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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280화 (280/346)

280화

사실 부영만의 랩 대필 사건은 이미 회귀 전에도 발생했던 일이었다. 그 당시 부영만의 가사를 대필해 준 ‘글루미’의 폭로가 있었거든. 꽤 큰 사건이었음에도 부영만이 처음 강도현을 저격했을 당시에는 이 사건을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그때는 강도현과 관련된 일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나와도 마찬가지고.

애초에 ‘글루미’는 부영만을 통해 힙합 신에 들어올 생각이었다. 재능은 있었지만, 가진 게 없던 그에게 부영만은 한 줄기 빛이었다. 이미 국내에서 꽤 알아주는 힙합 레이블에 속해 있기도 했고, 노는 걸 좋아했던지라 이리저리 아는 사람도 많았다. 게다가 마침 그 시기에 레이블에서도 부영만을 스타로 만들 생각으로 서바이벌에 내보내기까지 했다.

그는 부영만에게 주기적으로 가사를 써 주고, 부영만은 서바이벌 단계가 올라갈 때마다 주변 인맥과 글루미를 연결해 주기로 했다. 회귀 전에는 이런 암묵적인 계약을 깨고, 서바이벌 우승을 하자마자 부영만과 소속사가 글루미와의 연을 끊어 버렸다. 입막음을 위해 협박을 자행하기도 했다는 내용도 이후 올라온 추가 폭로글에 담겨 있었다.

결국 뺏은 가사로 승승장구하던 부영만을 보고 열받은 글루미가 대필 사실을 폭로했고, 부영만은 대필 래퍼라는 오명과 함께 완전히 힙합 신에서 퇴출되고 말았다. 글루미 역시 다른 래퍼에게 대필을 해 준, 자기 창작물에 책임감이 없는 래퍼로 낙인찍히며 정상적인 음악 생활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과연 이번에도 그가 부영만에 대해 폭로할까? 불확실한 미래의 일을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대필한 사람이 누군지 알지만, 대필했다는 증거를 찾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본인이 폭로하지 않는 이상 증거를 찾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글루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그럼 면에서 DM이 참 편하단 말이지? 번호를 몰라도 이렇게 바로 연락이 가능하니까.

[가사 하나에 얼마씩 받았어요?]

[네? 누구세요?]

[부영만이 본인 가사로 승승장구하는 거 억울하지 않아요?]

메시지 옆 숫자 1이 사라졌는데도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어쭈, 읽씹한다 이거지?

[대필 관련 증거와 자료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폭로하기 이전에 글루미 님께 제안하는 거예요. 혼자라도 살래요, 아니면 부영만이랑 한배를 탈래요?]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내가 무슨 해커도 아니고 증거를 가지고 있을 리가. 하지만 쟤는 지금 내가 모든 걸 다 아는 것 같아서 두렵겠지. 정확하게 그걸 노린 거기도 했고. 역시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글루미에게서 답장이 왔다.

[저한테는 확실히 문제없는 거죠?]

[그럼요.]

[일단 만나서 얘기하시죠.]

가장 어려운 단계를 통과했으니 그다음부터는 계획대로였다. 물론 처음 대면으로 만나서 나인 걸 확인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긴 했다. 놀라기만 했나, 그 자리에서 바로 도망치려는 걸 겨우 붙잡았다. 조금 진정의 시간을 준 뒤, 글루미에게 몇 가지를 요구했다. 내 계획은 부영만을 정상에서 한 번에 떨어트리는 거였다. 그래야 그 추락이 더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울 테니까.

먼저 세미파이널 전날까지 부영만의 연락을 모두 받지 말라고 했다. 그래 봐야 고작 이틀이었다. ‘기브미캐시’는 꼴에 서바이벌이라고 세미파이널부터는 참가자들의 실력을 확실히 검증하기 위해 경연 준비 시간을 짧게 줬으니까. 그는 잠깐 망설이는 듯하다가도 그동안 당한 것이 떠올랐는지 결의에 찬 눈을 보여 줬다. 그리고 나는 그 눈을 믿어 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글루미는 하루에 몇십 통씩 오는 부영만의 전화와 메시지를 보여 줬다.

