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이, 이게 다 뭐예요?”
“뭐긴 뭐야, 우리 문 배우 첫 연기 시상식에 입을 옷이지~”
눈앞에 펼쳐진 슈트들의 향연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온갖 색상과 디자인의 턱시도, 슈트들이었다.
“우리도 조금 유난인가? 싶었긴 했는데 어디 가서 헤메코로 기죽는 건 또 못 참는 사람들이잖아?”
“당연하지- 우리 승빈이가 제일 빛나야 하는 날이니까!”
“감사해요, 이거부터 입어 볼까요?”
연말 무대나 콜라보 무대가 있을 때면 평소보다 더 칼을 갈고 준비하는 헤메코 스태프들이었다. 어떤 옷을 입고 나와도 엄청난 리액션이 쏟아졌다.
“대박. 이거다, 승빈아!”
다음 옷을 입고 나왔을 때도.
“이걸로 가야겠다. 다른 옷 볼 필요도 없어, 무조건 이거야!”
“승빈아, 그냥 의상 체인지 퍼포먼스 같은 거 하는 건 어때? 다 잘 어울려서 뭘 입혀야 할지 머리가 아프다.”
“에이, 다들 너무 과장해서 띄워 주시는 거 아니에요?”
“얘 좀 봐라? 승빈아, 우리 숍 철칙이 뭐라고 했지?”
“구린 건 못 본다?”
“그래! 우리가 얼마나 냉정하게 평가하는 사람들인데, 네가 다 잘 어울리는 걸 어떻게 해?”
조금은 민망했지만, 덕분에 나도 거울에 비친 모습들이 모두 마음에 들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딱이었다. 두 시간이 넘도록 피팅을 하다가 깔끔한 검정색 슈트로 결정했다. 그냥 슈트는 밋밋해 보인다고 작은 브로치도 하나 달았다.
“우리 집 인테리어도 이렇게 신중하게는 안 골랐을 거다, 승빈아.”
“다 너무 예쁜 옷들만 가져오셔서 저도 고르는 데 너무 힘들었어요.”
“여기에 헤어랑 메이크업까지 들어가면 완벽하겠는데?”
설렜다. 아이돌이 아닌 배우로 레드 카펫에 서는 것은 너무 오랜만이었으니까.
* * *
“내가 이 두 놈이랑 또 콜라보 무대를 해야 한다니…….”
“나랑은 처음 아닌가?”
“문승빈이랑은 뮤직 쇼에서도 보고, 드라마 촬영장에서도 보고, 이제 특별 무대에서도 보네.”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배틀하면 안 돼요, 누나.”
내 말에 유현재가 피식 웃었다.
“둘이 아주 깨가 쏟아지던데? 눈 마주치면 죽는 병 걸린 줄 알았잖아.”
“어후, 말도 마요. 눈 마주치면 죽일 기세이긴 했어.”
“내가?”
시상식 3일 전 우리 셋이 모인 이유는 스페셜 콜라보 무대 때문이다. 원래 관행처럼 그해 신인 배우들이나 라이징 스타들이 시상식 특별 무대를 꾸미고는 했다. 그런데 마침 올해 가장 성공한 드라마인 ‘파아란’의 배우들이 대부분 신인이거나 아이돌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이돌이 아닌 김민영도 이미 뮤직 쇼에서 나와의 콜라보 무대를 통해 춤, 노래가 된다는 걸 모두 알고 있으니 더 잘된 일이었다.
왜 남주가 아니라 서브인 유현재와 콜라보 무대를 하는지 궁금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파아란’은 전국에 서브병 말기 환자를 만들어 냈다. 남자 주인공과의 케미만큼이나 서브 남주와의 케미를 응원하는 팬들이 많았다. 그래서 결말에 둘이 이어지지 않았을 때 잠시 게시판이 마비될 정도로 엄청난 반발이 있기도 했다. 스토리상 남자 주인공과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웠지만, 서브 남주와의 서사 역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겠지.
물론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주연 배우의 거절이었지만 말이다. 배우병 제대로 걸린 주연 배우가 자기는 연기만 하고 살 거라고 스페셜 무대를 단칼에 거절했다고 전해 들었다. 덕분에 방송국에 미운 털 단단히 박힌 것 같지만, 내 알 바는 아니지.
