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크리드의 자아 찾기 프로젝트의 마지막 앨범 ‘Definition’ 막바지 준비만이 남았다. 데뷔 프로젝트로 시작된 4부작의 마지막이 생각보다 늦어졌다. 토스맨으로 얻은 해외 인기 덕분에 예상보다 이르게 시작된 해외 투어가 가장 큰 요인이었다.
노래 선정부터 특히나 공을 들인 앨범이었다. 성장 서사의 마지막 챕터를 장식하는 앨범이기 때문에 크리드의 색을 확실하게 정의할 수 있는 곡이어야만 했다. 그래서 소속사 측에도 데모곡 수집부터 멤버들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존중해 주길 요청했다.
멤버가 일곱이나 되니 분명 의견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섯이 모두 같은 곡을 골랐다. 블라인드로 투표한 거라, 아무도 예상 못 한 결과였다. 윤빈 형 역시 프로듀싱에 참여한 후보곡들 중에서도 이 곡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다른 곡을 선택한 사람은 지운이 형이었는데, 알고 보니 형이 작사에 지원한 곡이어서 형평성을 위해 일부러 다른 곡을 골랐던 것이었다. 결국 만장일치인 셈이다. 회사 측에서도 항상 의견이 갈렸던 우리가 한 번에 의견 통합을 했다고 하니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우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멤버들까지 포함한 가사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지운이 형의 가사가 선정된 것이다. 형의 가사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멤버들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다. 가사를 보면서 지운이 형과 느낌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형의 가사일 줄은 몰랐으니까.
“타이틀곡 작사는 처음 아니야?”
“맞아. 수록곡엔 모두 한 번씩 작사 참여했지만, 타이틀은 처음이지. 축하해요, 형!”
“고마워-”
“어쩐지, 가사가 너무 좋더라!”
지운이 형의 작사 실력은 회귀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생존을 위한 작사 실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뿐 아니라 프로 작사가들 사이에서도 인정받았다는 것이 내심 뿌듯했다.
노래 제목은 앨범명과 같은 ‘Definition’이었다. 기나긴 여정의 한 챕터가 끝남을 알리는 깃발을 꽂으며 크리드의 방향과 정체성을 정의한다는 스토리를 담고 있었다. 지난 앨범이 이지 리스닝으로 대중성을 공략했기에, 이번 곡은 조금 무게감을 더했다. 쉴 틈 없이 몰아치는 비트와 중독성 강한 후렴구 멜로디가 특징이다. 처음 노래를 들었을 때, 항해를 앞둔 모험가들과도 같은 곡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가사도 비슷한 분위기로 선정되어서 더욱 몰입해서 녹음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윤빈 형이 프로듀싱에 참여하고 지운이 형이 작사한 곡이어서 더 의미 있기도 했다. ‘Ideal’ 활동 이후 오랜만에 윤빈 형의 작업실로 모였다.
“오~ 이번에 지운이 형도 디렉팅 봐주는 거야?”
“윤빈이 옆에서 조금 도와주는 거지-”
“에이. 작사가가 쓴 가사의 의도대로 잘 부르는지 보는 것도 중요한 거지!”
쑥스러워하던 지운이 형도 멤버들의 칭찬과 띄워 주기에 금세 자신감이 생겼다. 우리 팀의 가장 큰 장점이다. 가끔 장난으로 놀릴 때가 있지만, 누가 기죽거나 자신감 없어 하는 꼴은 또 절대 못 본다. 서로가 서로의 자존감 지킴이라고 해야 할까?
“일단 모두 한 번씩 풀로 불러 보고 파트를 확정 지을게.”
“네! 누가 먼저 녹음할까?”
“리더 먼저!”
유현이 형은 군말 없이 녹음실로 들어갔다. 녹음은 단 2번 만에 끝날 정도로 역시나 완벽한 실력이었다. 저 2번마저도 윤빈 형과 지운 형은 오케이 했는데, 본인이 만족하지 못해서였다.
“형, 랩도 해 볼래요?”
“비트 줘 봐.”
“진짜?”
윤빈 형이 유현이 형 얼굴을 한 번, 고개 돌려 우리 얼굴을 한 번 보며 물었다. 정말로 그래도 되냐는 뜻이었다.
