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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286화 (286/346)

286화

우여곡절 끝에 식사를 마치고 드디어 각자의 마니또를 맞히는 시간이 왔다. 다들 비장한 눈빛이었다.

“저부터 할까요? 재봉이 맞죠?”

“너무 티 났었나?”

“시장에서 다른 형들도 사 줬다고 해서 긴가민가했는데 얘가 쌈을 싸 주더라고요? 그거 보고 확신했죠.”

“그 정도면 자기가 마니또라고 광고한 거 아니야?”

“사실 시장에서 승빈이 형 말고 사 준 형들 없어요. 형이 너무 빨리 눈치챌까 봐 거짓말 좀 했어요.”

“맞혔으니까 선물 받을 수 있죠?”

박재봉이 준비한 선물은 작은 강아지 모양 도자기 반지걸이였는데, 중간에 들렸던 소품 숍에서 구매했다고 했다. 은근히 나를 닮은 거 같기도 하고? 그리고 박재봉은 야무지게 폴라로이드 사진 미션도 성공했다. 멀리서 내 옆모습과 자신의 얼굴이 나온 사진이었다. 언제 찍었나 했더니 이렇게 나름 계획적으로 찍었구나.

그 뒤로 속속 자신의 마니또들을 맞춰 갔다. 그러다 선우 형이 처음으로 틀렸는데, 재밌는 것은 선우 형과 유현이 형은 서로 마니또였다는 것이다.

“아니! 형이 어떻게 내 마니또야? 뭐 해 줬는데?”

“네가 주는 불량 식품 다 먹어 줬잖아.”

“헐? 진짜로 처음 먹어 보는 거였어?”

“그렇다니까?”

“그럼 아까 사진 미션도……!”

“믿을 줄 몰랐지?”

“와, 이 형, 완전 양아치 아니야?”

“이거 편집되겠는데?”

“내 선물…….”

선우 형의 미션 사진이 공개되자 모두 박장대소했다. 어찌나 요리조리 잘 피해 다녔는지, 유현이 형의 손과 다리로 추정되는 것들과의 사진뿐이었다. 열심히 유현이 형이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미션도 실패하게 되었다.

자신만 유일하게 선물을 못 받은 거라며 울상이던 형이었지만, 아쉬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유현이 형이 준비한 선물은 책이었거든. 울상이던 선우 형의 표정이 빛의 속도로 밝아졌다. 책을 받지 못해 너-무 아쉽다고 했지만, 누구도 진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드디어 지운이 형 차례가 왔고, 이게 뭐라고 은근히 긴장이 됐다.

“승빈이요.”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형이 받으면 좋아할 법한 선물을 샀기 때문이다. 형이 스쳐 지나가듯 디자인이 예쁘다고 한 노트였다.

“형 취미가 시 감상이기도 하고, 앞으로 가사 쓸 일도 많을 것 같아서 이걸로 골랐어요.”

“신기하다. 아까 기념품 숍 들어갔을 때 눈에 들어왔던 노트였거든요. 고마워. 잘 쓸게!”

누가 마니또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마니또를 핑계로 서로에게 한 번씩은 더 다정하게 굴었던 기억이 꽤나 재밌었기 때문에 모두가 만족한 결과였다. 그렇게 이틀간의 꿈 같았던 시간이 끝났다.

* * *

부산에서의 포상 휴가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정 감독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식사나 한번 하자는 내용이었는데, ‘어쩌면 그날’에 대한 얘기일 것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예감은 정확했다.

“네가 말했던 그 감독 작품 봤는데 흥미롭더라.”

“김성진 감독이요? 감독님도 좋아하실 거 같았어요.”

“어. 그래서 걔가 준비한다던 영화, 나도 참여하기로 했어.”

“네?”

“제목도 정해졌더라. ‘어쩌면 그날’이라고.”

‘어쩌면 그날’에 정 감독이 개입하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김 감독과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을 뿐인데 같이 작품을 한다니.

“감독님 첫 영화 아닌가요?”

“맞아. 그래서 내가 부감독으로 참여하기로 했지.”

