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승빈이 KMS 연기 대상에 참석한다는 것도 놀랄 일이었는데 조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됐다는 소식에 클로버 판은 잠시 소란스러웠다.
[데뷔 필모에서 바로 노미네이트 되는 내새끼ㅠㅠㅠ]
-오재성도 노미네이트된 거 보면 개나소나가 아닌가 싶은데ㅋ
└응 개나 소나 하면 니가 해보면 되겠네
-근데 노미될만했음ㅇㅇ 원래 완전 카메오 배역이었다매 인기 얻고 본인이 설득해서 저정도 파급력 가져왔으면 받을만했지
-이래서 대기업이 좋긴 해^^
└맞아 VM이 대기업이긴 하지?^^
“오늘 승빈이가 상 받아서 어그로 X끼들 입 다물게 해 주면 좋겠네.”
시상식 방청에 성공한 문스트럭은 댓글 반응을 확인하며 끓어오르는 욕을 참느라 고생했다. 이제 저 정도 욕은 무뎌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승빈을 비꼬는 댓글을 보면 속이 뒤집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분노는 레드 카펫의 승빈을 보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새 키가 더 크고, 골격이 잡혔는지 완벽한 슈트 핏이었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와 화려하지 않지만 정돈된 음영 메이크업 덕분에 청초한 매력이 극대화되었다. 아이돌 스타일링이 아닌 헤메코도 잘 어울릴까 반신반의했는데 기대보다 더 소화를 잘해 냈다. 문스트럭은 승빈이 전생에 배우였던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시상식이 시작되고, 전광판에 승빈이 나오거나 승빈과 관련된 멘트가 있을 때마다 목이 터져라 승빈의 이름을 외쳤다. 콜라보 무대에도 김민영, 유현재 팬들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더 열과 성의를 다해 응원했다.
청량한 느낌의 하복을 입고 나왔는데, 노래 제목처럼 여름 느낌이 물씬 나는 무대였다.
[I’ll remember our blue summer
웃고 울던 파아란 우리의 여름
네가 있어서 비로소 완성이 된
내 여름의 한 페이지 속 너, 너]
세 명 모두 드라마 속 캐릭터에 빙의라도 한 게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흡입력 있는 무대였다. 워낙 대중적으로도 히트를 친 노래여서 현장의 팬들뿐만 아니라 배우들도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내게 말하지 못한 진심을
이미 나는 알고 있었지
그래도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여름의 한 페이지 속 책갈피처럼
잊지 않을게 너의 미소]
극 중 서연이 영훈의 마음을 뒤늦게 알아챘지만, 받아 주지 못한 마음을 담은 가사 때문이었을까? 곳곳에서 탄식과 함께 너무 슬프다는 반응이 터져 나왔다.
‘파아란’은 여러모로 문스트럭에게 뜻깊은 활동이었다. 배우 문승빈을 보고 싶다는 염원이 현실이 되었고, 승빈의 다재다능함을 대중에게 소개할 수 있는 기회였다. 어떤 기회가 오든지 놓치지 않고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승빈이 기특했다. 아이돌 출신 배우라는 꼬리표를 비웃기라도 하듯 연기로 좋은 평가를 받게 된 것도 뿌듯했다. 승빈 덕분에 태주라는 캐릭터에도 큰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해외 투어 일정을 잡은 코어를 저주하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역시 내가 낳았어야…….’
그리고 드디어 시상식의 하이라이트, 신인 남우 조연상 시상 순서가 됐다. 후보는 승빈과 오재성, 타 드라마의 배우 2명이었다. 드라마의 파급력으로는 ‘파아란’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타 드라마의 배우들 역시 훌륭한 연기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결과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정말 쟁쟁한 후보들입니다, 누가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거 같네요.”
“그럼, 발표하겠습니다. KMS 연기 대상 신인 남우 조연상 수상자는… 축하합니다, 파아란의 문승빈!”
“아아아아아악! 축하해, 승빈아!”
