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시야 돌았네.”
정연은 좌석에 앉아서 공연장을 훑어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 자리에 오기 위해 쓴 돈과 수없이 오갔던 양도를 떠올리면 아직도 치가 떨리지만, 시야를 보면 그 모든 것을 감내할 만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뭔가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저… 이거 드세요!”
“헐, 감사합니다-”
“승빈이 최애이신가 봐요! 그 인형, 짹짹이에서 봤어요.”
“네! 승프 맞아요, 그쪽은 선프 맞죠? 선우 인형이잖아요.”
“네네! 썬냥이에요~”
박선우의 모에화인 고양이 인형인데, 실물로 보니 더 귀여웠다.
“저희 인형이랑 야광봉으로 같이 사진 찍어요!”
“좋아요!”
초면에 자연스럽게 사진까지 찍게 됐다. 엄청난 인싸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사이 레디 앨범 수록곡인 뉴드림이 흘러나왔고, 팬들의 함성이 공연장 가득 울려 퍼졌다. 곧 공연을 시작하겠다는 예열 단계인 셈이다. 곧 공연장 불이 꺼졌고, 카운트다운 VCR이 등장했다.
오프닝 곡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레디’였다. 대부분 데뷔곡인 신세계를 예상해서였을까, 함성 소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출발선 위에 서 있어
설레는 이 감정은
한순간에 POP POP
마치 다이너마이트]
멤버들이 한 명씩 등장할 때마다 공연장이 흔들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뜨거운 반응이었다. 장난감 병정이 생각나는 제복이었는데, 빨강색 재킷에 어깨에는 금색 견장이 달려 있었다. 피지컬이 좋은 게 한눈에 보이는 의상이었다.
승빈은 드라마 촬영 때문인지 머리색을 드라마틱하게 바꾸지는 못했다. 하지만, 밝은 갈색 머리에 그리고 중간중간 연한 핑크색 헤어 초크를 사용했다. 그리고 살짝 컬을 줬는데 춤을 출 때마다 나풀나풀거리는 것이 몽글몽글해 보였다. 포근해 보이는 귀여움은 정말 강력했다. 승빈의 얼굴이 전광판에 잡힐 때마다 앓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특히 ‘레디’의 포인트 안무인 ‘팝 팝’ 가사에 맞춰서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정연은 목이 터져라 승빈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평소보다 분홍빛으로 올라온 볼 때문에 영락없는 복숭아 같았으니까.
“승빈이 귀 움직이는 거 같아요!”
“만져 보고 싶어요… 푹신할 거 같은데!”
기다란 귀가 포인트인 유명 캐릭터와 똑 닮은 비주얼이었다. 정연은 콘서트가 끝나고 나면 여러 팬 아트 계정에서 캐릭터로 모에화한 그림을 원 없이 보겠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다른 멤버들의 머리 변화도 눈에 띄었다. 특히 정유현이 백금발을 한 것이 가장 놀라운 변화였다. 지금껏 머리 색깔 변화가 가장 적었던 멤버였던 걸 생각하면 아주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전광판에 얼굴이 나올 때마다 주변에서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연 역시 반사적으로 탄성이 터졌다.
“와 X나 잘생겼어!”
[운명의 카운트다운은 시작됐어
행운의 클로버를 쥔 채로
I’m Ready, Run to you!]
완벽한 오프닝 무대가 끝나고, 곧바로 신세계부터 카운트다운까지 연달아 진행됐다. 자리에 일어서서 응원한 게 전부인데도 에너지 소모가 엄청났다.
‘나도 이 정도인데 애들은 얼마나 힘들까…….’
연달아 세 곡을 한 후에야 멤버들은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마이크 너머로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와중에도 크리드 멤버들은 팬 서비스를 멈추지 않았다.
“인사드리겠습니다. 하나 둘 셋, 본 투 샤인! 크리드입니다!”
“와, 열기가 미쳤는데요?”
“응원법 들었어요? 헉… 숨이 너무 찬다.”
“저 후반 가서는 인 이어 아예 뺐잖아요, 클로버들 목소리 너무 크고 잘 들려서.”