내가 연기한 태주와 영훈의 케미 역시 큰 인기를 얻었다. 유현재는 우리 둘의 브로맨스가 인기를 얻을수록 몸서리치며 싫어했지. 도대체 저 둘 사이에 그런 분위기가 될 건덕지가 있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아무튼 우리가 준비한 무대는 ‘파아란’의 OST ‘Blue summer’이다. 드라마의 성공과 함께 덩달아 음원 사이트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노래였다. 풋풋한 감성을 표현하는 게 관건인 곡인데 과연 이 셋의 조합으로 잘 해낼 수 있을까 그게 조금 걱정이다.
“자, 그럼 파트 분배부터 해 볼까요?”
“내가 첫 파트 할게.”
“뭐래? 당연히 첫 소절은 내가 해야지. 내가 주인공이잖아.”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네- 첫 소절부터 귀를 사로잡아야 하니까 내가 해야지.”
“어디서 개가 짖나?”
“정당한 비판을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이 그릇이 큰 사람이라던데.”
“응, 그릇 X나 작아서 미안~”
유행하는 챌린지까지 따라 하며 유현재의 약을 올리는 김민영이다. 더 두었다가는 진짜로 싸울 거 같아서 잽싸게 말을 낚아챘다.
“그럼 첫 파트는 제가 할게요. 제가 제일 노래 잘하니까?”
“승빈이, 많이 뻔뻔해졌네.”
“근데 딱히 반박은 못 하겠네.”
저 둘이랑 오랜 시간 지내다 보니 뻔뻔함이 늘었다. 내가 제일 노래 잘한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칼군무가 필요할 만큼의 노래는 아니어서 간단한 포인트 안무를 만들기로 했다. 김민영은 이 정도 율동을 스페셜 무대로 보여 줄 수 없다고 했지만, 만약 빡센 안무를 넣었다가는 또 제2의 뮤직 쇼 사태가 벌어질까 봐 혼신의 힘을 다해 설득했다.
“둘이 좀 애틋하게 무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안 그래도 연기할 때 힘들었으니까 조용히 하자, 승빈아?”
“우린 프로잖아요!”
“이건 연기가 아니니까 난 아마추어 해도 돼.”
“와, 그 정도라고요?”
예상했지만 연습은 더 우여곡절이 많았다. 둘이 눈만 마주치려고 하면 으르렁거리니, 중간에 낀 나만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 꼴이 되었다.
“I’ll remember our blue summer… 아, 그런 눈빛 하지 말라니까?”
“야, 나는 지금 김민영이 아니라 양서연이라고. 너도 유현재가 아니고 한영훈, 쟤는 태주. 오케이?”
“대단하다, 진짜. 대배우야-”
“영훈아, 네가 그래서 서연이랑 안 된 거라니까?”
“야, 그건 아니… 아니, 왜 해명을 하고 있지? 그리고 갑자기 영훈이?”
“드라마는 끝났지만, 이 무대에서만큼은 다시 태주, 서연, 영훈이가 되어 보자고요.”
유현재는 자기가 졌다는 듯 두 손을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연습할 때 배역 이름으로 부를까요? 더 몰입도 잘되고 좋을 거 같은데.”
나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둘 다 못 이기는 척 동의했다. 그 이후로는 실명을 언급할 때마다 500원씩 내기로 했다. 그냥 제안했을 때는 하기 싫은 티를 팍팍 내더니, 내기가 되자 둘 다 승부욕이 발동했다.
‘저 둘이 저렇게 초딩 같은 걸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야 하는데…….’
그래도 각자 배역 이름으로 부르는 게 꽤 효과가 좋았다.
프로듀싱을 스노우튠이 맡게 되어서 그나마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물론 둘 다 처음에는 유현재와 김민영에 대한 의심이 가득했다.
“쟤네, 보통 아니지 않아?”
“드라마 촬영 때 안 힘들었어?”
“안 힘들었다면 거짓말 같긴 한데, 생각보다 안 무서워요. ”
반신반의하던 스노우튠도 녹음이 진행될수록 생각이 바뀌는 것이 실시간으로 보였다.
[I’ll remember our blue summer
뜨거웠고 차가웠던 우리의 여름
네가 내게 준 수많은 기억
내 마음속에 담아 둔 채 오늘도 잠이 들어]
“뭐야, 현재 씨. 이렇게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나?”
“지금 현재 형 아니고 영훈이에요, 한영훈.”
“파아란?”
“네네, 하도 둘이 감정 잡는 데 어려움이 있어 보여서 그냥 배역으로 지내 보라고 했어요.”
“네가 제안한 거야?”
“네.”
“제안한 너도 대단한데, 네 말대로 하는 저 둘이 더 신기하네.”
