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287화 (287/346)

287화

‘어쩌면 그날’이 모든 배역을 캐스팅이 아닌 오디션으로 뽑는다는 소식에 연예계가 술렁였다. 정 감독과 김 감독의 합작이라는 점에서 최고의 화제작으로 불리는 영화인데, 인지도와 기존의 연기 실력을 염두에 둔 캐스팅이 아닌 오디션만으로 배역을 캐스팅한다는 것은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정감독 파아란때 캐스팅 엄청 마음에 안들어하더니 이번엔 아예 자기가 원하는 배우로 하겠다는 거네]

-김감독이랑 정감독 콜라보면 ㅈㄴ연기파들만 데려올 듯

-그럼 유명배우들도 오디션 봐야 한다는거네?

-근데 정감독 파아란에서 문승빈 재능 알아본거보면 신예배우 발굴 잘할 듯ㅇㅇ

개인 활동에 민감하게 대응하던 코어도 겸업 시즌이 다가오는 만큼 이번에는 나에게 먼저 오디션을 제안했다.

“정 감독님과는 작품 활동도 해 봤고 앞으로 다른 멤버들은 각 소속사에서 겸업 시작할 텐데, 승빈이 너는 연기 쪽으로 확실히 입지 다져 두면 어떨까 싶은데.”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준비할게요!”

그래도 나름 미래 준비를 시켜 주는 것만 봐도 코어가 나쁜 회사는 아니기는 했다. 회귀 전과 같은 시기에 촬영이 이뤄진다면 아마 10월부터 시작되려나.

오디션은 정말 순수한 연기력과 순발력, 캐릭터 소화력을 시험하려는 의지가 보였다. 자유 연기를 제외하고는 당일 날 랜덤으로 뽑은 대사와 연기를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주인공을 연기한 적이 있는 나에게는 당황스러운 조건은 아니었다. 대본 속 대사는 수천 번도 더 연습했었으니까.

문제는 내가 그때의 나와 같은 연기를 할 수 있느냐이다. 물론 그때의 나도 내가 맞다. 그때의 경험은 지금의 나의 경험이기도 하고. 하지만 어쩌면 그날의 주인공 지석은 다르다. 지석은 회귀 전 나를 빼닮은 캐릭터였다. 내가 가장 걱정인 것은, 그때의 나를 흉내 내는 것에 그치는 것이다. 불행했던 과거를 흉내 내는 것은 나 스스로에게도 치욕일 것이다.

‘완전히 새롭게 해석해야겠어.’

* * *

포커스의 컴백 티저 영상이 공개되고 각종 커뮤니티와 SNS는 마지막 장면에 주목했다. 경기를 마친 레이서 콘셉트인데, 엔딩 장면에 다섯 멤버 이외의 그림자가 하나 더 있던 것이다. 그냥 그림자만 나오면 모를까, 그림자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다섯 명이 달려가 부둥켜 껴안는 장면까지 나왔다.

[포커스 컴백 앨범 티저에 그림자가 여섯 개인데?]

-멤버 영입하나?

└데뷔한지 3년차인데 새멤버를 넣는다고?

-강도현 합류설 찐인가봄;;

-강도현 합류가 제일 맞지 않나? 얘네 곧 겸업 가능해지잖아ㅋㅋㅋㅋ

-ㅅㅂ 도현이는 크리드하고싶대

-아싸 VM즈 볼 수 있는거임?

아직 공식적으로 포커스에 강도현이 합류한다는 말은 없었지만, 모두가 예상한 수순이었다. 깅도현과 코어 쪽도 이미 얘기를 마친 사안이었다. 딱 2년 반이 지나는 시기에 새 앨범을 낼 것이고 그 앨범부터 강도현이 포커스 활동에 합류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이 다음 앨범이었다. 강도현은 미안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고, 되려 우리가 강도현을 격려했다.

VM의 입장에서는 현재 포커스 팬덤과 크리드 팬덤 모두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통보였을 것이다. 두 팬덤 간의 균열을 바란 것이겠지. 이건 투마월 시즌마다 이미 데뷔해서 소속 그룹이 있거나, 원소속사에서 그룹이 나온 멤버들에게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잡음이었다. VM의 계획대로 벌써부터 포커싱과 클로버 사이에는 묘한 기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타지 생활이 좋아도 고향 생각은 날 수밖에 없는거짘ㅋㅋㅋ]

-ㅇㅇ도현이는 대기업이랑 잘어울림^^

└코어가 대기업이 아니면 뭐임ㅋㅋㅋㅋㅋㅋ?

