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뭐야, 이번엔 단체로 왔네?”
“매번 저만 보니까 디렉터님이 지겨워하실 거 같아서요. 그리고 멤버들이랑 오면 더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올 것도 같고?.”
그동안 멤버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오해나 디렉터와 얘기를 나눴지만, 이렇게 단체로 만난 건 정말 오랜만이긴 했다.
“첫 번째 이유는 오케이, 근데 난 별로인 아이디어에는 가차 없는 거 알죠?”
“네!”
“상처받지 말라고 미리 말해 두는 거예요.”
“네…….”
나는 여러 번 겪은 분위기여서 아무렇지 않은데, 웃으면서 들어온 멤버들의 표정에 긴장감이 보였다. 아마 오해나 디렉터가 입술을 꾹 깨문 채 웃음을 참고 있는 줄도 모를 것이다.
“와, 디렉터님 말에 제가 벌써 상처인데요? 저 진짜 지겨우셨던 거예요?”
“노코멘트 하겠어요.”
이거 봐라, 벌써 장난치고 싶어서 안달 나셨는데 뭘.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표정을 가다듬고 평소보다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회의 시작해 볼까요?”
멤버들 모두 나름대로 철저히 준비를 해 왔다. 지운이 형은 노트 가득 아이디어로 채워 왔는데, 괜찮은 아이디어가 많았다. 1, 2, 3집 동안 능력을 완성한 멤버들이 드디어 학교 밖으로 떠나 세상으로 나아가기 시작하는 것을 전체적인 앨범의 스토리로 잡자는 의견도 적절했다. 특히 유현이 형은 PPT까지 제작해 와서 오해나 디렉터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와…….”
“형이 직접 만든 거죠?”
‘하나도 안 변했네…….’
내용보다 보노보노 뺨치는 디자인 때문인 게 함정이었지만.
“와… 유현 군, 의외로 미감이-”
“내용에 집중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풉!”
뻔뻔한 유현이 형의 태도에 오해나 디렉터와 선우 형이 웃음을 참지 못했고, 주변 사람의 감정에 잘 동요하는 윤빈 형도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들썩였다. 하지만 유현이 형은 이런 반응에도 굴하지 않고 묵묵히 프레젠테이션을 이어 갔다.
“여기는 효과에 집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슈웅-’
‘뾰로롱-’
그냥 기본 PPT도 아니고 중간중간 나름의 애니메이션 효과도 넣은 노력이 가상했다. 심지어 효과음까지 넣었다.
‘뿌듯해하지 말라고……!’
미리 프린트해서 줬던 콘셉트 기획안은 정말 좋은 아이디어가 많았는데, PPT 때문에 기억이 하나도 안 날 지경이었다.
“이상입니다.”
“잘, 잘 봤어요, 유현 군. 굉장히 신선한 아이디어가 많았어요. 특히 캐리어를 소품으로 이용하자고 한 게 인상 깊었어요.”
“감사합니다.”
“저, 하나 제안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멤버들과 오해나 디렉터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다들 내가 뭔가 특별한 아이디어를 제안하길 바라는 눈빛이었다.
“비행선을 하나 제작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CG로라도.”
“비행선?”
“응. 이번 앨범이 우리가 가지고 있던 능력을 완성하고 학교 밖으로 벗어나는 거잖아. 항해를 시작하는 거인데, 그 배경이 하늘이 좋을까 바다가 좋을까 고민했거든. 근데 비행선이면 둘 다 할 수 있는 거잖아. 하늘을 바다 삼아서.”
“약간 스팀 펑크 분위기 나게?”
“오, 윤빈 형. 발음 미쳤다.”
“네. 판타지적인 요소가 뮤직비디오에 많이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각자의 목적지를 담은 티켓을 제작하는 것도 좋겠는데?”
하나의 물꼬가 트이니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곁가지를 치며 늘어났다. 나는 프로모션으로 챌린지를 제안했다.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단어나, 목표를 주제로 짧은 영상 챌린지를 하는 것이다.
[What is your DEFINITION?]
[What is your DESTINATION?]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정의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요즘 소위 말하는 ‘갓생’이라고 하는데, 어떤 목표를 세우고 이뤄 가는 과정 자체에 뿌듯함을 느끼는 거 같아요. 그걸 보면서 자극을 받는 사람들도 많고요. 이런 점을 자극하는 챌린지를 해 보면 어떨까 생각해 봤습니다.”
“춤 챌린지가 아니고?”
“응. 춤이 들어가면 진입 장벽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거 같아. 자연스럽게 우리 노래를 접하게 하는 것에 중점을 뒀어.”
