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모두의 예상대로 크리드의 이번 활동 사전 녹화 당첨 경쟁률은 이전 활동에 배로 높아졌다. 정각에 신청 버튼을 눌렀음에도 실패했다는 수많은 클로버의 인증이 있었다. 대리를 구하는 데 깨진 돈을 생각하면 속이 쓰렸지만, 사전 녹화 무대를 보면서 문스트럭은 다시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돈이 행복을 만드는구나…….’
컴백 주에는 추가적인 인트로 무대가 있다. 각 앨범마다 앨범 전체를 아우르는 인트로가 들어가는 크리드이기 때문에, 본무대 퍼포먼스만큼이나 퀄리티 있는 무대가 예상됐다. 게다가 콘서트에서는 인트로 무대를 하지 않기 때문에 이 무대를 직관할 수 있는 건 여기 현장에 있는 사람들뿐이다. 희소성 있는 무대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값을 다 했다.
[What is your Definition?]
이번 인트로 퍼포먼스에는 캐리어가 사용됐다. 캐리어를 끌고 무대 쪽으로 걸어 나오는데, 완벽한 피지컬들 때문에 공항에서 열린 패션쇼를 보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화려해진 콘셉트에 맞게 이전 활동들보다 더 실험적인 머리색과 스타일링을 볼 수 있었다. 푸른색과 흰색 조명 아래에서 새하얀 제복을 입고 있었다. 각 잡힌 걸음과 절도 있는 안무는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앨범 전곡이 매시업 되어서 중간중간 어떤 노래인지 맞히는 재미도 있었다.
“인트로 캐리어 퍼포먼스 어땠어요?”
“너무 멋있었어!”
“최고였어!”
“이거 유현이 형이 제안한 아이디어였어요!”
“정유현! 정유현!”
무대를 마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천진난만한 본모습으로 돌아오는 멤버들이었다. 승빈이와 윤빈의 선창을 시작으로 현장은 잠시 정유현의 이름을 외치는 클로버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유현이 형 귀 빨개져, 그만 해-”
“아니야, 이 형 은근히 즐기고 있다니까? 입꼬리 올라간 거 보이죠, 클로버?”
“귀여워!”
“그렇게 말하면 클로버들 더 할 거라고-”
놀리는 재미에 정유현의 이름을 더 외치던 주변 클로버들은 잠시 멈칫했다.
“어떻게 알았지……?”
“반응이 저런데 어떻게 안 놀려, 유현아!”
녹화 중간에 모니터링을 하거나, 헤어와 메이크업을 수정할 때도 크리드는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매 활동마다 그러기에 한 번은 팬 사인회에서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 짧은 시간에도 클로버랑 노는 게 재밌다는 이유였다.
“저, 머리 어때요? 백발 진짜 오랜만에 했는데.”
“너무 예뻐!”
“잘 어울려!”
가끔은 투마이월드 당시 말랑했던 열여덟이 그립기도 했지만, 이미 성인이 된 승빈에게서 과거의 모습을 찾는 건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무 살의 백발은 그 이상의 충격이었다. 날카로워진 턱선과 젖살이 빠진 얼굴에서 보는 백발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 줬다. 투마월 때는 하얀 아기 포메라니안 같았는데, 지금은 덜 자란 늑대개를 보는 거 같았다. 저러다가도 입 안이 다 보일 정도로 웃으면 다시 포메라니안이 되지만.
“머리 안 아팠어?”
문스트럭도 처음에는 백발이 너무 예쁘다는 말부터 나왔지만, 이성이 돌아오고 나니 저 색이 되는 데까지 얼마나 탈색을 반복했을까 걱정이 들었다.
“머리요? 이미 투마월 때 했었던 머리라 별로 안 아팠어요! 걱정 마세용.”
“…마세용?”
“귀여워!”
“뭐야, 문승빈. 지금 애교한 거야?”
“무대하느라 혀에 힘 풀린 거거든?”
역시 기회를 놓치지 않는 강도현이다. 요새 더 투닥거리게 된 거 같은데, 찐친을 넘어서 현실 형제 같다고 해야 하나.
“네~ 머리색 예쁘게 바꾼 크리드, 녹화 다시 시작할게용~”
말투를 따라 하는 피디의 장난에 승빈이 질끈 눈을 감았다. 심장이 아플 정도의 귀여움이었다. 덕분에 주변의 클로버들만 심장이 남아나지 않았다.