└아이돌 기획사로는 완전 신생이지

-포커싱은 강도현의 합류를 적극 환영합니다^^

-강프인데 솔직히 저기 묶여서 개인활동도 못할바엔 VM와서 더 스케일 있게 노는게 좋지

[지금 합류 반기는 애들은 짭강프 아님?]

-쌉동읰ㅋㅋㅋㅋ포커스 분위기도 개판이고 콘셉트도 잘 안어울려 그리고 크리드는 가족같잖아

-도현이가 어련히 잘 선택하겠지;;

-그놈의 가족라이팅ㅋㅋㅋㅋㅋㅋㅋㅋ다 비즈니스인데 하여간 과몰입러들ㅉㅉ

[그럼 이제 하루는 포커스고 하루는 크리드 되는거임?]

-강도현이 홍길동이냐곸ㅋㅋㅋㅋ

-이 정도면 분신술해야함

-숙소는 어디서 살아?

└숙소가 게스트 하우스냐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어서 공개된 뮤직비디오는 더 노골적이었다. 뮤직비디오 처음부터 한 조각이 찢어진 지도를 가지고 질주하던 다섯 명이 마지막에 여섯 번째 조각을 찾아서 지도를 완성한다. 마치 포커스라는 그룹 자체가 강도현의 합류와 함께 완성될 것이라는 의미를 대놓고 강조하고 있었다.

[포커스가 강도현으로 완성된다는 거잖아;;]

-서사 맛집이네

-크리드 서사만 서사냐 포커스를 완성시키는 게 강도현이라는데ㅇㅇ

-강도현 합류하면 쾌감 오질 듯

뮤직비디오가 나오고 한동안 숙소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도현이 형은 저녁 안 먹는대요?”

“입맛이 없다고 하네.”

“말도 안 돼!”

“괜찮다니까, 아직도 혼자 심각해하는 거야?”

선우 형은 답답한 듯 턱을 괴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우리한테 미안한 것 이외에도 생각할 게 많겠죠.”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나는 강도현을 설득하기 위해 방에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침대에 등을 지고 누워서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열심히 화면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을 보니 분명 댓글이나 대중 반응을 확인하고 있는 거겠지.

“빨리 나와, 강도현. 음식 다 식었다.”

“…안 먹어. 입맛이 없어.”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거 다 아니까 고집 그만 부려.”

1년에 몇 번 볼 수 없는 저기압의 강도현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땅굴을 파는 건 처음이었다.

“…걱정되냐?”

“안 되겠냐?”

“왜 걱정하는 건데?”

“아냐. 오늘은 여기까지만 얘기할래. 피곤해.”

강도현은 노골적으로 대화를 차단했다.

“너, 겸업 관련해서 우리한테 했던 말 생각나?”

“…….”

“오늘은 네 말대로 하는데, 난 네가 한 말은 지키는 놈이라고 생각해.”

핸드폰을 만지던 손가락이 순간 멈췄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강도현은 혹시 겸업을 하더라도 절대 팀 분위기를 해치거나, 팀 활동을 대충 하는 일은 없게 할 것이니 걱정 말고 믿어 달라는 말을 했었으니까. 강도현은 끝내 뒤돌지 않았지만,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자신이 한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사람인 걸 잘 아니까.

* * *

“곧 겸업 기간이 시작될 텐데,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특히 도현 씨는 포커스 합류가 거의 확정된 분위기인데, 앞으로 두 그룹으로 활동하는 소감이 어떤가요?”

인터뷰 스케줄에서도 포커스에 대한 질문의 빈도가 부쩍 잦아졌다. 그럴 때마다 크리드와 관련 없는 질문은 지양해 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반복된 질문에 강도현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우선 크리드 활동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제가 VM 소속이긴 하지만 제가 정식으로 데뷔한 첫 그룹은 크리드이기 때문에 포커스 활동하게 될지라도…….”

“포커스에 대한 유대감을 갖기에는 어렵다는 의미인가요?”

“그건…….”

“포커스보다는 크리드 소속으로 남기를 바란다는 뜻이겠죠?”

“…….”