[X친 새X야 전화 받으라고]

[루미야 3일 뒤에 세미파이널이라니까? 제정신이냐고]

[서운한게 있으면 말로 하자]

[이 X발 너 이제 여기 판에 발도 못 담글 줄 알아]

쌍욕만 하다가 회유도 하고 가스라이팅까지, 아주 가관이었다. 쏟아지는 연락에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라는 말에 잠시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부영만이 작업실과 오피스텔의 위치도 알아서 찾아오는 일도 있었다지만, 미리 윤빈 형에게 말을 해 둬서 글루미는 윤빈 형의 작업실에서 지내고 있었다.

두 번째 지시 사항은 내가 만든 가사지를 부영만에게 전달하는 거였다. 부영만의 세미파이널 경연곡 비트에 딱 맞는 가사였다. 이어서 내 계획을 듣던 글루미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눈으로 나를 보며 감탄했다. 저렇게 안광이 있는 눈인 걸 처음 알았다. 얘도 랩 네임 다시 지어야겠네.

세미파이널 전날 쪽지를 전달한 글루미의 눈에는 피멍이 들어있었지만, 입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냐 묻자 그는 후련한 듯 기지개를 켰다.

“뭐, 뻔하죠. 만나자마자 주먹부터 날리더라고요. 뭐, 나 때문에 자기 인생 망할 뻔했다나? 애초에 내 가사 아니었으면 올라가지도 못할 곳이었는데.”

“그래도…….”

“세미파이널인 만큼 최고의 가사를 준비해야 하지 않겠냐고, 그래서 시간이 조금 걸렸다고 했죠. 가사 쭉 보더니 납득하더라고요. 납득해야지, 그게 어떤 가사인데. 그리고 알잖아요, 부영만 예술병 걸린 거. 영감을 얻기 위해 잠시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있다 왔다고 하니까 X나 감명 깊어 하던데요?”

“고생 많았어요.”

“아니요. 오히려 고마워요. 언젠가 청산해야 할 생활이라고 생각했어요. 부영만 밑에서 따까리 노릇 해야 하는 것도 지겨웠고.”

얼음 팩으로 눈가 주변을 문지르던 글루미가 주먹을 내밀었다. 잠시 의도를 파악하다가 나도 주먹을 내밀어 가볍게 부딪쳤다.

“나중에 가사 필요한 일 있으면 연락해요. 그리고 내일 꼭 생방송 봐요.”

“물론-”

지금쯤 눈에 불을 켜고 가사를 외우고 있을 부영만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기브미캐시’ 세미파이널 생방송을 앞두고, 거실에 다 같이 모여 앉으면서도 멤버들은 여전히 의문이라는 반응이었다.

“이걸 왜 봐요? 그 재수 없는 부영만이 나오는데?”

“그니까- 승빈이 너 힙합을 좋아했어?”

“봐 봐, 이게 아주 역사적인 순간이 될 거거든.”

“역사적인 순간?”

“응. 재밌을 거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들 앞에서 나는 여유롭게 콧노래를 불렀다. 내일도 음악 방송 무대가 있었지만, 이건 다 같이 볼 만한 가치가 있었으니까.

[영맨: Forever young]

드디어 영맨의 무대가 시작됐다. 가장 이슈가 되는 인물이라 그런지, 순서도 딱 마지막이었다. 하이라이트가 되겠네. 물론 그게 그가 바라던 결과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하루 동안 기를 쓰고 가사를 외웠구나, 그 점은 박수 쳐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한국어 가사를 듣던 윤빈 형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것이다.

“근데 가사가…….”

“왜요?”

“저거 웨스트스타의 라이프스네버스탑 가사 같은데……?”

한국어를 듣거나, 보면 즉시 영어로 번역해서 이해하는 윤빈 형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역시 형처럼 눈치챈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영맨 방금 가사 왜 이렇게 익숙하지?]

(사진)

오늘 ㅈㄴ 잘했긴 했는데 가사들이 죄다 어디서 본 거 같냐 왜;;

-저거 그냥 번역한거잖아;;

-미X놈 다른 것도 아니고 저 유명한 곡 가사를 베낌?

-아니 모르고 베낀 거야 아니면 우리가 모를거라고 생각하고 베낀거임?

-ㅈㄴ소름

-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영어가사는 블랙드롭 ‘한바탕’ 가사 영어번안한거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얘가 쓴 가사가 하나도 없어 그러면?