[망설임 따윈 Get away
내가 선택한 이 순간 Destiny
저 지평선 너머의 Destination
마침내 확신해 이곳이 My Definition]
그사이 전체적으로 키가 더 큰 것인지 무대가 더 꽉 차 보였다. 이전 활동곡들보다 템포가 빠른 곡이고, 중간중간 벅차오르게 하는 포인트가 많았다. 문스트럭이 개인적으로 애정하는 승빈의 정제되지 않은 거친 창법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날카롭지만 째지지 않는 고음도 목소리가 가진 강점이었다.
게다가 연기 활동이 무대에도 영향을 준 것 같았다. 카메라 원샷이 잡힐 때마다 0.1초 만에 반응하는데, 자신의 파트가 아닐 때에도 가사에 딱 맞는 표정과 제스처를 해냈다. 세계관만 성장한 것이 아니었다. 자아 찾기 프로젝트는 어쩌면 승빈의 아이돌 능력치 완성기를 보여 주기 위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발자국 없는 길에 두려워 마
누군가의 걸음을 맞출 필요 없지
새롭게 만들어 낸 My definition
이제 모두 내 뒤를 따라]
차지운이 작업한 가사도 크리드라는 그룹이 걸어온 시간을 담고 있어서, 멜로디만큼이나 가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지도 하나 없이 항해해
무지도 가끔은 짜릿한 법
누구도 발 딛지 못한 미지의 땅
수평선 너머 손 닿을 듯 가까워져]
오랜만에 듣는 박선우의 초저음 랩이었다. 한동안 보컬을 하거나, 원래 톤보다 살짝 높은 피치의 랩을 했다. 과거 묵직한 랩을 선호하던 팬들은 음원이 공개된 날부터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 축제 분위기였다. 이전부터 파트 분배를 참 똑똑하게 하는 그룹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곡에서는 특히나 멤버들의 강점을 보여 줄 수 있는 파트 분배가 돋보였다. 원래 다인원 아이돌에게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 파트 분배 문제다. 그런데 크리드는 이상하리만치 그로 인한 불만이 없었다.
그렇다고 모두가 똑같은 피자판 분배도 아니었다. 메인 보컬인 승빈과 서브 보컬인 유현의 파트가 다른 멤버들보다 5~10초 정도 많았지만, 멤버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파트를 분배했다. 파트가 비교적 적은 멤버에게는 꼭 킬링 파트를 맡게 했다. 상대적으로 적은 파트일지라도 무대를 보고 나면 확실히 각인될 만한 파트 분배였다.
멤버인 윤빈이 프로듀싱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같이 생활하면서 오랜 시간을 보낸 만큼 서로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번 노래는 멤버들이 만장일치로 고른 곡인 만큼 파트에 대한 이해도도 높았을 것이다. 여러모로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무대였다.
오늘도 역시나 역조공이 준비되어 있었다. 귀여운 비행선 그림이 그려진 도넛과 커피였다. 그리고 뮤직비디오에서 본 티켓이 들어 있었다. 한 장만 들어 있는 줄 알았는데 일곱 장 모두 들어 있었다.
“아낌없이 주는 크리드냐고-”
그런데 티켓을 유심히 보니 큐알 코드가 찍혀 있었다.
“이게 뭐야?”
호기심에 곧장 인식을 해 보니 8비트 캐릭터 게임 화면이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이번 활동 멤버들의 캐릭터였다.
“귀여운데? 근데 게임을 하라고? 갑자기?”
간단한 조작키로 장애물을 피하는 게임이었다. 문스트럭은 승빈의 캐릭터를 선택했다. 최애의 캐릭터로 하니 어떻게든 죽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더 열정적으로 게임에 임했다. 다행히 난이도가 높거나 스토리가 긴 게임은 아니었다. 클리어가 뜨자 승빈의 영상 메시지가 떴다.
[미션 클리어! 오늘도 응원해 줘서 고마워!]
“게임도 만들고, 코어 이번에 신경 많이 썼네-”
짹짹이에 들어가 보니 이미 게임에 대한 글이 올라와 있었다.
[우리도 게임하게 해달라고 @CORE_official]
[이거 클리어하면 뭐 나와?]
-애들 영상 메시지 나온대
└겜알못은 어떻게 살라고;;
└큐알 보내주시면 제가 깨드릴게요
상부상조하는 팬들이 영상 메시지를 올리기도 했지만, 어쩐지 영상 메시지보다 게임에 관심이 쏠린 듯했다.
