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7화까지 공개된 ‘파아란’은 회차가 진행될수록 빠른 전개 속도와 배우들의 열연, 탄탄한 스토리로 인기의 고공 행진을 이어 갔다. 가장 최신화인 7화는 시청률 20%를 기록하면서, 하반기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사실 드라마 초중반쯤에 ‘태주’는 자연스럽게 퇴장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조금씩 분량이 늘기 시작하더니 중반을 넘어가는 지금도 등장하고 있었다. 해외 투어 일정으로 인해 12화 이후부터는 출연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원래 더 앞 회차에서 하차할 예정이었지만 정 감독의 설득과 대박 드라마를 놓치기에는 아쉬워했던 소속사의 협업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무슨 우연인지, 마지막 촬영 날 팬들이 밥차와 커피차를 보냈다. 팬들이 직접 선정한 문구부터 현수막, 배너에 내 얼굴이 담긴 스티커까지. 정성이 가득했다.
[오늘은 태주가 쏩니다!]
[우리 문 배우 잘 부탁드려요!]
배우 시절에도 여러 번 받아 본 적 있었지만, 받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이벤트다. 마지막 인사를 위해 정 감독을 찾아가니, 안 그런 척해도 무척 아쉬워 보였다.
“이래서 내가 배우 아닌 사람들과 일하는 걸 싫어하는 거야.”
“저도 너무 아쉬워요. 근데 태주 분량이 이렇게 늘어날 거라고는 저도 몰랐는데…….”
“그건 나랑 김 작가 욕심이긴 했지. 오늘이 마지막 촬영인 거지?”
“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감사까지야, 나도 그동안 같이 작업해서 재밌었어.”
정 감독이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고, 나는 옅게 웃으며 손을 잡았다. 이번에도 나의 진심을 알아봐 줘서 고맙다는 말을 대신했다.
“오늘 저희 팬분들이 밥차 준비해 주셨는데, 감독님도 꼭 드시고 가세요!”
“당연하지. 커피차도 왔던데?”
“타이밍이 좋았어요. 더 늦었으면 저 없는 촬영장에서 진행됐을 텐데.”
촬영장에 가니 유현재가 먼저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훨씬 일찍 도착한 것이 의아했다. 한 손에는 내 얼굴 스티커가 붙은 아메리카노를 들고 있었다.
“형, 오늘 엄청 일찍 왔네요?”
“너, 오늘 마지막 촬영이라며.”
“네, 당장 다음 주부터 해외 투어라서…….”
“아, 이 말을 못 했네. 콘서트 잘 봤어. 너, 원래 그렇게 눈물이 많았냐?”
순간 머릿속에 수많은 장면이 빠르게 지나갔다. 멘트하다가 울고, 벌칙으로 애교 부리고…….
“…팬분들 앞에서만 그래요.”
“그~렇게 잔망스러운 사람인 줄도 처음 알았네.”
“안 그래도 형이랑 눈 마주쳐서 혀 깨물고 기절한 척할까 싶었어요.”
토롯코를 타고 2층, 3층 팬들을 보러 가는 길에 열심히 반쪽 하트도 하고, 볼콕도 하던 중에 하필이면 유현재랑 눈이 마주친 거다.
‘자리를 잘 확인했어야 했던 건데…….’
뚱한 표정으로 웅얼거리자 유현재가 촬영장이 떠나가라 웃기 시작했다. 저렇게 박장대소하는 건 또 처음 보네.
“그만 놀려요- 형도 아이돌이라서 잘 알 거잖아요.”
“내가? 너, 내가 팬들한테 애교를… 그만 웃겨라, 승빈아. 배 아프다”
유현재는 이제 눈물까지 닦으며 웃었다. 아무래도 잘못 걸렸다. 이쯤 되면 나 놀리는 맛으로 촬영장 오는 사람 같다.
“알았어, 그만 놀릴게. 마지막 촬영인데 오랜만에 서로 대사 봐줄까?”
“제가 이번에만 넘어가는 줄 아세요-”
본격적인 촬영 준비가 마치기 전까지 서로 연기를 봐주면서 시간을 보냈다. 촬영이 시작되기 전부터 천천히 감정선을 잡기 좋았다.
“태주 없이 영훈이 심심해서 어떡하냐?”
“그래서 태주도 전학 가기 엄청 싫었을걸요? 한영훈 저놈, 나 없으면 사람 구실이나 제대로 할까- 뭐, 그런 생각 하지 않았을까요?”
“묘하게 내 얘기 하는 거 같다?”
“그럴 리가요?”
유현재가 뭐라 더 말하려는 게 남은 듯했지만, 촬영 준비가 끝났다는 스태프의 외침에 뒷말은 자연스럽게 잊혔다.