이외에도 강도현이 정해진 번호를 누르면 멤버들의 음성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이벤트를 제안했다. 오해나 디렉터는 간간이 리액션을 해 주면서 멤버들의 아이디어를 모두 메모했다. 말로는 별로인 아이디어는 그 자리에서 퇴짜 맞힐 거라고 했지만, 역시 일단 모든 아이디어를 수집하는 사람다웠다.
“승빈 군이랑 회의할 때도 몇 페이지가 넘어가도록 메모했는데, 일곱 명이랑 같이하니까 아이디어가 끝이 없는데요?”
“저희 아이디어 괜찮았죠?”
“기대 이상이었어요.”
“다행이다!”
저 아이디어 중 몇 개가 살아남을지 모르겠지만, 오해나 디렉터의 실력을 믿기로 했다.
그리고 드디어 뮤직비디오 촬영 날.
“우와아-”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에 등장한 거대한 배를 보고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제안했던 나조차도 이렇게 큰 배가 만들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아이고, 우리 크리드 왕자님들 오셨네!”
멀리서부터 감독님의 목소리가 자기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데뷔곡부터 쭉 뮤직비디오를 담당하셨지만 한 번도 저 텐션이 바뀐 적이 없었다.
“우리가 배까지는 제작했는데 비행선 전체는 어렵더라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여기는 비행선이다! 나는 날고 있다! 이렇게 잘~ 생각해 줘야 한다 이거지! 잘할 수 있지?”
“당연하죠!”
“저희 팀에 남우 조연상에 빛나는 배우가 있잖아요~”
“맞아. 승빈이는 못 알아볼 뻔했잖아- 얘가 가수 안 하고 뭐 하는 건가 했다니까?”
감독님의 지나치게 활기찬 목소리와 함께하니 지루할 틈이 없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이 배 위에서 연기를 하는 것에 어색해하던 멤버들도 감독님과 연출 팀의 노력으로 차차 감을 잡아 갔다.
“자! 앞에 장애물이 나타났어! 구름 파도야, 피해야지!”
“여기 쯤에 암석이 있어요, 여기 보세요!”
“뭐야, 이거 움직여요?”
“네~ 그거 만드느라 고생 꽤나 했어요~”
정말 파도를 만난 것처럼 선체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평화로운 항해 장면을 찍을 때보다 더 현장감이 생겼다.
“좀 더 표정 실감나게 할게요~ 따라 하세요, 으아악~!”
“으, 으아악!”
“도현 씨, 웃지 마시고요~”
“…넵!”
지루할 틈이 없는 디렉팅에 전날 밤샘 연습을 했지만 피곤함을 느낄 틈이 없었다.
“자, 핸들 잡고 있던 유현 씨가 잠시 휘청할게요! 휘청하면서 한 손 핸들에서 떼 내고~”
“유현이도 배우 해야겠다, 화면에 잘 나오네~”
“방금 액션 좋았어요!”
“이제 유현 씨 손이 놓친 부분을 승빈 씨가 잡을게요!”
몸이 휘청거릴 만큼의 흔들림은 아니었지만 유현이 형이 기대보다 더 몰입을 잘했다. 덕분에 나도 진짜 표류하는 배 위에서 방향키를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는 사람처럼 연기할 수 있었다.
“승빈이가 왜 연기상 받았는지 알겠네!”
“이제 다른 친구들도 함께 핸들 잡고! 오케이!”
다같이 핸들을 잡자 흔들리던 선체의 움직임이 잠잠해졌다. 정말 모두의 힘을 합쳐서 파도를 건넌 기분이 들었고, 누가 먼저 말할 것도 없이 어깨동무를 하며 서로 안아 왔다. 낯간지러운 건 질색하는 거 같으면서도 이럴 땐 마음이 통하는 것이 신기했다.
“어휴, 방금 장면 못 잡았으면 나 오늘 촬영 못 끝냈을 거야-”
“촬영 끝난 거 아니었어요?”
“원래 오케이 사인하고 좀 더 잡다가 끊거든. 방금 전에 서로 어깨동무한 거 너무 훈훈했는데 놓쳤으면 너무 아까웠을걸? 너희들이랑 작업한 지 2년 정도 됐는데 방금 장면이 제일 멋졌어!”
“감사합니다!”
칭찬에 후한 감독님이지만, 저 정도로 흥분한 반응은 처음이었다. 덕분에 뮤직비디오 완성본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커졌다.