승빈의 이름이 호명되자마자 문스트럭을 포함한 주변의 클로버들도 환호성을 내질렀다. 수상 소감을 말하는 승빈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아이돌 활동할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반짝거림이었다. 그때, 문스트럭은 확신했다. 승빈은 어떤 모습이건 빛날 사람이고, 자신은 그 반짝임을 응원할 것이라고.
* * *
이름이 호명되었을 때, 한참 동안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정말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각혈한 후에는 어떻게 그 충격을 상쇄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현실감이 없었다.
“뭐 해? 얼른 가야지!”
“네? 네…….”
“파아란에서 ‘태주’ 역할을 맡아 불완전한 청춘의 모습을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떠오르는 연기돌로 주목받고 있는 문승빈 배우입니다.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유현재가 등을 밀어 주지 않았다면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을 것이다. 수상을 위해 계단을 오르는데 절로 다리가 후들거렸다. 수상 소감도 거의 준비하지 못해서 머릿속이 하얘졌다.
“안녕하세요, 크리드 문승빈입니다. 먼저 이렇게 좋은 상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정말 예상도 못 한 일이어서… 제가 따로 수상 소감을 준비하지 못했어요. 이럴 거였으면 멤버들 말을 들을 걸 그랬네요. 먼저 정 감독님, 저 믿고 태주라는 캐릭터를 더 멋있게 만들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태주라는 캐릭터는 아주 작은 배역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한… 3분이 전부였던 걸로 기억해요. 하지만 이 친구에게도 무한한 가능성과 이야기가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말이라도 해 보자는 마음으로 감독님께 태주에 대한 제 생각을 말했던 거 같습니다. 결국 감독님도 제 진심을 알아주셨고, 태주의 가능성을 인정해 주셨어요. 작품을 위해 진심으로 고민하고, 변화가 필요한 부분에는 열린 마음으로 임하시는 모습에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함께 연기하면서 이런저런 고민 상담, 조언들 아끼지 않은 배우분들께도 감사하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 멤버들. 늘 응원해 주고 지지해 줘서 고마워, 사랑하는 가족들! 걱정 안 한다고 했지만 매 편 본방 사수 하면서 따끔한 조언 해 줘서 고마웠어. 마지막으로 우리 팬분들! 첫 연기 도전이라고 혹시라도 기죽을까 봐 응원 열심히 해 주신 거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보내 주신 사랑은 앞으로 여러분 곁에서 활동하며 갚겠습니다. 태주로 살 수 있어서 행복하고, 저에게도 잊을 수 없는 파아란 여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수상 소감이 너무 길어지는 거 같아서 뒤에 가서는 점점 랩이 되었다. 민망함과 수상에 대한 흥분감 때문에 두 귀가 빨개졌다. 울컥하는 마음도 있었다. 연기에 대한 갈증이 아예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태주를 연기하면서 연기 역시 아이돌 활동 못지않게 사랑하는 일이었음을 깨달았다. 그저 망돌을 벗어나 연예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길이라고 굳게 믿었는데, 아니었다.
소감을 마치기 무섭게 미션 클리어를 알리는 메시지가 보였다. 다행히 각혈은 면했다. 미션을 실패했다면 몇만 명이 보는 데서 실시간으로 피를 토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설득의 힘을 쓸 일이 뭐가 있으려나…….’
모두들 축하의 미소를 짓고 있는 중에 한 사람, 오재성의 표정만 일그러져 있었다. 하긴, 오늘 현장에 도착했을 때도 수상 가능성도 없는 사람도 시상식에 부르냐며 다 들리게 비꼬던 놈이었는데 지금 얼마나 쪽팔리고 자존심 상하겠는가?
“축하해.”
“수상 소감 네가 제일 길게 했을 듯?”
“안 그래도 랩 하는 줄 알았으니까 그만 놀리세요-”
아니나 다를까, 자리에 오자마자 양쪽에서 장난치는 둘이었다.
“자고로 수상 소감은, 짧지만 감사하고 싶은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적당한 유머도 들어가야 하는 거야.”
“지금 경력직 부심 부리는 거예요?”
“부심은 무슨, 앞으로 수상 소감 할 일 많을 텐데 미리 알아 두라는 거지.”
“가끔 형은 말을 몇 번 꼬아서 할 때가 있다니까요?”