‘배보다 배꼽이 커졌네…….’
* * *
4집 활동의 시작과 동시에 엄청난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다. 음악 방송과 화보 촬영, 국내외 인터뷰, 자체 콘텐츠 촬영과 위튜브 콘텐츠 촬영까지, 눈코 뜰 새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호수처럼 잔잔했던 활동에 누군가 커다란 돌을 던졌다.
“이게 뭐야?”
[‘기브미캐시’ 출연자 영맨, 크리드 강도현 저격?]
대놓고 강도현의 실명을 언급한 기사의 내용은 더 가관이었다.
[KM 채널의 랩 서바이벌 ‘기브미캐시’의 참가자인 랩퍼 영맨이 크리드 강도현을 저격한 듯한 가사로 논란이 되었다. 영맨은 2차 프리스타일 대결에서 아이돌 래퍼들의 모순을 꼬집는 가사의 랩을 선보였다. 아이돌 출신의 준수한 외모와 거침없는 가사로 일각에서는 VM 연습생 출신이었던 그가 같은 시기 연습을 한 연습생 출신인 강도현을 저격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졌다…….]
“영맨은 또 뭐야?”
‘기브미캐시’는 씨넷의 ‘쇼유어캐시’의 포맷을 그대로 베껴서 방영 전부터 논란을 가져온 프로그램이다.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랩 네임에 검색해 봤고, 뜻밖의 얼굴에 하마터면 마시고 있던 물을 내뿜을 뻔했다. 당황해서도 아니고, 웃겨서.
“부영만? 준수한 외모?”
부영만을 여기서 다시 만날 줄이야! 김병대가 들어오기 직전에 VM에서 퇴출당한 연습생이었다. 나름 VM에서 어렸을 때부터 데리고 있었던 연습생이었다. 그런데 마의 16세를 넘지 못하고 점점 역변한 거다. 그래도 5년 이상 연습시킨 정이 있어서 문어대가리가 엄청 감싸 돌긴 했다. 대충 버텼으면 데뷔도 문제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 발로 퇴출길을 걸었다.
본인 말로는 아이돌 음악은 자신의 예술적 감각을 담아내기에는 너무 경박한 음악이라서 스스로 나간 거라고 했지만, 허울 좋은 핑계였다. VM 입장에서는 갑자기 말도 없이 몸에 타투를 하고, 예술병 걸린 연습생을 데리고 있는 리스크를 감당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때도 쟤는 당연히 미성년자였다. 이름에 콤플렉스가 상당한 녀석이었는데 영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을 줄이야.
“무슨 가사를 썼길래 이 난리인 거지?”
호기심에 찾아보니 정말 가관이었다.
[난 꼭두각시가 되고 싶지 않아 박차고 나왔지 VM
음악한다는 놈이 하는 거라곤 뻐끔 Like a Fish
할 줄 아는 거라곤 날 뽑아 줘요 팔로워님들
얼굴도 구분 안 되는 무리 속 눈부셔 외치는 가오 없는 X끼
내가 Real Hiphop을 하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 한 거 기억나?
밤길 조심해 손모가지 날아가기 전에
아이돌? 넌 그저 영혼 없이 춤추는 AI, doll]
헛웃음이 나왔다. 아이돌 래퍼 저격이야 뭐, 힙합 한다는 래퍼들 사이에서 밥 먹듯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닥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네들의 고정 레퍼토리 아닌가. 하지만 부영만의 저격이 가져온 여파는 이전과는 결이 달랐다. 일단 부영만이 이전에는 아이돌 연습생이었지만 이제는 그 이미지를 버리고 강하고, 거침없는 가사로 랩을 한다는 점이 컸다. 게다가 다른 래퍼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봐줄 만한 얼굴이라는 점도 여론을 부영만 쪽으로 가져오게 했다.
“야, 기사 봤냐?”
“부영만, 웃기는 놈이. 그 말을 내가 했냐? 퇴출당하는 날 문어대가리가 했지. 어이가 없어 가지고…….”
“근데 영만이 용케 영맨이라고 발음하네. 저것도 영만이라고 발음할 줄 알았는데.”
“X친… 나도 똑같은 생각함.”
코어와 강도현 모두 무대응으로 맞설 생각이었다. 부영만의 세 치 혀만 아니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