* * *
컴백 예고 기사가 뜨고 클로버들 사이에서는 다음 콘셉트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자아 찾기 시리즈의 마지막 앨범이기 때문에 지금과는 다른 스케일의 음악을 원하는 팬들과 2집과 3집으로 끌고 온 대중성을 유지해야 하기에 이지 리스닝이 나와야 한다는 팬들로 의견이 갈리기도 했다. 문스트럭은 솔직한 마음으로 다시 빡센 콘셉트를 하는 것을 원했다.
[원래 남자 아이돌은 몸이 부서져라 춤 추고 노래할 때 아름다운 거 아니겠냐]
[ㅇㅇ뼈 튼튼할 때 해야지]
티저 사진과 트레일러가 뜨고 문스트럭은 예상보다 더 웅장한 콘셉트에 기쁨을 만끽했다. 특히 오랜만에 백발로 돌아온 승빈을 보고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그동안 연기 활동 때문에 염색모는 꿈도 꾸지 못했는데 이렇게 다시 연예인 머리로 돌아온 것이 감격스러웠다.
[완전 판타지인데?]
[승빈이 백발이라고ㅠㅠㅠㅠㅠㅠㅠㅠ투마월 생각나ㅠㅠㅠㅠㅠㅠㅠㅠ]
트레일러 영상에는 학교 옥상 위에 모인 크리드 멤버들이 등장했다. ‘신세계’ 뮤직비디오에서 나온 크레이터 주변으로 멤버들이 모였다. 각자 캐리어와 티켓을 가지고 있었다. 화려하게 바뀐 멤버들의 스타일링에 클로버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경 문승빈 백발 컴백 축
-존버는 승리한다…
-선우 브릿지 ㅈㄴ잘어울려
-재봉이 핑머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지운이 병지 묶은거 아름답다…
-정유현 윤빈 탈색 도랐나
그런데 옥상 위에는 유현을 제외한 여섯 멤버뿐이었다. 실시간 댓글 창에는 유현의 행방을 묻는 댓글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뭐야? 아팠나?
-뭔가 있는거 같은데?
-와중에 완전 세계관 대통합 아니냐고;;
-유현이 어디있냐고 ㅅㅂ
뒤이어 옥상 너머 구름이 가득한 하늘 사이로 거대한 비행선이 나타났다. 그리고 뱃머리에는 유현이 서 있었다. 캐리어를 끌고 비행선으로 향하는 멤버들을 끝으로 영상이 종료됐다.
-ㅁㅊ?
-이제 학교 밖으로 떠나는거구나ㅠㅠㅠㅠㅠ
-졸업한느거냐고ㅠㅠㅠㅠ
-콘셉트 판타지물인가봄;;
└오타쿠 심장 뜀
-재봉이는 아직 학생인데;;
-이제 더 넓은 곳으로 가겠다는 의미인 듯
-시리즈 시작 장소에서 끝내는 거네
└나 이런거 보고 우네…
마침내 뮤직비디오가 공개된 날은 잠시 조회수 프리징이 걸릴 정도였다. 세계관 맛집으로 불리던 크리드 세계관의 첫 챕터가 끝났다는 소식은 케이 팝 팬들에게는 둘도 없는 흥밋거리였기 때문이다.
“우리 애들, 어디까지 슈스가 되는 거냐…….”
뮤직비디오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트레일러 때 의문을 불러일으켰던 유현은 비행선의 조종사 역할이었다. 비행선을 타고 하늘을 항해하면서 그동안 타이틀곡 뮤직비디오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관련된 떡밥을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 요소였다. 멤버들의 연기 실력도 갈수록 성장했다고 실감했다. 그리고 위기를 맞이한 멤버들이 서로의 손을 합쳐서 핸들을 잡아 파도를 넘었을 때와 서로 끌어안는 장면에서는 애틋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크리드는 가족이야ㅠㅠㅠㅠ
-노래는 ㅈㄴ웅장한데 뮤직비디오는 사람을 울리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승빈이랑 유현이 연기 미쳤어
-저거 다 구라인거 아는데도 애들을 막 응원하고 싶어짐
-와중에 선우 웃참 실패한거 여기서도 나오넼ㅋㅋㅋㅋㅋㅋ
└우리 선우는 그냥 웃음이 많은 애였던거야
뮤직비디오가 끝나는 타이밍에 승빈의 크림 메시지가 왔다.
[승빈이!: 우리 뮤직비디오 잘 봤어?]
[승빈이!: 빨리 음방 돌면서 클로버 보고싶어]
“이번 활동도 빠짐없이 가야지.”
문스트럭은 곧장 통장 잔고를 확인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거지 같은 회사 퇴사를 막게 하는 건 오직 최애뿐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