“이따가 나나 김민영이 받을 때 잘 봐 둬-”
이미 상을 받을 거라고 확신하는 말투였다. 그런데 막상 둘이 신인 여우, 남우 주연상을 받았을 때 나만큼이나 말이 길었다. 보고 배울 게 딱히 없었다는 말에 유현재와 김민영 모두 괜히 말을 돌리며 민망해했다. 이후에도 ‘파아란’은 베스트 커플상, 작품상과 감독상, 올해의 드라마상까지 받으면서 말 그대로 상을 싹쓸이했다. 가장 놀랐던 것은 정 감독님의 소감이었다.
“파아란은 여러모로 저의 벽을 무너뜨린 작품입니다. 사실 하이틴이라… 유치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어린애들 이야기라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이런 저의 짧은 생각을 반성하게 할 만큼 좋은 대본 만들어 준 작가님,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이돌 친구들이 연기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승빈 군을 비롯한 아이돌 출신 배우분들을 보며 제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승빈아, 작은 캐릭터에도 무한한 이야기가 있음을 알려 줘서 고맙다. 다음에 또 함께 작업할 기회가 생긴다면, 더 사려 깊은 감독이 되어 있도록 나도 노력할게. 파아란과 함께 해서 행복한 사계절이었습니다. 저희 드라마 사랑해 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면서 더 좋은 작품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장의 모두가 기립 박수를 했다. 정 감독님다운 솔직한 소감이었다. 다음 작품에 대한 캐스팅 예고까지 받게 되어 얼떨떨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파아란 팀은 시상식이 끝나고 나서도 축제 분위기였다. 시상식이 끝나고 회식 장소로 이동하기 전, 퇴근길에 모인 팬들과 잠시 시간을 가졌다.
“축하해, 승빈아!”
“안 추웠어요? 방청 못 들어간 팬들도 있었죠-”
“괜찮아~”
“방청석에서 플래카드랑 응원봉 봤어요! 엄청 긴장하고 있었는데 그거 보니까 좀 풀렸어요.”
“다행이다!”
“오늘 응원해 줘서 너무 고마웠어요! 다들 조심해서 들어가요.”
“잘 가~”
회식 장소로 향하는 차 안에서 오늘 시상식 반응을 살펴봤다.
[승빈이 최피디 수저에 이어서 정감독 수저까지 겟한거임?]
-약간 귀인들을 끌어당기는 자석인가봄ㄷㄷ
-문승빈 연기로 억까하던 애들 어쩌냨ㅋㅋㅋㅋ큐ㅠㅠㅠㅠㅠ
-정감독 ㅈㄴ악명 높은데 저렇게 순한 양으로 만든것도 재주임
-상도 못받을텐데 왜 가냐고 하던 그팬덤 어쩌냨ㅋㅋㅋㅋ
멤버들과 가족, 동료들에게도 축하 메시지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들의 응원이 없었다면 결코 이렇게 열정적으로 연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마운 마음에 하나하나 답장하다 보니 벌써 회식 장소에 도착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감독님과 작가님의 구호와 함께 벌써부터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승빈아, 여기!”
“네!”
어쩌다 보니 정 감독님과 작가님 사이에 앉게 되었다. 처음부터 비워 둔 자리인 듯했다. 테이블에 술을 못 마시는 건 나뿐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맥주에 손을 댈 뻔했다가 유현재와 김민영의 레이더에 걸려서 패키지로 놀림받으며 콜라나 홀짝였다.
“이제 내년에 스무 살인 건가?”
“네! 이제 3일 남았어요.”
“어쩐지 맥주에 손을…….”
“옆에 콜라랑 헷갈린 거라고요-”
“얼른 스무 살 되어야 한잔하면서 작품 얘기도 하지.”
정 감독님은 내 생각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반드시 다음 작품에 캐스팅하겠다는 열망이 가득한 눈이었다. 한동안 연기와 영화, 드라마 작품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요즘 관심이 가는 작품이나 감독이 있냐는 질문을 듣는 그 순간,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 떠올랐다. 어쩌면, 설득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피어올랐다.
“제가 요즘 관심 가는 감독님이 있긴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