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무서워서 가기 싫으면 얘기해.”
“됐어. 저 형이 한 얘기라서 반대도 못 해.”
“응?”
더 물어볼 틈도 없이 다음 목적지를 감천 문화 마을로 확정 짓고 출발하던 찰나, 박재봉이 급하게 멈춰 섰다.
“맞다. 도현이 형, 괜찮아요?”
막내답지 않은 배려심이었다. 하여간 다 컸다니까, 우리 재봉이.
“됐어- 이제 어린애도 아니고 그 정도는 안 무서워.”
“도현이 높은 곳 무서워해?”
“아, 윤빈이 형은 그때 아파서 놀이동산 같이 안 갔었죠? 몰랐겠구나.”
“응.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놀이 기구만 못 타는 거라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윤빈 형이 얘 마니또인 거 같은데, 저 정도로 마니또에 진심이라니… 여러 의미로 정말 강도현다웠다.
경사진 길을 굽이굽이 올라 도착한 마을은 정말 아름다웠다. 오늘따라 하늘도 맑아서 더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와, 진짜 사진이랑 똑같네.”
“맘에 들어요, 형?”
“어, 완전! 내가 기대한 것보다도 더 예쁜 것 같아.”
정말 신나 보이는 윤빈 형을 보고, 다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빵 터졌다. 누가 잡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뛰어갈 것만 같았으니까. 정말 보기 드문 윤빈 형의 귀여운 모습이었다.
“근데 어린왕자는 어딨지?”
“그건 여기서 좀 더 올라가야 해요.”
“여기서 더 올라간다고?”
“어, 도현이 괜찮겠어?”
“괜찮다니까! 얼른 가기나 합시다.”
가는 내내 센 척했지만, 어린왕자 조형물에 가까워질수록 식은땀을 흘리는 게 다 보였다. 윤빈 형과 박재봉은 무섭지도 않은 지 아슬아슬하게 조형물 옆에 걸터앉아 사진을 찍었다. 그때, 강도현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조형물로 다가갔다.
‘무슨 깡으로 저러는 거지…….’
“형, 저랑도 사진 찍어요.”
“좋아! 근데 너 왜 이렇게 굳었어? 여기 앉아서 같이…….”
“으아악! 거, 거기 말고 여기 앞에서! 찍어요.”
“오케이-”
강도현이 내 손에 폴라로이드를 건넸다.
“찍어 달라고?”
“응. 나 여기서 미션이랑 마니또 선물 다 할 거니까.”
“뭐야, 천재인데?”
하얗게 질린 강도현이 이상해 보였는지 윤빈 형도 걱정 어린 얼굴로 주변을 기웃거렸다.
“괜찮아?”
“빨, 빨리 찍고 내려가요.”
“찍는다- 하나, 둘, 셋!”
찰칵 소리와 함께 사진이 찍히자마자 강도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 쪽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인화된 사진을 윤빈 형에게 넘겼다.
“이거 마니또 선물이에요.”
“우와. 고마워! 근데 네가 내 마니또였어?”
“네. 따로 선물은 없어요.”
“마니또 때문에 여기 온 거야?”
“네. 최고의 선물이죠? 저 지금도 다리 후들거리거든요.”
“대박, 완전 감동이야!”
“윽, 숨 막혀요.”
무심하게 말했지만 목소리가 들쑥날쑥 흔들리고 있었다. 감정표현에 거리낌이 없는 윤빈 형은 강도현을 껴안고 볼 반죽을 하고 손발을 다 동원해서 감동을 표현했다. 더 있다가는 멀미라도 할 것 같아서 강도현을 데리고 먼저 차로 돌아왔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냐?”
“뭐든 대충 하는 건 싫다고.”
“너를 누가 말리겠냐-”
“어후, 저렇게 높은 곳이 뭐가 좋다고. 그리고 아직도 볼이 아파. 안 그래도 손도 솥뚜껑 같은 사람이!”
방금 전에는 잔뜩 긴장해서 옹송그리고 있더니, 지금은 다시 기고만장한 너구리로 돌아왔다. 입에서 불이라도 내뿜을 기세여서 진정시키느라 고생 좀 했다. 그나저나 얘는 지 혼자 벌써 마니또를 밝혔네. 이제 후보는 5명 남았다.
점심은 인근 시장에서 부산의 유명 길거리 음식들로 해결했다. 박재봉은 수학여행 온 기분이라며 이곳저곳을 활보하며 양손 가득 음식을 챙겨 왔다. 들리는 가게마다 예쁘다고 덤을 주시는데, 어찌 된 게 산 것보다 덤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재봉이 그냥 여기 살아야겠는데?”