“와, 윤빈 형. 이거 얼마 없는 기회예요. 빨리 비트 틀어요.”
“승빈이 말이 맞아, 저 형 저렇게 텐션 올라 있는 거 1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하잖아요.”
평소의 유현이 형이었다면 보컬인 내가 왜 랩을 하냐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곡과 콘셉트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녹음 전부터 묘하게 텐션이 올라가 있었다.
“1절 랩 파트부터 해 볼게요-”
모두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뭐든 평타 이상은 하는 형이니까- 처음 하는 랩도 능숙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딱 3분 뒤 생각을 고쳤다.
[지도 하나 없이 항해해
무지도 가끔은 짜릿한 법
누구도 발 딛지 못한 미지의 땅
수평선 너머 손 닿을 듯 가까워져]
이렇게 정직한 랩은 생전 처음이었다. 투마월 파이널 때 랩으로 고생했던 나보다 더한 정직함이었다. 그 와중에 아나운서 뺨치는 발음이어서 더 웃음이 나왔다. 뭐라 말해야 할지 고민하던 윤빈 형이 멋쩍게 웃었다.
“…수고했어요, 형!”
“응!”
유현이 형도 자기 객관화는 잘되는 사람인지라, 랩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도 인지한 듯했다. 깔끔하게 포기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녹음실을 빠져나왔다. 한결 차분해진 형의 귀가 붉어져 있었다.
“유현이 형도 승빈 스쿨 해야겠다.”
“랩까지 하면 나 진짜 상표권 내고 학원 차릴 거야.”
“와, 수강생 개 많을 듯.”
“응. 강도현, 너도 강사로 초빙할 거임.”
“응. 정중히 거절할게.”
“나도 도현이가 강사면 등록 안 할래.”
“우와, 갑자기 의욕이 막 넘치는데? 형이 제 첫 번째 수강생 하는 거 어때요?”
유치하기 짝이 없는 대화지만 끊임없이 웃음이 나왔다. 인정하기 부끄럽지만, 멤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반의반도 못 웃고 지냈을 거 같다.
뒤이어 내 녹음이 시작됐다. 박자가 쉴 틈 없이 쪼개지는 노래여서 박자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맛있게 부르는 게 키포인트였다.
[망설임 따윈 Get away
내가 선택한 이 순간 Destiny
저 지평선 너머의 Destination
마침내 확신해 이곳이 My Definition]
발음이 비슷한 단어로 끝나는 파트는 최대한 발음을 신경 쓰며 불렀다. 라임으로 적용되는 비슷한 발음은 조금씩 씹어 부르면서 들었을 때 쫀득하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고 싶었다.
다들 내가 랩 파트를 하는 것에 집중하는 게 눈에 보여서 웃음이 터질 뻔했다. 특히 마음에 든 가사여서 어차피 나는 랩 파트를 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따로 연습까지 해 갔다. 확실히 투마월 때는 포인트를 높여서 해냈다면, 이제는 실력이 축적되면서 기본 실력으로도 충분히 랩다운 랩을 할 수 있었다.
[모두가 꿈꿨지만 누구도
도착하지 못한 미지의 Utopia
하지만 의심 따위 하지 않아
깃발을 쥔 내 손이 가리킨 곳엔
확신만이 존재하니까]
크리드로 데뷔하고 지금까지의 여정이 잘 담긴 가사였다. 스스로 확신이 서지 않아 고민하던 순간에도 멤버들과 함께라면 언제나 목표를 향한 길이 뚜렷해졌다. 한 줄 한 줄 불러 가면서 저절로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노래를 부르면서 머릿속으로는 오해나 디렉터와 어떤 얘기를 할까 정리가 되고 있었다.
[발자국 없는 길에 두려워 마
누군가의 걸음을 맞출 필요 없지
새롭게 만들어 낸 My definition
이제 모두 내 뒤를 따라]
같은 경험을 한 지운이 형이 쓴 가사여서 더 공감이 갔다. 목 상태도 최상이어서 더 거침없이 녹음했다. 이전에는 아무리 준비를 많이 했다고 해도 원 테이크로 끝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원 테이크로 오케이를 받았다.
“오늘 목 상태 최상인데?”
멤버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괜찮았어요?”
지운이 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역시 MC 승빈이라니까?”