정 감독다운 행보였다. 솔직히 원래 가지고 있던 커리어도 화려하고, 파아란을 대히트시키면서 지금 가장 몸값이 높은 감독이니 마음만 먹으면 원톱 체제로 갈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도전을 즐기는 모습에 새삼 존경심이 들었다.

“김 감독님과 함께 작업해 보신 적 있으세요?”

“아니? 근데 김 감독도 대학 시절부터 유명했던 애라 대충 알고는 있었어.”

“근데 언제 그렇게 친해지신 거예요?”

“네 말 듣고 바로 김 감독 작품을 찾아봤거든. 근데 보자마자 꽂혀서 바로 연락했지.”

“어떻게 연락이 닿긴 하셨나 보네요?”

“어. 진짜 물어물어 겨우 연락했다.”

그 뒤는 사실 뭐 안 들어도 뻔했다. 회귀 전에도 둘이 그렇게 잘 맞을 수 없던 사이였으니까. 호형호제하면서 친형제보다도 더 자주 만나던 둘이었다. 작품 얘기 몇 분만 해도 바로 알았겠지, 상대와 잘 맞는다는 걸.

“난 드라마 감독만 했었지,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어서 김 감독한테 많이 배우려고.”

“축하드려요. 너무 인상 깊게 본 감독님이어서 잘됐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감독님이 참여하시는 거면 흥행은 확정된 거 아니겠어요?”

“하여간, 벌써부터 사회생활 잘한다니까?”

정 감독은 호탕하게 웃더니 내 잔에 술을 따랐다.

“그래서 말인데,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어.”

“어떤…….”

“지석이, 아니 주인공 역할 오디션 볼 생각 있어?”

매력적인 제안이었지만 선뜻 답할 수 없었다. 어쨌든 이 상황은 자칫 잘못하면 낙하산이 될 가능성을 만들 수 있으니까. 내가 망설이는 걸 눈치챘는지, 정 감독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미안하지만 무조건 너를 뽑겠다는 생각으로 제안하는 건 아니야. 너보다 지석 캐릭터에 적합한 배우가 나온다면 당연히 그 배우를 캐스팅할 거야.”

“네, 당연히 그러실 거 알죠.”

“다만, 파아란은 내가 직접 뽑은 게 아니었잖아. 네 연기 실력이 어떤지조차 모른 상태에서 같이 작업을 했던 거고. 솔직히 말해서 네 첫 영화 필모는 내 작품이 되었으면 좋겠지만, 이건 캐스팅이 아니라 오디션 제안이라-”

정 감독이 말끝을 흐렸다. 그럴 만도 한 게 사실 파아란의 흥행 이후 내게 들어온 대본만 해도 산더미였다. 가수로는 이미 안정적인 위치인 데다가, 연기자로서도 관심을 받기 시작했기에 오디션 제안이 무리하게 느껴질 수 있을 법도 했다. 사실 대부분의 작품은 이미 내 자리를 내점하고 캐스팅 제안을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또다시 ‘지석’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그때는 ‘지석’과 닮은 점이 너무 많았으니까, 어쩌면 지석이 곧 문승빈의 삶 그 자체였다. 그걸 연기라고 볼 수 있을까? 그냥 그때의 내가 곧 지석이 되어서 영화를 찍었던 거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기에 그때와 같은 몰입감을 전달할 수 있을지 망설여졌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어쩌면 그날’이라는 소중한 작품에 참여하고 싶어졌다. 비록 내 욕심일지라도 주어진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네. 저 오디션 볼게요. 대신 감독님도 정말 냉정하게 평가해 주셔야 해요.”

“당연하지.”

무거워질 뻔했던 분위기는 술잔을 부딪치며 날려 보냈다. 회귀 전 형이라고 불렀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열여덟 때 처음 봤는데 같이 술도 먹게 되고 신기하네-”

“감독님, 저 처음 봤던 날 기억하시네요? 저희 너-무 싫어해서 기억에서 지우신 줄.”

“뭐야, 아직도 마음에 담고 있었던 거야? 그래도 넌 봐줄 만하다고 생각해서 기억에 남았나 봐.”

“솔직히 말해서 그때 저도 민망했어요. 괜히 감독님 작품에 피해 주는 기분이었고…….”