“그러니까요. 제가 제일 인기 많은 거 같아요.”
“와, 똑같은 거 샀는데 쟤 거만 양 두 배인 거 봐.”
선우 형이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컵을 내밀었다. 어묵이 담겨 있었는데, 딱 봐도 재봉이 거가 훨씬 많아 보이기는 했다.
“이거 형 줄게요!”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네가 음식을 다 양보하고.”
“승빈이 형, 더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사 주게?”
“사 줄 수도 있고요?”
“오늘 왜 이러냐. 너, 내 마니또야?”
“에이씨, 선우 형이랑 도현이 형도 똑같이 말하던데! 마니또랑 상관없이 형들 사 주고 싶어서 그런 거거든요?”
“아, 알겠어. 알겠어. 나도 하나 사 줘.”
“형은 더 안 놀렸으니까 사 줄게요.”
조금 놀려도 금세 삐졌다가 빨리 풀어지고, 새침하게 돌아서는 게 영락없는 막내긴 했다. 아까는 애늙은이 같더니. 하지만 장난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오- 재봉이, 완전 부자네~”
“뭐 이 정도 가지고 그래요-”
“그렇지? 그럼 형 저 아이스크림 하나 더 먹는다?”
한두 개 사 줄 때는 망설임 없이 카드를 턱턱 내던 박재봉이, 가짓수가 늘어나자 점점 입술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오늘은 재봉이가 쏘는 날이니까~ 여기 비빔당면이 맛있다던데.”
“그만 사 먹어요!”
결국 참다 참다 터졌다. 먹고 싶은 거 다 사 주는 거 아니냐고 한 번 더 놀렸다가 눈으로 쌍욕 먹었다. 얼굴이 토마토가 된 녀석을 달래느라 결국 두 배는 더 돈을 썼다. 누가 보면 내가 마니또라고 생각하겠다.
“너, 먹는 양이 왜 이렇게 늘었어?”
“저 성장기잖아요.”
“여기서 더 큰다고? 그만 커-”
“저 의사 선생님이 앞으로 5cm는 거뜬하다는데요?”
이런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있나? 회귀 전 박승빈이 딱 지금 박재봉 키였는데 여기서 5cm나 더 큰다고? 그럼 그때 제대로 못 먹고 못 자서 더 클 수 있었던 키가 안 컸다는 거였잖아?
‘재수 없어…….’
더 남아 있다가는 모든 재산을 탕진할 거 같아서 황급히 다음 장소로 이동하자고 했다.
배도 채웠겠다, 다음 장소는 사진관으로 정했다. 생각해 보니 아직 멤버들끼리 단체 사진을 찍은 게 없었다. 물론 일하면서는 수도 없이 찍었지만, 그건 다른 얘기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좀 더 넓은 포토 부스가 있는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어 보기로 했다. 사진관으로 향하던 길에 지운이 형과 선우 형이 작은 슈퍼마켓 앞에 멈춰 섰다.
“대박, 이거 진짜 오랜만이다!”
“이거 엄청 먹었는데-”
가까이 가 보니 추억의 불량 식품이었다.
“초등학생 때 학교 문방구랑 매점에서 팔았던 거잖아.”
“이게 뭔데요?”
“이거 몰라?”
박재봉의 순수한 의문에 둘은 잠시 조용해졌다. 이런 게 세대 차이인 건가.
“이런 거 안 팔았어?”
“네. 처음 보는데요?”
“형, 형도 먹어 봤죠?”
“아니.”
선우 형은 박재봉이 불량 식품을 모른 것보다 유현이 형이 한 번도 안 먹었다는 말에 더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어, 어떻게 이걸 안 먹고 자랄 수가 있지? 형, 어디 외국 살다 왔어요?”
“…부모님이 몸에 안 좋다고 먹지 말라 하셨어.”
“와우.”
“그동안 인생을 헛살았네, 우리 형.”
“그니까. 오늘 속세의 맛을 제대로 알려 줘야겠네.”
“맞아, 선우야. 종류별로 담아 가자.”
“그래, 지운아. 유기농 식품만 먹고 자랐을 저 건강한 몸에는 불량 식품이 필요해.”
“뭐라는 거야…….”
결국 종류별로 불량 식품을 구입해서 하나하나 유현이 형의 입에 넣고 마는 두 사람이었다. 유현이 형은 ‘차지운, 너는 원래 이런 놈이 아니지 않았냐’라며 배신감이 든다고 했지만, 격렬하게 거부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맛있는 걸 왜 우리 학교 앞에선 안 팔았던 거지?”