“투마월 때 문승빈 어디 갔냐?”
순간 장난기가 발동했다. 일부러 표정을 냉하게 바꾸고 무표정으로 선우 형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내가 아직도 문승빈으로 보여?”
“아, 그런 장난 치지 말라고, 네가 하면 진짜같다고!”
“푸하하하! 선우 형, 지금 쫀 거야?”
“재봉아, 웃어?”
“…아뇨.”
“아, 재밌다.”
“형, 앞으로 연기 하지 마요! 안 그래도 저런 장난 치면 속는데 연기 더 했다가는 사기도 치겠어.”
“재밌잖아~”
내 연기에 속은 게 분하다는 듯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는데 하여간, 저 둘의 반응이 제일 재밌다.
큰 어려움 없이 녹음을 마칠 수 있겠다 생각했지만, 예상치 못한 복병이 등장했다. 그건 바로 지운이 형이었다. 본인이 쓴 가사로 된 노래를 부른다는 것에 부담감을 느껴서일까. 원래 지운이 형은 우리 중에서도 녹음을 빨리 끝내는 멤버였다. 제작자의 의도를 빠르게 파악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더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제작자이기 때문에, 이상적으로 생각한 단계에 충족하지 못한다면 만족할 수 없는 거겠지.
“미안, 나 때문에…….”
“에이, 지운이 형은 미안해 금지령 내려야 해.”
“맞아요, 형. 우리 선우 형은 미안한 일에도 미안하다고 안 하는데 형은 미안하지 않아도 될 일에 미안하다고, 악!”
“매를 벌어요, 매를.”
“넌 친구가 당하고 있는데 도와주지도 못할망정 꼽을 줘?”
“지운아, 잠깐 나와 봐.”
유현이 형의 한마디에 시끌벅적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형이 지운이 형을 혼낼 리는 없지만, 장난이 오갈 분위기는 아니라는 것을 모두 본능적으로 느낀 거겠지.
“어느 부분이 가장 어려워?”
“제가 쓴 가사인데 제가 집중 못 하는 게 부끄러워요…….”
모두 쉽사리 위로의 말을 할 수 없었다. 지운이 형의 고민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어떻게 해야 힘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내 연기 경험이 떠올랐다.
“형, 제가 파아란 첫 대본 리딩 때 했던 애드리브가 정식 대사가 된 적 있다고 했었죠?”
“…응.”
“저도 그때 같은 고민을 했어요. 제가 제안하고, 만든 대사인데 자꾸 만족이 안 되는 거예요. 백번 읽어도 처음 했던 느낌은 안 나오고, 근데 내가 만든 대사여서 정말 잘 해내야 한다는 압박은 있고. 저 그때 엄청 스트레스 받았었거든요. 그래서 형이 얼마나 고민인지 어렴풋이 알 거 같아요.”
“…….”
“근데 그때 형이랑 멤버들이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요?”
“…응.”
“자기들 눈에는 이미 충분하다고 했잖아요. 그 말 듣는데 이상하게 위로가 되면서 강박이 사라지더라고요? 형은 늘 우리가 잘하고 있다고 하잖아요. 부족해 보여도 형 눈에는 최고라고 하고. 우리도 그래요. 이미 잘하고 있어요. 만약 형이 형에게 만족 못 하는 파트가 있다면 우리가 채워 줄 수 있잖아요. 팀이 좋은 이유 아니겠어요?”
완벽함을 추구하고 노력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완벽함에 잠식되어서 다음 단계를 나아가지 못한다면 오히려 독이 된다. 형의 노력이 독이 되기 전에 짐을 덜어 주고 싶었다.
묵묵히 듣던 지운이 형이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근심 가득하던 얼굴이 한결 가벼워졌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녹음실로 향했다. 도움이 된 걸까, 한결 자유로워진 느낌으로 녹음을 시작했고 마침내 지운이 형도 만족하는 결과물이 나왔다.
“와, 너는 나중에 상담사 해도 되겠다.”
“상담사는 무슨. 너무 붙어 다녀서 여기 여섯 명에 대해 모르는 게 없어져서지.”
“나도 노력해 볼게.”
“응, 넌 좀 노력해야 할 듯?”
“아오, 진짜.”
아, 역시 강도현 놀려 먹기가 제일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