“그래. 사실 너희 같은 애들이 무슨 잘못이냐? 시키는 어른들 잘못이지. 솔직히 이건 나도 반성해.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닐 텐데.”

“그래도 감독님이랑 이렇게 오해도 풀 수 있게 되고 좋네요.”

다음 잔을 따라 주던 정 감독이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그냥 형이라고 불러.”

“알겠어요, 형.”

“뭐야. 망설임 없이 바로 부르네?”

“형이라고 부르라면서요~”

너무 오랜만에 불러서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역시나 가장 반가운 호칭이었다.

* * *

잠깐 담배 피우러 나간 정 감독이 룸 안으로 돌아왔다. 누군가와의 통화가 방금 막 끊어진 듯 핸드폰이 손에 들려 있었다.

“승빈아, 오늘 김 감독 한번 볼래?”

“김 감독님을요?”

“어. 걔도 이 근처에서 약속이 있었다는데, 방금 끝났다 그래서-”

“저야 영광이죠.”

예상치 못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여기서 김 감독을 만나게 될 줄이야.

“오케이, 그럼 바로 여기로 오라 그럴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 감독이 나타났다. 정말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뻔했다.

“뭐야, 승빈이 그새 취했어?”

“네?”

“눈가가 촉촉해졌네. 설마 주사가 우는 건 아니지?”

“아니거든요!”

“그럼 다행이고. 김 감독, 여기는 알지? 크리드 문승빈이야.”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김성진입니다.”

“반갑습니다, 감독님. 문승빈입니다.”

오랜만에 마주 잡은 손이 그대로라, 이게 현실이 맞다는 게 또 한 번 실감이 났다. 성진이 형은 연필을 특이하게 잡아서 세 번째 손가락에 항상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그 버릇이 여전한지 지금도 세 번째 손가락에 굳은살이 선명했다.

‘살다 살다 굳은살을 반가워하게 될 줄이야.’

“사실 승빈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만나지도 못했지.”

“맞아요. 형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이미 형이라고 부르는 사이까지 된 거구나. 괜히 내가 다 뿌듯했다.

“말 편하게 하세요, 감독님.”

“어휴, 사실 너무 유명한 분이라 지금 보면서도 실감이 안 나는데요?”

“저야말로 감독님 너무 팬이었어서-”

뚝딱거리는 것마저도 그대로였다. 형은 작품에 있어서는 둘도 없는 천재인 반면,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걸 그렇게 어려워했다.

‘이 형 긴장 풀게 하는 데는 작품 얘기가 직빵이지.’

“예종 과제로 내셨던 작품 다 봤거든요.”

“제 작품을요?”

“맞다, 내가 그건 얘기 안 했구나. 승빈이가 네 엄청난 팬이야.”

“맞아요. 진짜 다 돌려봤어요.”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데-”

“정 감독님도 저랑 취향이 비슷하셔서 추천해 드렸는데, 이렇게 같이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얘도 참- 형이라고 하라니까?”

“아, 맞다. 형이 이렇게 적극적일 줄 몰랐다니까요?”

민망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살짝 올라간 입꼬리에서 성진이 형의 기분 좋음이 드러났다. 하여간 이 형도 참 투명하다니까.

“특히 가장 최근 작품인 ‘밤이 오면’에서 몽유병 연출하신 게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대박, 그거까지 봤어요? 진짜 최근에 찍은 거였는데?”

“승빈이 너는 대체 몸이 몇 개냐? 그렇게 바쁜데 언제 또 봤대?”

“진짜 팬 맞다니까요? 카메라도 구도별로 감독님이 직접 다 찍으신 거잖아요.”

“맞아요. 아니 어떻게 다 알지?”

“영상에 코멘트 달아 두신 것까지 다 봤으니까요.”

“미친.”

그다음부터는 내가 입을 열 필요도 없었다. 아니, 입을 열 틈도 없었다. 몽유병 연출을 어떻게 했는지 궁금해하는 정 감독에게 직접 영상을 보여 주는 김 감독과, 영화 얘기로 필리버스터를 하는 둘의 모습을 그저 흐뭇하게 쳐다보기만 해도 충분했다.

사실 둘이 함께 작품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는데,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오디션 준비 진짜 열심히 해야겠네.’

이제 나를 걱정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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