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282화 (282/346)

282화

“이럴 줄 알았어!”

“인터뷰는 개뿔!”

“뭐 챙기지?”

“옷이랑 세면도구?”

각자 방에 들어가서 허겁지겁 짐을 쌌다. 나는 우선 여벌의 옷과 속옷, 세면도구를 먼저 챙겼다. 목 건강을 위해 가습기도 챙겨 갈까 했지만, 자리가 부족해서 포기했다. 거실에서는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렸고, 더 있다가는 층간 소음으로 신고당할 게 분명했다.

“야, 야. 그래도 조용히 움직여.”

타이밍 좋게 유현이 형이 경고했고, 바로 다들 잠잠해졌다. 역시, 최고의 리더라니까? 그렇게 제한 시간이 다 될 즈음 숙소를 빠져나왔다. 숨이 차 헉헉거리는 멤버들은 또 스태프들의 손에 이끌려 차에 탔다.

“뭐 챙겼어요, 승빈 형?”

“옷이랑 세면도구.”

“헐, 세면도구 안 챙겼다.”

“아이고, 우리 재봉이 이 썩겠네-”

“재봉아, 선우보다는 낫다. 걱정하지 마.”

“선우 형 뭐 챙겼는데요?”

“인형이랑 젤리 챙겼단다.”

“푸하하하!”

“도현아, 웃음소리가 크다?”

“안 웃게 생겼어요?”

“아니, 방에 들어가자마자 우리 선냥이가 나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고. 주인님 저는 안 데려가시나요? 이러는 것 같은데 어떻게 두고 가?”

멤버들 모두 자기 성격대로 짐을 싼 게 비교되어 더 웃음이 났다. 지운이 형과 유현이 형은 예상대로 야무지게 짐을 쌌다. 여분의 옷에 세면도구, 잠옷까지 챙겼더라. 윤빈 형은 잠옷에 세면도구, 밴드를 챙겼다. 이건 왜 챙겼냐고 물으니 틈틈이 운동하려고 챙겼단다.

선우 형의 짐을 가장 크게 비웃던 강도현도 만만치 않았다. 자신있게 꺼낸 에코 백에 든 건 모기 채와 잠옷, 좋아하는 과자였다.

“모기 채는 뭐냐?”

“혹시 알아? 야외 활동 하면 꼭 필요하니까 챙긴 거지. 우리가 어디 편안한 호캉스나 즐기러 가는 거겠니? 또 극기 훈련 시키고, 일 시키고, 게임 시키겠지. 내가 볼 때 우리 무인도에 두고 오려는 거 같음.”

강도현의 말을 듣던 선우 형이 좌석 위로 무릎을 꿇었다. 뭐 하는 거냐는 멤버들의 눈빛에도 굴하지 않고 이번엔 두 손을 모아 비비기까지 했다.

“얘들아, 형님들! 저에게 옷 한 벌과 소량의 치약과 클렌징 폼을 빌려주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 수 있을까요?”

“눈물 난다, 진짜…….”

“재봉아, 너도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닐 텐데?”

“전 그래도 옷은 챙겼어요!”

“어려운 사람들끼리 돕고 살아야지!”

“전 형만큼 어렵지 않다니까요?”

종잡을 수 없는 대화 흐름에 카메라 담당 스태프와 작가진들도 필사적으로 웃음을 꾹 참고 있었다. 중간중간 참지 못하고 바람 빠진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저희는 모든 마음의 준비가 끝났어요.”

“자, 저희를 이제 어디로 데려, 아니 던져 두실 건가요?”

“어휴, 승빈 씨. 던져 두다니요. 아주 좋은 곳에 모실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작가님, 저희는 안심시키는 말이 제일 두려워요.”

“맞아요. 이러고 뒤통수 맞은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

의심을 놓지 못하는 멤버들에 작가님은 정말 안쓰럽다는 듯 우리를 측은하게 바라봤다.

“진짜 좋은 데 데려가서 푹 쉬게 해 줘야겠다. 벌써부터 이렇게 의심이 많으면 어떻게 해요- 이게 다 어른들 잘못이다. 그쵸?”

“이건 꼭 편집해 주세요. 사실 어른들보다는 씨넷 잘못이죠~”

재봉의 애교 섞인 투정에 여자 스태프들은 물론, 남자 스태프들도 무장 해제 됐다. 도착해 보니 역시 공항이었다. 여권은 역시나 매니저 형이 챙겨 놓았다. 멤버들 모두 배신감을 느꼈다며 매니저 형에게 몰려들었다. 매니저 형은 이번에도 속이는 데 성공했다며 뿌듯해했다.