첫 번째 콘서트여서 그런지 멤버들의 텐션도 평소보다 더 높아 보였다. 특히 강도현과 박선우는 다리를 한시도 가만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오프닝 레디부터 카운트다운까지, 정말 시작부터 전속력으로 달린 기분인데 어때요, 클로버?”
“좋아!”
“역시 목소리가… 여러분, 저녁은 먹었냐고 물어보려고 했거든요? 아주 든든하게 먹고 온 거 같아서 다행입니다.”
강도현의 능글맞은 멘트에 공연장은 웃음으로 가득했다.
“저희가 오프닝 곡에 엄~청 공을 들였거든요.”
“맞아요. 한 30분? 한 시간 가까이 오프닝곡 가지고 열띤 토론을 했다면 믿으시겠어요?”
“그만큼 콘서트에 진심이었다~ 이거죠.”
“저희가 원래 넥스트 월드가 거의 확정이었잖아요? 스파이 덕분에 레디가 선정됐지만요-”
누가 정하지 않았지만, MC 역할을 하던 승빈이 자연스럽게 콘서트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이어 갔다. 음악 방송 MC와 예능 촬영을 하면서 진행 자체도 능숙해진 것이 느껴졌다.
“자, 그럼 다음 무대 바로 시작해 볼까요?”
“달려 보자고요!”
이어진 무대는 오프닝 곡 후보였던 ‘넥스트 월드’였다. 왜 레디와 고민을 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웅장한 사운드와 시선을 사로잡는 퍼포먼스였다.
[비로소 도착한 유토피아
한 발 내딛어 우리의 목적지는
단 하나 Next World]
분명 1분 전까지만 해도 서로 유치한 말장난을 하고, 팬들 앞에서 강아지들처럼 애교를 부리던 남자들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여러분, 근데 어디서 좋은 향기 나지 않아요?”
유현의 질문에 관중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저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공연 중간중간 향수가 뿌려지고 있던 것이다.
“이 향기는 여기 있는 사람들만 아는 거잖아요?”
“승빈이가 또 저희 디렉터분이랑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가져왔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팬분들이 오늘을 더 오래 추억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향기가 떠올랐어요.”
“이런 X친… 승빈이 진짜 천재 아니야?”
“향수 따로 팔면 무조건 살 거예요.”
“그건 걱정 안 해도 될 거 같아요. 코어라면 이미 향수로 굿즈 제작했을걸요?”
잠깐의 토크 타임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무대로 꽉꽉 찬 콘서트였다. 이미 체력이 바닥이 났지만, 승빈과 지운의 유닛 무대가 시작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응원봉을 힘차게 흔들었다.
와이어를 몸에 착용한 승빈과 지운이 공연장을 날아다니는데, 정말 우주를 유영하는 것 같았다.
[무중력 그 한가운데
몸을 맡긴 우리
Step 1, 2, 3]
포근한 승빈의 목소리와 청량한 지운의 목소리가 합쳐져서 귀가 즐거웠다. 무엇보다도 승빈의 눈이 행복으로 벅차오르는 것이 너무 잘 보였다. 지운과 함께 한 무대여서일까, 평소보다 더 신이 나 있었다.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안무를 하는 승빈은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눈물이 고이는 스스로가 주책맞다고 생각했지만, 눈물 날 만큼 빛나는 무대였다.
* * *
꿈과 같았던 콘서트도 어느덧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다. 팬들의 손 편지 이벤트로 한바탕 눈물바다가 된 후라서 앵콜곡인 클로버는 거의 팬들이 부르고 끝이 났다.
“벌써 앵콜곡도 끝났어요…….”
승빈의 아쉬움 가득한 한마디에 정연은 무의식적으로 가지 말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꿈만 같았던 첫 번째 콘서트가 이렇게 끝나 가네요. 뭔가 시원섭섭해요. 정말 오랫동안 꿈꿔 온 자리거든요. 그렇잖아요, 아이돌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많은 팬분과 온전히 우리 노래만으로 콘서트장을 가득 채우는 순간을 항상 바랄 거예요. 그래서 전 참 운이 좋고,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혼자서는 해내지 못할 일을 너무너무 든든한 여섯 멤버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클로버분 덕분에 하나둘 이뤄 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1년 조금 지났는데, 사실 시간 흐르는 게 너무 아까워요…….”
