기어코 피를 보게 하는구나, 고약한 상태창. 그동안 잘 피해 갔다 싶었는데. 강도현이 손을 내밀어 나를 일으켜 세웠다. 거울을 보니 정말로 코피로 엉망이었다. 수그린 자세로 있어서 옷에도 아무렇게나 묻어 있었다. 뒤늦게 소리를 듣고 화장실로 달려온 지운이 형은 헉하는 소리와 함께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유현이 형 역시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하긴, 내가 봐도 꼴이 말이 아니었다.
“둘이 싸웠어?”
“아, 아니에요!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물소리도 안 멈추고 이상해서 확인하러 들어온 건데 승빈이가 한쪽에 널브러져 있었어요.”
“…도현이 말이 맞아요.”
“지금은 괜찮은 거야? 병원 안 가도 되겠어?”
“네.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죄송해요.”
“너, 일단 씻고 나와.”
오랜만에 듣는 유현이 형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다. 매번 건강 문제로 걱정시키는 것도 재주라고 생각할 것 같다.
샤워를 마치고 거실로 향했다. 머뭇거리는 나를 보던 유현이 형이 나를 불렀다. 가 보니 강도현까지, 말 그대로 삼자대면이었다.
“올해 들어오면서 너희 둘이 사소하게 부딪치는 일도 많았지만, 다 친해서 그런 거고 장난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번 일은 단순히 친구 사이라서 하는 다툼은 아닌 것 같은데.”
“…….”
강도현도 잔뜩 풀이 죽은 강아지 얼굴이었다. 과거를 알고 나니, 강도현도 100% 진심을 말한 것은 아니었을 것을 안다. 그래서 유현이 형에게 한 소리 들을 각오로 말했다.
“이건 저희 둘이 해결할게요.”
“이미 충분히 기회 많이 줬어.”
“이번에는 정말이에요. 저희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강도현은 아니라고 해도, 전 할 수 있어요.”
“알아서 못 하니까 하는 말이잖아.”
“그럼 전 끝까지 솔직하게 말 안 할 거예요.”
내 선전 포고에 유현이 형은 나와 녀석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네.”
“고마워요, 형.”
유현이 형에게 고마웠다. 저 형에게 마지막은 정말 마지막이니까, 절대 두 번의 마지막을 주는 형이 아닌 걸 너무 잘 안다.
둘만 남은 식탁 위에는 잠시 정적이 오갔다. 새벽에 가까워지는 시간이어서 부엌 전등 말고는 어둠이었다.
“…미안해. 나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았지?”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내 잘못이 아예 없다고는 말 못 하지.”
“네가 전에 말했던 거… 네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 절대 너를 가르치려 들거나, 조언하려는 마음은 아니었어.”
강도현이 황급히 물잔을 든 손을 내렸다.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아니야. 네 말 듣고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 네 말처럼 당장 눈앞의 일만 생각하고, 지금 내가 쥐고 있는 게 영원할 거라고 생각한 건… 너무 속 편한 생각이지.”
“…….”
“우리 연습생 때 기억나냐? 문어대가리가 갑자기 지정곡 아닌 자유곡으로 하라고 해서 애들 다 멘붕 왔었잖아. 근데 그때 유일하게 우리 팀만 안 깨졌던 거.”
“기억하지.”
“그전까지는 네가 한 말 이해 못 했거든. 지금 정해진 곡 완성하기에도 시간 없고 바쁜데,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왜 걱정하지? 그랬어. 그래서 그날 너무 충격이었어. 그래서 너처럼 플랜 비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그걸 그새 까먹고 원래 내 방식대로 네게 말해 버린 거야.”
투마월 당시를 생각하면 강도현도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제는 속에 담아 두지 않고 대화로 풀어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의미 있었다. 나는 맥주를 한입 들이켰다.
“하여간, 기억력 나쁜 건 알아줘야 해.”
“이 형님이 나름 반성하는 건데!”
욱한 강도현이 맥주 캔을 낚아채더니 입에 넣으려는 걸 간신히 막았다.
“술찔이가 무슨 맥주야. 내일 스케줄 가야지.”
“술찔이 아니라고! 내 주량 소주 2병 맞다니까? 그리고 내일 스케줄 없는 거 알거든?”
“네네- 2병 같은 2잔 잘 알겠으니까~”
“열받아, 진짜-”
“아무튼, 내가 한 말 오해하지 않아 줘서 고맙다.”
“뭐야, 또 혼자 분위기 잡고 있어. 근데 난 앞으로도 포커스보다 크리드에 더 애정 가질 거고, 앞으로도 크리드 멤버로 불리길 원할 거야. 이건 나도 양보 못 해.”
“그건 말릴 생각 없어. 나중 돼서 또 까먹고 포커스 애들이랑 붙어먹으면 가만 안 둘 거니까.”
“너야말로 진짜 웃기는 X끼라니까?”
나는 말없이 냉장고에서 맥주 하나를 더 꺼내 왔다. 그래, 어차피 내일 스케줄도 없다면 밤새도록 대화를 나눠도 아무도 막을 사람 없겠지. 강도현은 진짜 주량을 보여 주겠다며 연신 맥주 캔을 부딪쳐 왔다.
앞으로 강도현에 대한 나의 열등감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열등감에 잠식되지 않을 자신이 있다.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는 소리는 곧 내가 빛을 내고 있다는 얘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