“우리의 목적지는 바로… 부산입니다!”

“부산이요?”

“재밌겠다!”

“저희 부산 가서 막 낚시하고 그런 거 아니죠?”

“가서 확인해 봐요, 재봉 씨.”

의심도 잠시, 막방을 끝내자마자 납치당한지라 다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이 들었다. 고작 한 시간짜리 비행이었지만,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 * *

도착한 곳은 바다가 바로 보이는 곳의 최고급 호텔이었다. 정말 의외의 장소였다.

“진짜로 여기서 하루 종일 쉰다고요?”

“그럼 짐은 왜 챙기라고 하신 거예요?”

“재미를 위해서 저희가 여분의 옷이나 세면도구는 제공 안 해 드릴 거거든요.”

“너무해요! 이렇게 좋은 호텔에서 보내는 호캉스인데!”

“선우 형은 뭐 먹으면 안 되겠다.”

“물놀이도 하면 안 될 듯?”

멤버들은 신이 나서 선우 형을 더 놀렸다. 모두가 신나는 걸음으로 숙소에 들어가는 중에도 거의 기어가는 듯한 속도로 뒤를 쫓아 왔다.

숙소에 들어가자 모두 입이 떡 벌어졌다. 숙소 안에 스파 시설이 있고, 식탁 위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도는 음식들이 상다리가 부서질 만큼 세팅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거실에는 온갖 보드게임이 준비되어 있었다.

“대박, 게임기도 있어!”

“침대도 엄청 푹신푹신할 거 같아.”

“와, 이게 다 뭐야?”

그때, 갑자기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스크린이 내려왔다. 모두 갑작스러운 소음에 유현이 형을 중심으로 몰려들었다.

“뭐야?”

“도현이 형, 이리 와 봐요!”

[데뷔 D-1

본 투 샤인! 안녕하세요, 크리드입니다!]

느닷없이 데뷔 전 영상이 재생됐고, 몇몇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 역시 오랜만에 보는 열여덟의 내 모습이 신기했다.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저게 벌써 몇 년 전이라니. 감회가 새로웠다.

[C: Create 앨범 활동]

“첫 방송 끝나고 찍은 사진이죠?”

“대박, 다들 어린 것 봐-”

“저땐 절반이 미성년자였는데, 이젠 재봉이만 남았네?”

“재봉이 키 엄청 컸다-”

“문승빈 볼살 봐.”

“강도현, 너도 만만치 않거든.”

“너는 완전 빵떡이었고~”

강도현의 말에 발끈했지만 내가 봐도 저땐 볼살이 참 많았다. 지금은 젖살이 어느 정도 빠져서 더 비교가 됐다.

[설렜던 첫 팬 사인회!]

“저 날 엄-청 긴장했었잖아.”

“맞아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몰라서 허둥지둥하고…….”

“저는 하도 긴장해서 오히려 팬분이 달래 주셨어요.”

“맞아, 난 그때 지운이 형이 팬싸 간 줄 알았잖아.”

[첫 팬 미팅♡]

“와, 저 이벤트는 다시 봐도 소름 돋는다.”

“진심, 나는 그래서 콘서트도 좋았지만 팬 미팅이 진짜 좋았어.”

“정말 클로버로 가득 찬 공간이었으니까요.”

“얼른 또 하고 싶다.”

“저도요!”

[D: Definition 앨범 활동]

마지막으로 나온 건 이번 활동 영상들이었다. 오늘 막방을 했는데 언제 저렇게 편집을 하신 건지, 새삼 크리데이 제작진들이 대단했다.

“와, 대박. 저거 당장 오늘 영상이잖아요!”

“이거 거의 실시간 아니에요?”

“미쳤다.”

“언제 이걸 다 준비하신 거예요?”

이번 활동 영상이 끝난 뒤에는 C, R, I, D 글자가 모여서 CRID라는 이름을 완성했다. 데뷔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순간들을 한번 정리한 느낌이었다. 다들 비슷한 기분이었는지, 저마다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재봉이는 톡 치면 울 거 같은데 한번 쳐 볼까-

[자아 찾기 프로젝트를 마친 크리드, 오늘은 아무 걱정, 고민 없이 다음 프로젝트를 위한 휴식을 가질 수 있길!]

[고생한 멤버들을 위한 서로 응원의 메시지를 적어 주세요!]

“응원의 메시지?”

“탁자 위에 종이랑 펜이 있는데 이걸로 하는 건가?”

“롤링 페이퍼 쓰는 건가 보다!”

“익명인가요?”

“선우 형 또 장난치려고 익명인지 먼저 물어보는 것 봐.”