순식간에 질문을 쏟아 내는 인터뷰어에 강도현의 눈이 갈 곳을 잃고 있었다. 가뜩이나 관련 문제로 머릿속이 복잡한 녀석인데, 더 자극을 받았다가는 실언을 할 게 분명했다. ‘네’라고 답하려는 강도현의 입이 떨어지기 전에 급히 끼어들었다.

“멤버들의 겸업이 시작되더라도 크리드 활동은 계속될 것이고,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은 저희 일곱 명 모두 같을 겁니다.”

인터뷰어는 갑작스럽고,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만능 답변을 늘어뜨리는 나를 못마땅한 눈으로 흘겨봤다.

“제 질문의 의도는…….”

“계획된 인터뷰 시간이 모두 지난 거 같은데, 여기까지 진행하겠습니다.”

“아니…….”

타이밍 좋게 매니저 형이 인터뷰를 종료시켰다.

“아직 3분 정도 시간이 남았는데요?”

“저희가 중간에 곤란한 질문은 삼가 달라고 말한 시간 포함하면 3분 충분할 거 같은데요.”

인터뷰어는 일부러 큰소리를 내며 자리를 정리하고 현장을 벗어났다. 얼음장같이 굳은 분위기였다.

“저 기자, 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오늘 작정하고 곤란한 질문들만 가져왔네.”

“전에 선우 형 때 저희 쪽에 불리한 기사 썼던 기자분이죠?”

“응. 오죽하면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겠어?”

인터뷰 시작 전부터 찝찝했는데, 불안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한다. 인터뷰가 끝나고 한동안 강도현과 어색함이 흘렀다. 또다시 불편한 관계가 되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인터뷰가 공개되었다. 역시나 어그로성 가득하게 편집된 인터뷰였다. 앙심을 품고 작성한 것이 너무 적나라했다. 더 적극적으로 강도현에게 말을 했다면 이런 일이 터지기 전에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나와는 정반대로 강도현은 어차피 이렇게 전달되길 바랐다며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었다.

Q: 이제 곧 크리드와 포커스 두 그룹으로 활동하게 될 텐데, 소감이 어떤지?

강도현: 포커스로 활동하더라도 크리드라는 정체성은 변함없다. 내가 VM 소속이라고 할지라도 처음 정식 데뷔한 그룹은 크리드이기 때문에 애정이 더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거 완전 뇌피셜이잖아?’

Q: 포커스보다는 크리드로 남고 싶다는 뜻인가?

문승빈: 멤버들의 겸업이 시작되더라도 크리드 활동은 계속될 것이고,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은 저희 일곱 명 모두 같을 겁니다.

[아직은 겸업에 대해 당당히 답변 못 하는 것에서 그들이 여전히 신인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부디 강도현이 크리드와 포커스 두 그룹에서 적응을 잘하길 응원한다.]

“이게 뭐예요? 하지도 않은 말을 진짜인 것처럼 싸질렀네?”

“마지막에 질문 잘린 게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들었나 봐.”

-계속 저러니까 ㅈㄴ재수없네ㅋㅋㅋ…포커스도 필요없네요

└개이득

-도현이가 크리드 하고싶다잖아ㅠㅠㅠ겸업 꺼져

-크리드가 더 마음에 드는 건 알겠는데 저 인터뷰는 ㅈㄴ경솔한 거 아님?

└ㅇㅇ 나 강도현이 저렇게 싸가지 없는 줄 몰랐음

-문승빈은 왜 끼어들지ㅎ?

└친구가 저런 질문받는데 가만히 있겠냐?

그리고 뜻밖에도 강도현이 먼저 대화를 시작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땐 나 대신 수습하려 하지 않아도 돼.”

“수습하려 한 건 알아?”

“당연하지. 그런데 이게 수습할 일이야? 난 확실히 하고 싶어. 포커스보다 크리드에 더 남고 싶고, 이 그룹의 멤버일 때가 더 좋다고 하고 싶다고.”

“나도 네가 무슨 마음인지 모르는 거 아니야, 하지만…….”

“이 그룹의 멤버가 된 순간부터 난 후회 없이 모든 것을 걸겠다고 다짐했다고!”

드문 일이지만 강도현은 감정이 격해지거나, 극도의 분노 상태일 때 손을 떤다. 지금도 목소리만큼이나 떨리는 손을 반대 손으로 겹쳐 잡고 있다. 연습생 시절에도 똑같았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다음엔?”

“뭐가?”

“크리드 다음엔 어떻게 할 건데?”

우습게도 내가 던진 그 한마디에 강도현의 떨림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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