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던 연말 시즌이 지나고, 연초는 정말 오랜만에 여유롭게 보냈다. 콘서트부터 해외 투어, 연말 무대까지 쉴 새 없이 달렸기에 꿀 같은 휴가가 주어졌다. 덕분에 짧게나마 미국에 가서 가족들을 만나고 왔다. 물론 윤빈 형도 함께였고.
그리고 마침내 다가온 설날. 설날은 민족 대명절이면서 동시에 케이 팝 명절이기도 하다. 설날이 되면 모든 아이돌 팬들은 최애의 한복을 기대했으니까. 우리도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오랜만에 ‘스페셜 크리데이’ 촬영이 잡혔다.
이번에도 스타일리스트 스태프들의 열정이 엿보였다. 형형색색의 한복은 도령, 선비, 양반 등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 줄 수 있었다. 각자 마음에 드는 한복을 골랐는데, 나는 망설임 없이 푸른 계열의 두루마기 한복을 골랐다. 내가 좋아하는 색이기도 하고, 팬들이 유독 푸른 계열 옷을 입을 때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끼띠인 만큼 머리에는 토끼 머리띠를 썼다.
“아, 귀여워!”
“승빈아, 너 강아지도 강아지인데 토끼가 되게 잘 어울리네?”
“당근 인형도 가지고 올 걸 그랬네!”
“승빈이가 흰 토끼 했으니까 도현이 검은 토끼띠 씌워야겠다.”
이건 강도현도 똑같이 할 계획이다. 안 한다고 하겠지만 강도현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스타일리스트 스태프들이 눈에 불을 켜고 어떻게 해야 저놈 머리에 머리띠를 씌울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있으니까. 마치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는 쥐 같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강도현은 거울 앞에 서서 박재봉과 한참 동안 호들갑을 떨며 한복 칭찬을 하고 있었다.
“한복 진짜 오랜만에 입어 봐!”
“승빈이 형, 이것 봐요! 잘 어울리죠?”
“도현아, 재봉아. 조금만 얌전히 있으면 안 될까?”
“싫어요-”
“교정기 해서 발음 다 새는 거 봐라.”
“아, 형!”
급격하게 키가 크면서 박재봉은 교정을 시작했다. 얼굴 골격이 크게 자랄 얼굴은 아니지만, 자칫하다가는 턱이 자라 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하는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요 며칠 박재봉이 저기압이었다. 간식거리 먹는 걸 좋아하는 애가 교정기 때문에 껌도 못 씹었다. 씨익 웃을 때마다 교정기가 보이는 게 적응이 안 됐다.
“근데 너, 키 진짜 많이 컸다. 몇이냐?”
“저 오늘 아침에 재 봤거든요? 179 나왔어요!”
“이제 승빈이가 제일 작은 거야?”
“조용히 해라…….”
이미 박재봉이 나보다 한참 클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클 줄은 몰랐다. 그래도 억울했다. 나름 178인데 최단신이라니? 강도현과 박재봉이 양옆에서 어깨동무를 하는데 팔걸이가 된 기분에 절로 정색했다.
“제가 형이랑 어깨동무하는 날이 다 오네요-”
“그만 커, 징그럽다.”
“고기 많이 먹고 쑥쑥 클게요!”
교정기를 드러내며 장난스럽게 웃는데, 장난칠 거리가 떠올랐다.
“고기 많이 먹고? 재봉이, 고기는 씹을 수 있나?”
“와- 진짜 너무해요, 형!”
키는 저만치 컸는데 아직 철부지였다. 삐지려고 하길래 강도현과 함께 열과 성의를 다해 한복 칭찬을 하니 또 금세 화를 풀었다.
“그나저나 오늘 뭐 할까요?”
“설날이니까 떡국 먹지 않을까?”
“에이, 그냥 떡국만 먹을 리가 없지.”
모두 기대 반 의심 반이었다. 일단 세트장은 무난했다. 바닥에 돗자리가 깔려 있었고 윷놀이가 있었다. 설날에 윷놀이 콘텐츠는 무난한 선택이다. 그런데 윷놀이판이 뭔가… 이상했다.
“파, 소금, 떡……?”
“오늘 크리드 여러분이 할 게임은, 떡국 윷놀이입니다!”
“그게 뭐예요?”
윤빈 형은 떡국과 윷놀이 모두 낯설었는지 질문 세례를 했고, 옆에서 설명하던 유현이 형도 설명을 포기하고 빨리 게임이나 하자며 자리에 앉았다.