“제가 말했잖아요, 그렇게 무서운 사람들 아니라고~”
[내게 말하지 못한 진심은
이미 나는 알고 있었지
그래도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여름의 한 페이지 속 책갈피처럼
잊지 않을게 너의 미소]
“민영 씨, 방금 감정 최고였어요! 그대로 쭉 가면 될 거 같아요-”
“내가 아는 배우 중에 노래 제일 잘하는 거 같아.”
“에이, 이제 문 배우도 있는데-”
“그럼 문 배우 다음이라고 할게.”
“놀리지 마세요, 민망하네…….”
김민영 역시 드라마의 한 장면을 연기하는 것처럼 아련함 가득하게 녹음을 마쳤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먼저 녹음을 마친 둘은 벼르고 있었다는 듯 부담을 팍팍 줬다.
“오- 가수 문승빈~”
“얼마나 프로페셔널한지 볼 거다?”
“둘 다 녹음 끝나면 퇴근해요-”
“에이, 이 귀한 기회를 어떻게 놓쳐? 안 그래?”
“그럼, 그럼.”
“둘이 이럴 때만 죽이 착착 맞죠?”
이미 이 녹음실에서 녹음은 백 번도 넘게 했다. 그런데도 저 둘 앞에서는 처음이어서 그런지 묘하게 긴장이 됐다. 익숙한 목 풀기나, 녹음 전 루틴을 할 때마다 녹음실 밖에서 과한 리액션을 하는 둘 때문에 웃겨서 집중이 안 될 지경이었다.
“그럼 1절 도입부부터 녹음 시작할게!”
“네!”
[삐뚤빼뚤한 이음새가 더 아름다웠던 그때
완벽하지 않아서 더 빛났던 여름
아무도 몰라주는 이야기일지라도
너만 알아주길 바라는 이야기]
“오늘 컨디션 좋은데? 한번 들어 볼래?”
마음에 들었지만 백 퍼센트 마음에 드는 결과물은 아니었다. 그래서 드라마 편집본을 급하게 시청했다. 인물 모두의 이야기가 담긴 가사이기 때문에 관계성별로 보고 나니 감정을 잡는 데 더 도움이 됐다. 사실 저 둘한테 대사 한 번만 해 달라고 할까? 싶었지만 녹음실에서 싸움판 벌어지는 건 원치 않아서 그만뒀다.
세 번째 녹음을 하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녹음이 되었다.
“방금 건 진짜 잘 나왔다.”
“네, 저도 마음에 들어요!”
“승빈이가 녹음 마음에 든다고 하는 것도 오랜만인데?”
“녹음할 때 깐깐한가 봐요?”
“녹음할 때는 완전 꼼꼼하지~ 전에 한 파트만 녹음 스무 번 한 적도 있다니까?”
“너무 티엠아이 아니에요, 형?”
“아, 다 들려?”
처음에는 놀리려고 벼르고 있던 둘도 진지한 녹음 분위기에 녹아 들어갔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녹음을 마칠 수 있었다.
“가사만 절지 말자.”
“실수하는 사람이 연말에 소고기 선물 보내기라도 할까?”
“진짜… 심각한 내기 중독이세요.”
“그래서, 안 해?”
“둘 다 소고기 맛집이나 찾아 두세요.”
* * *
“제24회 KMS 연기 대상, 어느덧 2부가 시작되었습니다. 지훈 씨, 올해 ‘파아란’의 인기가 엄청났잖아요?”
“맞습니다. 올해 KMS 드라마 중 최초이자 유일하게 30%를 넘었고, 수많은 라이징 스타를 배출해 냈죠.”
“화제의 드라마, 파아란의 주역들이 특별한 무대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무대 뒤에서 대기하던 우리 셋은 그 흔한 파이팅 인사도 없었다. 서로 각자 가사 외우고 감정 잡는 데 바빴거든. 구호라도 외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말을 꺼내기 무섭게 기각당했다. 그런 건 오글거려서 싫다나?
“우리 모두 가사 실수하지 않기를 바랄게요.”
“누구 하나는 실수해야 끝나는 거야.”
“아무도 실수 안 하면 어떻게 해요?”
“김민영 씨가 소고기 쏘는 거지.”
“뭔 소리야?”
“제일 연장자이자, 선배님이잖아요?”
“겨우 3달 차이 가지고… 이럴 때만 선배지?”
“저기요, 지금 영훈, 서연이가 아니라 유현재, 김민영 씨인 거 같은데요?”
긴장을 풀고 결속력을 높이기 위해 구호를 외치는 건데, 우리 셋의 대화를 보니 구호 같은 건 필요 없다는 둘의 말이 옳았다. 긴장? 그게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