그리고 박재봉은 이미 불량 식품의 맛에 눈을 뜬 지 오래였다.
“별로. 너무 인공적인 맛이야.”
“이거는요?”
“이것도 별로… 너무 셔.”
“아, 자존심 상해. 내가 꼭 형 입맛에 맞는 거 가지고 올 거니까 뭐 먹고 있지 마요!”
‘선우 형 마니또가 유현이 형인가 보네…….’
입에 넣어 준다고 곧이곧대로 먹고 맛 평가까지 하는 유현이 형이 더 이해가 안 갔다. 모두 입에 불량 식품 하나씩 물고 오물거리다 보니 금세 사진관에 도착했다. 셀프 사진관인데 테마가 옛날 교실이었다.
“옛날 교복도 있네요?”
“여기 칠판도 있다.”
“우와. 저 분필 처음 써 봐요. 저희 학교는 다 보드로 바뀌어서.”
“지각한 사람 강도현…….”
“야, 나 지각은 한 번도 안 했거든?”
“그럼, 오늘 수업 시간에 잔 사람 강도현…….”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문승빈 벌점 십만 점.”
“너희 둘, 같은 반이었으면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겠다.”
아마 VM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같은 학교에 다닐 수도 있었겠지.
옛날 교복도 대여 가능하다는 말에 우선 과거 버전부터 찍기 시작했다. 일이 아닌 단체 사진은 처음이어서 초반에는 어색했지만, 다들 사진 찍던 짬이 있는지라 빠르게 적응했다. 검정 베레모를 쓴 유현이 형은 정말 그 시대 사람 같아서 놀라울 지경이었고, 어디서 찾았는지 반장 완장을 찬 강도현은 진짜 반장이라도 된 것처럼 잘난 체를 했다.
다시 원래 옷으로 갈아입고 현대 버전으로도 찍었다. 한결 편해진 복장에 다들 자유분방한 포즈가 돋보였다. 마지막으로는 요즘 유행이라는 포즈도 단체로 하면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지난번 포토 부스 사진은 다 흔들렸는데 이번에는 되게 잘 나왔네.”
“완전 가족사진 같이 나왔어.”
“졸업 사진 같기도 하고.”
“이거도 찍어서 클로버 보여 줘야겠어요.”
나는 곧장 사진을 찍어서 공식 계정에 올렸다.
[클로버 안녕ㅎㅎ 오늘 멤버들이랑 가족사진 찍고 왔어요!]
(사진)
멤버들이랑 같이 맛있는 것도 엄청 먹고 바다 구경도 했어요. 조만간 클로버들에게도 공개될 거 같아요!]
-뭐야?
-애들 휴가 갔나?
└부산 목격담 떴는데 촬영중인가봄ㅇㅇ
-가족사진ㅠㅠㅠㅠ
-크리드 칠형제인거냐곸ㅋㅋㅋㅋㅋㅋ
-교복 때문에 졸업사진 느낌도 나
가족사진이자 졸업 사진 같다는 말은, 별거 아닌데도 자꾸 머릿속을 헤엄치는 기분이었다. 나는 조용히 인쇄된 사진을 보다가 액자까지 함께 구입했다. 숙소에 돌아가면 거실 잘 보이는 곳에 둘 생각이었다.
사진관에서 사진까지 찍고 잠시 숙소에 들렀다. 준비를 마치고 미리 예약한 식당으로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각종 해산물이 먹음직스럽게 준비되어 있었다. 밥을 먹으면서 막판 마니또 어필을 했다. 나름 지운이 형에게 티를 낸 것 같은데 이 형이 눈치챘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내 마니또는 박재봉인 걸 확신했다. 한 번도 누구한테 쌈 싸 준 적 없던 애가 꼬물거리면서 해물 쌈이라고 내 밥그릇 위에 얹는 것이다. 허술한 모양새에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또 서운해할 것 같아서 군말 없이 입에 넣었다. 앞에서는 선우 형이 폴라로이드 미션을 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아, 형! 한 번만 찍자니까요?”
“됐어.”
“형도 나랑 찍어 놓고!”
“나는 네 마니또 아니니까 상관없잖아.”
답답해 미치려고 하던 형이 갑자기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얼굴이 꼭 보여야 한다는 조건은 없었지?”
“그럴걸요?”
“…그럼 됐어.”
‘도대체 어떻게 찍었길래…….’
하여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