게임의 룰은 간단하지만 이상했다. 윷놀이를 하면서 말이 놓인 곳의 재료를 가질 수 있다. 대신 말이 잡히면 말 그대로 재료를 빼앗을 수 있다. 마음에 안 드는 재료가 걸리더라도 거부할 수 없다. 정상적인 재료만 있었다면 행복하게 게임을 진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간중간 함정들이 문제였다.
“고추냉이……? 진심이세요?”
“선우 형, 고추냉이로 화낼 때가 아니에요. 대체 떡국에 꿀이 왜 들어가죠?”
“설탕 대신에 넣으면 되겠네! 그치, 승빈아?”
“…되겠냐고요.”
팀은 뽑기로 뽑았다. 나, 박재봉, 윤빈 형 그리고 나머지 넷으로 팀이 정해졌다. 네 명이므로 두 사람이 한 번씩 돌아가며 윷을 던지는 것으로 결정했다.
“시작부터 윷 나오는 거야?”
“오, 떡이다!”
“승빈이 잘 던지는데?”
“한 번 더… 응?”
말이 그만 고추냉이 위로 도착해 버렸다.
“망했다.”
“아냐, 승빈아. 고추냉이로 간 맞추면 될 거야.”
“정말 형이 긍정적인 사람이라서 다행이에요…….”
“전 고추냉이 떡국 싫어요!”
상대 팀은 유현이 형이 먼저 던졌다. 단번에 ‘모’가 나왔고 모두 입이 떡 벌어졌다.
“오, 소금이다!”
‘저 형은 윷놀이도 완벽하네…….’
“그래도 우리는 고추냉이로 간 안 맞춰서 다행이다-”
“아오, 도현아 그만 깐족대.”
“응~ 초록 떡국 먹는대요~”
그때 유현이 형의 두 번째 윷이 떨어졌고, ‘걸’이 떴다. 그리고 여전히 깐족거리던 강도현의 입을 선우 형이 조용히 틀어막았다.
“응, 도현아… 우리 꿀 떡국 먹게 생겼다.”
“으브븝?”
“그러게, 사람이 마음을 착하게 먹어야지-”
망연자실한 강도현을 보고 현장의 모두가 박장대소했다. 나도 눈물이 맺힐 정도로 웃다가 문득 웃을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매운 떡국이랑 단맛 떡국의 대결이라…….’
이후의 경기도 진흙탕 싸움이었다. 1시간이 지났는데 완주한 말이 각자 한 개밖에 없었다. 게다가 재료 라인업도 가관이었다. 떡, 고추냉이, 토마토, 계란……. 누가 보면 토마토달걀볶음 재료라고 생각할 것이다. 상대 팀도 만만치 않았다. 소금, 꿀, 소고기, 대파였다. 떡 없는 떡국이라니.
“정말 불쌍하다… 떡 없는 떡국이면 그건 그냥 국이잖아. 새해에 국만 먹는 우리 멤버들 불쌍해서 어쩌냐…….”
“매운 토달볶 만들어 먹어야 하는 팀도 있는데, 뭐.”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드디어 박재봉이 갈비찜을 가져가면서 게임이 끝났다.
“이건 반찬으로 먹어야겠다.”
잔뜩 신난 박재봉에 윤빈 형이 어떠한 악의도 없이 물었다.
“근데 재봉이, 갈비 괜찮아?”
“…헐!”
기쁨에 세트장을 방방 뛰며 좋아하던 박재봉이 우뚝 멈춰 섰다. 당분간 딱딱하거나 질긴 음식은 먹지 말라고 한 의사 선생님의 말이 머릿속에 재생되고 있겠지.
떡국 만들기는 비교적 수월했다. 박재봉이 매직 핸드이긴 했으나, 윤빈 형이 있어서 큰 문제 없이 떡국을 완성했다. 물론 비주얼이 상당히 독특했다. 토마토 떡국은 처음이었다. 상대 팀 떡국도 멀쩡한 외관이었지만, 그 속 재료를 생각하면 도무지 상상이 안 됐다.
“심사는 여기 있는 스태프분들이 아주 객관적인 시선으로 평가하겠습니다.”
모두 첫 숟가락은 패기 있게 입에 넣었지만, 점점 백기를 드는 스태프들이 속출했다.
“이거 막상막하가 되겠는데요?”
“30여 년 살면서 이런 떡국 처음 먹어 봐요.”
“저희도 이런 떡국 만들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그니까 무난한 재료를 넣으셨어야죠. 이건 제작진분들 잘못이다.”