오해로 인해 크게 싸운 이후 맞이한 갑작스러운 전학 소식이어서 태주와 영훈 모두 경황이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마침내 대본 리딩 첫날 읽었던 대사를 하게 되었다.
[영훈, 전학 가는 태주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다.]
“잘 지내고. 연락 자주 할게.”
“…그래.”
[태주, 홀가분하다는 듯 말하지만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아쉽다. 너, 좋은 애니까 앞으로 더 좋은 친구들 사귈 수 있을 거야.”
“…친구 해 줘서 고마웠다.”
그때는 무모했다고 생각한 애드리브는 어느새 정식 대사가 되었다. 마지막 촬영이면서 동시에 태주라는 캐릭터와도 작별 인사를 하는 신이어서 그런지 아쉬움이 밀려왔다.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눈물이 살짝 고일 때쯤 오케이 사인과 함께 촬영이 종료됐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수고 많았어요, 승빈 씨!”
마지막 촬영이라고 스태프분들이 따로 케이크와 꽃다발을 선물해 주셨다. 너무 큰 선물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왜, 왜 이렇게 많이 준비하신 거예요? 전 주연도 아닌데…….”
“승빈 씨 덕분에 촬영장 분위기가 얼마나 좋았는데요~”
“맞아요. 저희가 받은 게 많아서 준비한 거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평생 못 잊을 거 같아요.”
역시 친절함과 좋은 태도는 배신하지 않는다. 촬영하는 날마다 먼저 촬영장에 오고, 스태프들과 소통하면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한 것이 이렇게 큰마음으로 보답받을 줄이야.
“다음에 또 같이 일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럼 너무 좋죠! 제가 여기 계신 분들 이름이랑 얼굴 꼭 기억할게요, 혹시 제가 먼저 못 알아보면 얘기해 주세요!”
스태프들과 인사를 다 나누고 유현재와 김민영과도 인사를 했다.
“수고 많았어.”
“그동안 많이 배웠어요.”
“너 없으면 심심해서 어떡하냐? 이제 그 재수 없는 놈이랑만 지내야 하잖아.”
여기서 ‘재수 없는 놈’은 아마 오재성을 말하는 거겠지.
“민영 누나 있잖아요.”
“내가?”
“나?”
“두 사람 친해진 거 아니에요? 쿵짝이 잘 맞던데.”
“쿵짝이 잘 맞아?”
둘 다 경멸하는 표정이었다. 말도 안 된다며 손사래를 치고, 김민영은 구토하는 시늉까지 했다.
“진짜 맞는 소리만 한다, 승빈아.”
“처맞는 소리.”
“이것 봐, 둘이 잘 맞는다니까?”
“너는 왜 사람 말 하는데 끼어들어?”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거든?”
내가 없어서 심심할 일은 없을 거다. 오히려 말리는 사람이 없으니 더 아웅다웅하면서 지내지 않을까?
“저 없다고 너무 싸우지 말고요.”
“우리가 애도 아니고-”
“우린 싸우는 게 아니라니까?”
나는 조용히 귀를 감싸는 제스처를 하며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때 정 감독이 나를 불러 세웠다.
“네, 감독님!”
“그동안 수고 많았어, 오늘 촬영도 잘했고.”
“감사해요. 촬영하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나도 많이 배웠어.”
“네?”
“캐릭터를 더 소중하게, 입체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덕분에 알 수 있었다고.”
“…….”
“앞으로 볼 일이 많을 거 같은데?”
정 감독은 말없이 핸드폰을 내밀었고, 나는 곧장 번호를 찍었다.
“기회가 되면 다음 작품에서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
“저야 언제나 불러 주시면 달려가죠.”
“아이돌이라서 바쁘다고 모른 척하면 안 된다?”
“제가 감히 그럴 수 있겠어요? 그래도 저에게 1순위는 아직 아이돌 활동인 건… 이해해 주실 수 있죠?”
“겸업, 언제부터 가능하다고 했지?”
“기다려 주시게요?”
“드라마는 몰라도, 영화 데뷔는 꼭 내 작품으로 했으면 좋겠어서.”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정 감독의 영화로 첫 남우 주연상을 수상했으니까. 물론 2년 뒤 이야기이지만. 그때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조금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나중에 식사 한번 같이 하자.”
“네.”
정 감독과도 마지막 인사를 하고 차로 돌아가는 길에, 오재성과 마주쳤다.
“드디어 마지막 촬영이셨네요?”
“그러게. 이제 내가 연기 봐줄 수도 없는데, 아쉽겠다?”
“뭐야?”
