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이제 가면 언제 오냐며 우울해하던 해외 투어도 벌써 다음 주면 끝이 난다. 한 달 반 가까이 미국부터 시작해서 일본, 유럽 등 다양한 국가에서 공연한 크리드는 데뷔한 지 2년 차라고는 믿을 수 없는 성과를 얻었다. 20회 넘는 공연을 하면서 30만 명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막강한 티켓 파워를 보여 줬다.
그럼에도 팬덤 분위기는 예상외로 아주 평화로웠다. 보통 이렇게 지표상으로 급성장하게 되면 ‘너무 성공한 그룹은 재미없다’라며 떠나는 팬들이 있기 마련인데, 크리드는 한결같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애들만한 애들 없는 거 같음ㅋㅋㅋㅋ 한 달 반 동안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에이앱하고, 매일 크림 메시지 보내고, 공연 끝나면 엔스타에 셀카랑 남찍사랑 골고루 올리고 해투기간에도 클로버들 심심할 틈을 안 줌ㅋㅋㅋㅋ]
-아 ㅈㄴ부럽네 내가 반드시 탈포커싱하고 클로버한다
└포커싱이 클로버 되는 게 가능함?ㅋㅋㅋㅋ
-00아 해투도 안 가는 놈이 크림 한 달째 잠수타는 게 말이 되냐
-크리드를 국회로
-심지어 에이앱도 시간 뗴우기 하나 없이 다양한 조합이랑 콘텐츠로 했다는 게 제일 좋음ㅋㅋㅋ큐ㅠㅠㅠㅠ
-솔직히 활동기때보다 에이앱 더 많이 해서 해투 호감됨ㅋㅋㅋㅋ 그렇다고 진짜로 가면 코어 죽어
-시차 고려해서 에이앱 해준 것도 감동이었으뮤ㅠㅠㅠ
실제로 정연은 심심할 틈이 없었다. 승빈이 보고 싶어질 무렵이면 크림 메시지가 와 있었고, 얼굴이 보고 싶어질 때면 에이앱 알림이 떴다. 1, 2주에 한 번씩은 고정 자체 콘텐츠인 ‘크리데이’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공연 사진을 올리는 게 규칙 위반이라며 이상한 똥고집을 부리는 국가의 팬들 때문에 속에서 천불이 나고 있었다. 멤버들이 엔스타에 공연 착장 셀카와 전신 숏을 올려 주지 않았다면 팬들의 짜증이 극에 달했을 것이다.
[ㅈㄴ한국 홈마들이 올리는 공연 사진 보면 머리 위에서 쟁반 떨어지게 해야 함]
-다 같이 돕고 사는거지 야박하긴ㅡㅡ 저러면서 인장은 한국 홈마들이 찍은 공연사진임ㅋㅋㅋㅋㅋ장난하나
-특정 국가는 글 못보이게 해야 한다니까?
-근데 공연 사진이랑 영상은 올리지 말라고 공지도 올라오는데 그렇게 잘못한거임?ㅋ
└응 홈마 영상 사진 없이 개념 덕질 잘 하세요~
└한국어 잘하넼ㅋㅋㅋ니들도 그럼 한국 공연 사진 영상 보지마라
[애들 엔스타 아니었으면 오늘 뭐 입었는지도 평생 몰랐을거 아니냐곸ㅋㅋㅋㅋ열받네]
-오늘 헤메코 ㅈㄴ예뻤잖아ㅠㅠㅠㅠㅠ
-아 ㅁㅊ 문스트럭님 사진 올라옴
└숭고한 희생 감사합니다…
└이분 거의 모든 공연 다 따라가신 듯?
정연은 곧장 문스트럭의 계정에 들어갔다가 탄식했다.
[**1210
오늘 승빈이 완전 프로아이돌 그 잡채…
#승빈 #크리드]
[**1210
퇴장 당하기 전 마지막 사진ㅠㅠㅠ
#승빈 #크리드 ]
그리고 일상 계정은 이미 분노로 가득했다.
[ㅅㅂ… 홈마냐고 해서 맞다고 잘 부탁한다고 미공개 사진까지 보여줄 땐 ㅈㄴ친절한 척하더니 이렇게 뒷통수 칠 줄 몰랐짘ㅋㅋㅋㅋ....]
-ㅈㄴ음침해서 더 열받네
-어차피 사진 영상 올라오면 다 소비할거면서 유난 레전드
-홈마님 엄청 고생했겠어요ㅠㅠㅠㅠ
-당신은 규칙을 위반했습니다. 크리드는 불법 행위를 하는 당신을 증오합니다
└뭐래 ㅅㅂ 니 프로필 저분이 찍은 사진인 건 알고 하는 말이냐?