“도현이가 웬일로 옳은 말을 하지? 너, 강도현 아니지!”
“우열을 가릴 수 없겠는데요?”
“그래도 단 게 낫지 않아요?”
“에이, 매운 게 낫지!”
그사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한 입씩 먹은 선우 형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차라리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는 질문이 쉬울 거 같은데. 이거 진짜 사람이 먹을 게 못 됨.”
한 그릇씩만 만들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아까운 재료들만 죄다 버릴 뻔했다.
썩은 떡국 대결은 결국 무승부로 끝났다. 두 번째 게임은 장난감 활쏘기였다. 투마월 때와 아이돌 운동 대회 이후 오랜만에 만져 보는 장난감 활이었다. 과녁에는 상품과 벌칙이 붙어 있었다. 원판 모양인 과녁을 돌리고 장난감 화살을 쏴서 맞히는 것이다.
“이건 승빈이 형한테 유리한 거 아니에요?”
“나도 안 쏜 지 너무 오래돼서 자신 없어-”
게다가 이번에는 과녁이 정지해 있는 게 아니라 움직이는 거여서 더 확신이 없었다.
“벌칙이 엉덩이로 이름 쓰기, 무반주 막춤 추기, 얼굴 몰아주기? 너무 쎈 거 아니에요? 저희 아이돌이에요!”
“멤버 볼에 뽀뽀하기 넣을까 하다가 바꾼 건데, 그걸로 바꿔 줄까요, 도현 씨?”
“아닙니다. 최고의 벌칙인 거 같아요. 일부러라도 걸리고 싶을 정도예요.”
“그렇죠? 그럼 도현 씨가 너무 원하시니까 이대로 갈게요!”
크리드 스태프 2년 차면 강도현 구워삶기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경기가 시작되고, 아니나 다를까 모두 허공에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지난번에 연습한 거 어디 갔어?”
“단기로 바짝 배웠더니…….”
“승빈이만 믿어야지.”
“자, 승빈 선수, 활을 들었어요!”
역시나 만담 듀오인 강도현과 선우 형이 중계진 역할을 자처했다.
“주몽의 환생을 보는 거 같아요!”
“승몽인가요?”
몹쓸 작명 개그에 일제히 선우형을 바라봤다. 강도현은 대꾸도 하지 않고 멘트를 이어 갔다.
“크리드의 유일한 희망을 쏩니다!”
“어딘가 꽂혔어요! 상품이면 좋겠는데요?”
“결과는… 멤버들과 스태프 점심 쏘기입니다!”
“와아아아!”
모두가 환호성을 터트릴 때 나 혼자만 웃지 못했다. 하필이면 제일 안쪽에 있는 벌칙이었다. 일반 과녁이었다면 10점에 해당하는 곳이라는 게 더 어이없었다.
“승빈 씨, 소감이 어떠신가요?”
“제가 여러분들 맛있는 거 사 드리려고 열심히 쐈습니다.”
“그렇다기에는 과녁에 꽂힐 때 많이 당황한 표정이시던데요?”
“그.럴.리.가.요? 예상하던 결과였습니다.”
“그렇군요. 덕분에 점심 맛있게 먹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점심을 주문해 두고 이뤄진 다음 촬영은 바로 한복 버전 ‘Ideal’ 안무 영상이었다. 정말 한복으로 뽕을 뽑겠다는 제작진의 의지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단체로 나풀거리는 한복을 입고 춤을 추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미국 하이틴 콘셉의 ‘Ideal’을 한복을 입고 추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웃겼다. 이런 언밸러스함이 또 있을까? 결국 마지막쯤에는 다들 멋진 콘셉은 다 뒤로하고 거의 웃음 참기 챌린지가 되었다.
‘어쩌면 클로버는 이걸 더 좋아할지도?’
“클로버 여러분,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떡국도 많-이 드세요!”
“재봉이는 두 그릇 먹었대요!”
“얘, 교정만 아니었어도 한 그릇 더 먹었을 듯-”
“저 다섯 그릇 먹고 유현이 형이랑도 말 놓을 뻔했어요.”
정말 마지막으로 팬들을 향한 새해 인사 영상까지 미션 완료.
타이밍 좋게 도착한 점심 메뉴는 떡만둣국이었다. 평소라면 다른 메뉴를 먹었겠지만, 충격적이었던 떡국 대결 덕분에 다들 제대로 된 떡국이 먹고 싶어졌던 거다. 모든 촬영을 마무리하고 제대로 자리를 잡아 먹기 시작했다. 제법 명절다운 시끌벅적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