-중간에 ㅈ구린 가사만 안 베낀 거 같음

이로써 부영만은 ‘대필 래퍼’가 아니라 ‘표절 래퍼’가 되었다. 무대를 마치고 승리를 예감한 듯 방청객과 무대 이곳저곳을 달리며 기쁨을 만끽하던 부영만에게 마지막 박수를 쳐 줬다. 잘 가, 영만아. 멀리 안 나갈게.

생방송이라 그런지 방송이 난리도 아니었다. 사실 무대 자체로 보면 잘한 건 맞았다. 심지어 명곡의 가사를 그대로 가져다 썼으니 랩 자체도 좋을 수밖에. 그래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대부분 영맨에게 투표했다. MC가 영맨의 승리를 얘기하려던 찰나, 급하게 뛰어온 한 스태프가 뭐라고 귓속말하는 내용이 찍혔다. 그리고 그걸 들은 MC는 판정 보류를 외쳤다.

이 모든 상황의 한가운데에서 부영만의 표정이 볼 만했다. 당황스러움과 짜증, 분노가 어지럽게 섞인 표정이었다. 결국 소식을 전달받은 건지 부영만이 급하게 현장을 뛰쳐나가는 것까지 생방송으로 송출되었다.

이제는 부영만이 글루미가 자신의 가사를 대필했다며 물귀신 작전을 한다고 해도 대중은 믿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글루미의 가사와 분위기를 그대로 베껴 놓고서는 뻔뻔하게 덤탱이를 씌운다고 하겠지. 내가 글루미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세미파이널 이후 부영만은 완전히 신뢰를 잃었다. 그를 무지성으로 지지하던 힙찔이들도 그가 가사 하나 스스로 메이킹하지 못하는 ‘짜깁기 래퍼’라는 것을 알고 더 큰 분노를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강도현에 대한 조롱과 실력 논란은 묻히게 되었다. 오히려 강도현이 그동안 사운드 클라우드에 올렸던 자작 랩들이 수면 위로 공개되면서 영맨과 맞먹는 실력인데 직접 랩 메이킹도 한다며 180도 달라진 여론이 형성되었다.

“이게 이렇게 해결되네.”

강도현은 가만히 있었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일이 척척 해결된 게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내게 연신 고마워하던 글루미에게는 회사에 가사를 넣어 보는 걸 추천했다. 그냥 놔두기에는 너무 아까운 재능이었으니까.

* * *

그리고 다음 날, 강도현은 사운드 클라우드 계정에 자작곡을 올렸다. 부영만에 대한 분노나, 자극적인 흥미만을 추구하고 자신을 비난했던 대중에 대한 비판을 했을 거라는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평온하고 팬들에 대한 감사가 담긴 곡이었다. 곡을 들으면서 옅게 웃었다.

‘강도현답네.’

강도현다운 정면승부였다. 하여간 뭐 하나 피해 가는 법이 없는 녀석이었다.

[모두가 날 믿어 줄 거라는 착각은 버린 지 오래야

나를 믿어 주는 사람들을 위해 살기에도 삶은 너무 짧아

걱정 마 이 정도로 무너질 만큼 무른 사람은 아니니까]

샤워를 마친 강도현이 주변을 기웃대길래 바로 눈치를 챘다. 내가 제 쪽을 바라보자 괜히 딴짓을 하며 넌지시 물어보는 거 아닌가. 본인 딴에는 지나가듯 물어본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누가 봐도 반응이 궁금한 사람 같았다.

“노래 올라온 거 들어 봤냐?”

“응.”

“어때?”

“잘했어. 랩도 가사도 다.”

“응?”

“잘했다니까?”

내가 바로 칭찬을 할 거라고 예상 못 했는지 강도현이 뚝딱거리기 시작했다. 멀뚱멀뚱 서 있는 강도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돌아섰다.

평소였다면 오그라드는 가사를 잘도 썼다고 놀렸겠지만, 강도현의 열정과 실력을 알기 때문에 기특하기까지 했다. 잊고 있었지만, 강도현은 이미 시작부터 거의 모든 영역에서 A등급을 가지고 있던 놈이니까.

“뭐야, 뭐 잘못 먹었냐?”

“이 X끼는 칭찬을 해 줘도 난리야-”

“그래, 이래야 문승빈 같지.”

아무리 생각해도 사이좋은 청춘 만화는 글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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