└어디 번역기 돌렸나;;
-그래봤자 크리드는 한국 노래하는 한국 그룹입니다
크리드에 대한 팬심으로 하나가 되는가 싶다가도 서로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문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마침내 크리드가 입국하는 날, 비로소 정연의 일상도 제자리를 찾았다.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고, 밥을 먹고, 잠이 드는데 마음 같아서는 크리드의 여권을 훔쳐서 숨겨 두고만 싶었다.
* * *
약 두 달 가까이 진행된 해외 투어에서 잊지 못할 추억들을 많이 만들고 왔다.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오는데, 그동안 갔었던 나라와 공연장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이제 한국에 돌아가면 곧바로 연말 무대 준비에 들어간다. 1년 중 가장 기대되고 열정 넘치는 주간이다. 이번에는 어떤 스페셜 무대를 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먼저, 내가 mc로 있는 방송국에서는 보이 그룹 멤버들끼리의 콜라보를 예고했다. 나와 유현이 형, 유현재, 성재 형으로 팀을 구성해서 2세대 아이돌들의 히트곡을 커버하는 무대였다. 그리고 다른 방송사에서는 나와 지운이 형을 비롯해서 보컬 멤버들로 구성된 스페셜 무대도 예정되어 있다. 삼사 단체 무대에 스페셜 무대까지 준비해야 한다 생각하니 앞으로 체력적으로 관리를 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멤버들 모두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연말 무대 얘기를 했다. 다른 멤버들 역시 최소 하나씩 스페셜 무대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떤 콘셉트를 해야 할까요? 하도 한 게 많아서…….”
모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활동뿐 아니라 넥스트 레벨 경연을 하면서 정말 오만 가지 콘셉트는 다 한 거 같으니까.
“우리 올해 활동한 곡이 ‘Ideal’이잖아요. 너드랑 킹카 콘셉트를 잘 활용하면 좋을 거 같은데…….”
강도현의 말에 뮤지컬 장면이 번뜩 떠올랐다. 원래 남녀로 나뉘어서 서로 매력을 발산하는 장면인데, 이걸 너드와 킹카로 바꿔서 너드를 킹카로 바꾸는 과정을 뮤지컬처럼 기획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비몽사몽 한 상태로 손발을 써 가며 열심히 설명하니 멤버들도 반쯤 감긴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다들 제정신이 아닌 거 같은데, 내일 맨정신으로 다시 물어봐야겠어.’
다행히 멤버들 모두 맨정신으로도 해당 아이디어에 동의했다. 윤빈 형은 곧장 프로듀싱에 들어갔고, 강도현과 선우 형은 랩 메이킹을, 나머지 멤버들은 안무 메이킹을 시작헀다. 나는 오해나 디렉터와 회의를 통해 전체적인 무대를 기획했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시간을 쪼개서 스페셜 무대 연습에 참여했다.
파아란을 성공적으로 마친 유현재는 한결 가벼워 보였다.
“해투 가서도 파아란 잘 봤던 거 같더라?”
“당연하죠. ott 플랫폼에서 올라오면 바로 찾아봤다고요-”
“우리 올해 첫 30% 돌파 드라마라고 하더라.”
“내가 연기 연습 도와준 보람이 있네.”
“그럼 형이 얘 대본 봐주는 동안에는 내 역할 했던 거야?”
“네가 아니라 영훈이 역할을 했던 거지.”
“그게 그거 아닌가?”
오랜만에 봤다고 바로 아웅다웅하는 둘 때문에 웃음이 나왔다. 성재 형도 같이 웃고 싶은데 유현재와 서먹한 사이여서 마음 편히 웃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 성재 형을 눈치챈 건지 유현재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 넥스트 레벨 때 같이 했었던 거 같은데.”
“네! 투 샤인의 이성재입니다.”
“그때 한마디도 못 나눴던 거 같은데 이번에 같이 잘해 봐요.”
“…네!”
옆에 있던 유현이 형이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작게 귓속말했다. 나도 살짝 놀라긴 했다. 개과천선도 이런 개과천선이 없었다.
“쟤 어디서 벼락이라도 맞았냐? 유현재 맞아?”
“철들었나 보죠-”
내 말에 유현이 형은 박장대소했다. 아무래도 같이 연습했던 중학생 시절 유현재를 떠올리면 평생 철 안 들 놈이라고 생각했겠지.
성재 형의 뛰어난 친화력 덕분에 어색함 없이 연습할 수 있었다. 유현재도 처음에는 부담스러워하는 듯하더니 뒤로 갈수록 네 맘대로 해라- 식이었다. 마치 꼬리 프로펠러 돌아가는 웰시 코기에 짓눌린 고양이 같았다.