“아, 문승빈. 넌 눈치가 너무 빨라-”

이름은 필수가 아니라는 스태프의 말에 모두의 눈이 반짝였다. 과연 응원의 메시지를 받는 멤버가 있긴 할까… 이른 걱정이 밀려왔다.

“승빈이부터 읽어 볼까?”

“조금 겁나는데요?”

“우리가 얼마나 따뜻한 말을 적어 줬는데 뭐가 겁나~”

윤빈 형은 여전히 멤버들을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형은 정말 좋은 말을 써 줬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윤빈 형의 메시지는 삐뚤빼뚤한 한글과 중간중간 틀린 글자로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처음 투마이월드에서 봤을 땐, 친해지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네가 먼저 말 걸어 줘서 고마웠어! 너는 항상 우리 팀을 위해 고민하고, 어떳게? 형, 여기는 히읗 받침 들어가야 해, 시옷이 아니고.”

“땡큐-”

“어떻게 하면 더 멋진 무대, 음악을 팬들에게 줄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정말 멋져. 요즘 스케줄 많아서 걱정인데 건강 잘 챙기고, 내가 언제나 곁에 있다는 거 기억해.”

“감동이야-”

“너, 일부러 윤빈 형 거 먼저 읽은 거지, 이상하게 쓴 메시지들 민망해지라고.”

“어떻게 알았냐? 다음은 네 거 읽으려고 했는데.”

“난 이름도 안 썼는데 어떻게 내 거인지 알아?”

“방금 엄청난 힌트를 줬어. 왜냐하면 너 빼고 다 이름을 썼거든!”

다른 사람의 이름을 써서 혼란스럽게 하는 사람이 한 명쯤 있을 줄 알았는데 웬일로 모두 정직하게 이름을 적은 것이다. 심지어 선우 형까지도.

“엥, 형. 롤링 페이퍼에는 이름이 다 쓰여 있어요?”

“응. 너도 썼잖아?”

“그야 이름 안 써도 형은 다 맞힐 거 같아서 그냥 쓴 거죠-”

사실 선우 형만 빼고 예상한 대로였다. 윤빈 형은 글씨체부터 티가 나고, 재봉이도 마찬가지였다. 지운이 형이나 유현이 형은 애초에 이름을 숨기면서 장난을 쳐야 한다는 생각도 안 했던 거 같고. 결국 남은 건 강도현 하나였다.

“승빈아, 비록 네가 나보다 키가 조금 작고 비주얼도 그렇고, 실력도 부족하지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이 형에게 털어놓으렴? 아주 처음부터 거짓말을…….”

“아, 롤링 페이퍼의 재미는 익명성에서 오는 건데.”

“네가 형을 너어무 좋아해서 가끔 피곤할 때가 있지만? 이거 계속 읽어야 해요?”

카메라 감독님도 어이없어하는 내 얼굴에 최대한 웃음을 참고 있었지만, 손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지운이 형은 이미 윤빈 형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며 웃고 있었다.

“이번 크리데이 분량 다 뽑은 거 같은데요?”

“더 읽으면 도현이의 아이돌 생활에도 큰 타격이 될 거 같아서… 여기까지 읽을게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줘요, 클로버-”

이렇게 웃긴 분위기 속에서도 감동적인 순간이 있었다. 모두 하나 두 개씩 장난스러운 메시지가 있었지만, 유독 지운이 형의 롤링 페이퍼에는 진지한 얘기들로 가득했다.

“형을 오해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이제는 절대 그러지 않을 거예요. 모두가 다 형을 못 믿는다고 해도 나랑 우리 멤버들은 언제나 형 편 할게요… 이거 재봉이 맞지?”

“어떻게 알았어요?”

“이걸 아직도 마음에 담고 있었어? 그래도 고마워.”

“그냥 투마이월드 때 사진이랑 영상 보니까…….”

“재봉이, 많이 컸네~”

“와, 지운이 형 롤링 페이퍼에는 다 덕담만 써 줬네- 지운이 형 메시지 쓴 성의의 절반만 나한테 써 주지 그랬냐, 도현아.”

“참 나, 너는 나한테 달랑 한 줄 써 놓고 사돈 남 말 하고 있어!”

“저 둘 오늘 왜 이렇게 티격태격거리는 거냐?”

으르렁대는 우리를 두고 지운이 형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근데 사실 나는…….”

“왜요, 지운이 형?”

잠시 망설이던 지운이 형이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모두 조용해졌다.

“나한테도 장난 많이 쳐 줬으면 좋겠어.”

정말 그 누구도 예상 못 한 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