같은 대목에서 승빈도, 크리드 멤버들도, 팬들도 울컥했다. 전광판에 비친 승빈의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살짝 고인 눈물도 영롱했다. 애써 눈물이 흐르려는 것을 막으려는 듯 승빈이 멋쩍게 웃었다. 그 모습에 팬들의 가슴이 더 아려 온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저도 참 유난이죠? 아직 함께 할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 그래도… 여러분과 함께 하는 매 순간은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인지 제가 요즘 일기를 쓰거든요. 투마월 때 연습생 일지 쓸 때 빼고는 기록을 거의 안 했는데, 활동하면 할수록 어떻게든 기록하고 싶더라고요. 그게 글이든 사진이든 영상이든 상관없이. 그러면서 나는 앞으로 이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고민했어요. 마냥 바쁜 스케줄에 휩쓸리면서 보내고 싶진 않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아직 완성하진 못했지만, 어설프게나마 내린 결론은 언젠가 지금이 과거가 됐을 때, 그때를 떠올리면서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 만큼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자-입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클로버들에게도 행복한 기억만 드리고 싶어요. 그래서 앞으로 더 노력하고, 발전할 겁니다. 오늘 저에게 평생 남을 멋진 기억 선물해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해외 투어 잘 다녀오겠습니다! 절대 여러분 외롭게 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꼭 계속 클로버 해 주세요.”
해외 투어라는 말에 팬들은 아쉬워했지만 뒤이은 승빈의 잔망에 모두 잊은 듯 함성을 질렀다.
“저… 생각보다 질투심 많아요! 제가 다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그렇게 씩씩하게 소감을 마친 승빈의 울음을 터트리게 만든 건 아이러니하게도 지운이었다.
“승빈이는 지운이 말에 유독 약한 거 같아요.”
“그러게요. 파이널 때도 자기 이름 호명됐을 때보다 지운이 데뷔할 때 더 울더니…….”
승빈을 중심으로 여섯 멤버가 동그랗게 모였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승빈을 달래고 있었다.
“어, 문승빈 운다!”
“리버, 네가 울면…….”
“윤빈 형도 우는데?”
“이러다가 크리드 울보 그룹이라고 소문나겠어요-”
크리드 멤버들 간의 우정은 뭔가 달랐다. 모든 것이 콘텐츠화되는 아이돌 산업에서 멤버들 간의 관계성도 하나의 셀링 포인트가 된다. 그렇다 보니 서로 맞지 않는 멤버들 사이에서는 말 못 하는 답답함이 있어도 팬들 앞에서는 숨기고 세상 친한 척을 하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이 쌓이다가 결국에는 불화설이 터지기도 하고.
그런데 일곱 멤버들은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는 게 느껴졌다. 그중에서도 승빈과 지운은 더 특별한 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데뷔해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한 애틋함이라고 해야 할까?
* * *
“저는 전생에 나라를 구한 걸까요?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좋은 멤버들과 팬분들, 동료분들을 만날 수 없었을 거 같아요.”
형의 소감을 듣는데 꾹 참아 왔던 울음이 속절없이 터져 버렸다. 이곳에 회귀하게 된 이유가 절대 형에게는 좋은 일이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나의 과오와 형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이 세계 속에서 형은 이토록 행복해하고 있었다.
“…다음 생에도 아이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 역시 같은 마음이다. 몇 번의 생이 있다고 해도, 또 같은 선택을 할 거냐 물으면 나는 주저없이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반짝이는 응원봉 불빛, 그보다 더 반짝이는 팬들의 눈빛, 절대 놓지 않겠다고 말하는 듯한 멤버들의 손. 솔직히 지금 내 눈에 담긴 장면은 다시 한번 지난 삶과 맞바꾸라 해도 후회 없을 경이로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