“내가 살다 살다 다시 형이랑 무대를 할 줄 몰랐네?”
“이번 생에 다시 만난 게 더 신기하다고 하지 그러냐.”
“거기 두 분, 연습 집중 좀 해 주세요-”
“네네, 승빈 선생님.”
말은 이렇게 해도 셋 다 기본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서 속전속결로 연습을 마쳤다. 소속사에 돌아와서는 바로 단체 연습을 시작했다. 뮤지컬 형식에 어색해하던 멤버들도 점점 능청스러워졌다.
그렇게 연습을 이어 가던 중 뜻밖의 미션이 떴다.
[!MISSION: 신인 남우상 수상!]
제한 시간) 20**년 12월 31일까지
성공 시▶ 설득의 힘 획득
실패 시▶ 각혈
‘각혈? 이놈들이 피 쏟는 걸 쉽게 보네…….’
그리고 소름 돋는 타이밍으로 예상치 못한 연락을 받았다.
“연기 대상에 초청됐다고요?”
이건 정말 하늘의 뜻에 맡겨야 할 때였다.
* * *
“이 맛에 연말 기다리지-”
오랜만에 모인 3인방은 아예 방을 잡고 연말 무대를 즐기기로 했다. 오늘도 역시나 사진을 찍으러 간 문스트럭은 제외였다. 작년 연말에도 무대 하나하나 진심이었던 크리드가 이번엔 어떤 무대를 준비할까–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요즘 연말 무대 왜 이렇게 오래 하냐?”
“레드 카펫만 2시간째 하고 있네…….”
“야, 이 날씨에 밖에서 레드 카펫을 하냐.”
“나 오늘 저거 찍으러 가려다가, 야외라는 거 보고 포기했잖아.”
“잘했어. 저 정도면 찍다가 손 얼 듯.”
“문스트럭 님이 저 대리로 몇 장 찍어 주시기로 함.”
“걔는 진짜 찐이야.”
관객석에서는 핸드폰 네온사인으로 [크리드 나오면 깨워 주세요]를 띄우는 사람도 여럿 보였다.
“큐시트 스포 떴네, 야, 크리드 한참 있다가 나온다.”
“2부 엔딩이네?”
“응. 근데 스페셜 무대는 1부 엔딩으로 나오는 듯.”
“의상 뭐 입었으려나. 얼른 나왔으면 좋겠다.”
기다림이 지루할 거라고 불평했지만 막상 타 그룹의 연말 무대를 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다들 칼을 갈고 준비했기 때문에 일반 음악 방송 무대보다 퀄리티 있고, 다양한 무대를 볼 수 있었다.
“이번 무대는 올해 가장 핫했던 남그룹의 콜라보 무대죠? 크,하,투입니다!”
“우리 애들 나온다!”
2세대 아이돌 무대를 커버하는데 4명 모두 학창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비록 승빈은 저 당시 꼬꼬마 초딩이었겠지만. 파스텔 톤의 슈트가 승빈과 찰떡이었다. 말랑말랑한 사랑 노래와 승빈의 따뜻한 목소리가 만나니 원곡을 잊을 정도였다. 너무 유명한 곡을 선곡해서 잘해 낼까 우려하던 사람들에게 실력을 제대로 보여 준 무대였다.
“유현재랑 유현이 사이에서 승빈이 왜 이렇게 귀엽지?”
“성재 진짜 오랜만이다-”
“나 이 노래 진짜 좋아했는데, 학생 때 생각나네.”
“이번에 사녹 하나도 없다는데 직캠 주려나?”
놀라울 정도로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세 명이었다. 스페셜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대중들의 반응도 긍정적이었다.
-승빈이 완전 인간 벚꽃이자나
-유현이 와꾸 미쳤네
-감전좌 너무 오랜만이라서 반가웠음ㅋㅋㅋㅋㅋ 많이 예뻐졌네
-우리 현재가 방긋방긋 웃으면서 무대를 하다니…
-승빈이 목소리랑 제일 잘 어울리는 무대였던거 같음ㅇㅇ
그리고 마침내 크리드의 무대를 알리는 VCR이 방송됐다. 하지만 약 5분 뒤 기대와 함께 TV 앞으로 모인 네 명이 동시에 머리를 부여잡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이런 게 어딨어?”
“X친, 나 떨어트린 방송국 저주할 거임.”
“이건 아니지!”
그녀들이 이렇게 격하게 반응한 이유는 크리드가 장미꽃을 들고 관객석에서 등장했기 때문이다. 크리드에게 꽃을 받은 팬들의 황홀한 얼굴이 화면에 잡힐 때마다 세 명은 눈물을 머금고 맥주를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