“재, 재성아, 곧 촬영 들어가야 하니까 진정하고…….”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지레 겁을 먹어? 나 아무렇지도 않다고!”
오재성의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매니저가 안타까웠다. 운명의 장난인지 모르겠으나, 지난 삶에서 내가 매니저 형과 함께 회사를 나오면서 교체된 매니저가 저 사람이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인터넷에 폭로 글을 올리고 그만뒀다고 들었지만. 티벡스를 담당하기 전에 VM 소속이었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던 거 같기는 했는데,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 녀석이랑 또 같이 일을 하나…….
‘고생이 많으시네.’
“남은 촬영 부디 칼퇴하길 바랄게.”
“가자, 승빈아.”
“네, 매니저 형.”
회사 스태프분들도 마지막 촬영이라고 작지만 요란한 파티를 해 주셨다. 과장 조금 섞어서 내 상체만 한 꽃다발에, 팬분들이 회사로 보낸 케이크를 선물받았다.
촬영 스태프분들이 주신 선물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마지막 촬영이었음을 클로버에게도 알려 줘야 할 거 같았기 때문이다. 곧장 엔스타와 공식 짹짹이 계정에 사진과 함께 촬영 후기를 올렸다.
[오늘 ‘파아란’ 마지막 촬영을 마쳤습니다! 클로버분들이 보내 주신 맛있는 밥차랑 커피차도 잘 받았어요ㅎㅎ 스태프분들이랑 감독님, 배우분들도 모두 너무 맛있게 잘 먹었다고 하셔서 어깨가 하늘 위로 올라가는 기분이었어요!
(밥차, 커피차 사진)
짧은 시간이었지만 ‘태주’로 살아갈 수 있어서 영광인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기회 주신 감독님과 동료 배우분들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어요.
무엇보다도 아직 부족한데 항상 진심으로 응원해 주고, ‘태주’를 사랑해 준 우리 클로버, 너무너무 고마워요! 저는 이제 태주를 보내 주고 다시 크리드 문승빈으로 열심히 활동하겠습니다.
Good bye 태주, 파아란!
(유현재, 정 감독과 찍은 사진)]
-ㅠㅠㅠㅠ승빈이 촬영 끝났구나 수고했어 내새끼ㅠㅠㅠㅠㅠ
-카메오로 시작해서 거의 조연까지 따낸 게 내 최애라니
-태주 못잃어ㅠㅠㅠ
-이제 내 주말 누가 책임져주냐…
-커피차 잘 받아서 다행이다ㅠㅠ
-승빈이 이번에도 라떼 먹었구나
-우리 현재 친구가 생겼구나…
-정감독님 다음 작품도 함께 해요 우리
그리고 멤버들이 응원의 댓글을 남겨 줬다.
-우리 문배우형 수고 많았어용 (토끼 이모티콘)
-수고 많았다 오스카 가보자고 (너구리 이모티콘)
-이제 대본 연습 안 도와줘도 돼서 뭔가 아쉽네 (사슴 이모티콘)
-ㅁㅊ유현이가 대본연습 도와줬나본데?
-강도현 ㅈㄴ깐족거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애들 자기 모에화 동물 알고있는거 왜이렇게 귀엽짘ㅋㅋㅋㅋ
-헐 유현아 너도 연기하자
그때 게시글에 파란 딱지가 붙은 계정의 댓글이 달렸다.
@Yoohyunjae_official 5분
-해투 가서도 파아란 본방사수 하는거다?
“내가 헛것을 보고 있나?”
아무리 읽어도 유현재였다. 분명 개인 인스타인데 아이디부터 소속사에서 운영하는 계정처럼 지어 놔서 아무도 개인 계정임을 믿지 않았다.
[댓글 뭐예요?]
[계정에 먼지 쌓인 거 같아서.]
[형은 진짜 이상한 사람이에요.]
[댓글 단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그야 가끔 촬영 사진이나, 일상 사진을 올리는 게 전부여서 만든 지 2년이 지났는데 게시글이 10개가 채 되지 않는 계정이니까. 아마 이게 첫 댓글일 거다.
-내가 지금 꿈꾸는거냐?
-문승빈 당신을 인간 카피바라입니다
-저거 해킹 아니야?
└ㅇㅇ 하이드 소속사는 빨리 상황 파악하고 조치해야할 듯 ㅅㅂ 댓글을 쓰고 다니잖아 이거 심각한거라고
-아니 유현재가 맞을수도 있잖앜ㅋ큐큐ㅠㅠㅠㅋㅋㅋㅋ
-차라리 문승빈이 엔스타에 쌍욕 쓰는 게 더 말이 되는 일임
세상 사람들 다 저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현재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