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오~ 문 배우~”
“아오, 강도현, 저 주둥이를 그냥-”
“하, 내가 언제까지 네 밴드 가지고 다녀야겠냐? 똑같지?”
강도현이 극 중 내 대사를 따라 하면서 놀리는데 얼굴을 보니 잔뜩 신이 났다. 첫방 보고 지금 저 대사만 몇 번째인지. 저거 봐라. 지금도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하고,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넌 오늘 잡히면 각오해라?”
“아! 손은 매워 가지고…….”
지운이 형 뒤에 숨은 강도현이 짓궂게 메롱을 했다. 지운이 형은 강도현을 숨겨 주면서도 타일렀다.
“그만 놀려- 안 그래도 처음 도전하는 일인데 놀리면 기죽잖아.”
“형, 형은 쟤가 기죽을 애로 보여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기 안 죽지, 근데 우리는 다르잖아. 원래 가까운 사람들한테 받는 평가가 더 크게 느껴지는 거야.”
‘저 형은 진짜 천사인가?’
“알았어요. 너 운 좋았다! 지운이 형 말이어서 내가 듣는 거야-”
“너도 운 좋은 줄 알아, 지운이 형이어서 안 덤벼든 거니까.”
“자, 이제 둘이 화해해.”
“네?”
“먼저 장난친 건 도현이니까 먼저 사과해. 그리고 승빈이도 도현이 때렸으니까 사과하고.”
“나 지금 유치원생 된 기분인데.”
“난 유치원 때도 이렇게 사과 안 했어.”
“서로 마주 보고-”
“마주 보고?”
지운이 형은 어떠한 강요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 둘 다 반항할 생각도 없이 일단 마주 봤다. 아마 서로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운이 형 말만 아니었어도…….’
“미…….”
“그래, 미안해, 라고 하면 돼.”
“미… 미… 해”
“뭐라는 거야?”
“아 므은흐드그!”
“형, 강도현이 제대로 사과 안 해!”
“미안하다! 됐냐! 이제 너도 해!”
생각보다 더 순순히 사과하는 강도현에 잠시 당황했다. 더 질질 끌면 나는 사과 안 하고 도망치려고 했는데.
“미…….”
“진짜 네가 때린 곳 아직 욱신욱신하거든?”
“미… 미, 미X놈아, 니가 먼저 놀렸잖아!”
“…….”
지금 여기가 애니메이션 세계였다면 머리 위로 까마귀가 날아가고 있었겠지. 벙쪄 있는 둘의 얼굴을 보다가 민망함에 고개를 푹 숙였다.
“푸핳하하하하!”
강도현은 바닥을 구르고 있었고, 지운이 형도 입술을 앙 다물고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 하면 죽는 병 걸렸냐? 아 웃겨 진짜…….”
“…….”
“내가 장난이 심했어. 내 친구가 연기한다고 하니까 너무 신기해서 그랬어. 사과 안 해도 돼, 생각보다 안 아파.”
미동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가 이상해 보였는지, 강도현이 얼굴을 밑으로 들이밀다가 비명을 질렀다.
“그럼 오늘 아플 때까지 맞아 보자, 이놈아!”
“으아아아악!”
숙소를 활보하는 나와 강도현, 한계에 도달했는지 주저앉아 웃는 지운이 형까지 누가 보면 가관이라고 할 아침 풍경이었다.
* * *
촬영장에 도착해 보니, 웬일로 오재성이 먼저 나와서 연습에 매진하고 있었다.
“연습 많이 했지, 오재성?”
“신경 써 주는 척하지 마.”
‘싸가지 하고는-’
정 감독은 지난 촬영 막바지에, 오재성의 재촬영을 예고했다. 그날부터 오재성이 하루가 갈수록 얼굴 살이 빠져 보인 것은 내 기분 탓이겠지.
몇 개의 신을 더 촬영한 후에야 드디어 오재성의 재촬영이 시작됐다. 유현재는 오재성에게 스쳐 지나가듯 말했다.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한마디였다.
“이번엔 한 번에 끝내자? 나도 퇴근해야지.”
“네!”
태연해 보이려고 노력했겠지만, 살벌한 유현재의 비주얼과 목소리 때문인지 긴장감에 목울대가 넘어가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촬영이 재개되었지만, 슬프게도 오재성의 연기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야, 한영훈!”
“컷! 지난주랑 똑같은 거 같은데?”
“죄, 죄송합니다! 다시 해 보겠습니다.”
나와 있었을 때의 텐션이 재현되지 않고 있었다. 분명 할 수 있는데 괜한 자존심 때문에 억누르고 있는 게 눈에 다 보였다. 촬영이 멈추는 타이밍에 들어가서 연기를 봐주려고 했지만, 귀신같이 알아챈 오재성이 메이크업 수정을 핑계로 현장을 벗어났다.
“재성 씨, 여기 있는 배우들 그리고 스태프들도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이 아닌데 이렇게 시간을 잡아먹으면……. 승빈 씨, 아직 있죠?”
“네……! 죄송합니다. 제가 더 자세하게 코치해 줬어야 했는데…….”
“승빈 씨가 연기 선생님도 아니고 그런 일로 사과할 필요는 없지. 방금 전 그 대사, 승빈 씨가 한번 해 볼래요?”
“제가요?”
정 감독의 급작스러운 제안에 현장 모두가 놀랐다. 정 감독만 평온한 얼굴이었다. 오죽하면 오재성의 화장을 수정하던 스타일리스트가 메이크업 도구를 떨굴 정도였으니까.
“응. 재성 씨가 직접 보면 더 쉽게 이해할 거 같은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잠시 뇌가 정지한 기분이었지만, 곧 정신을 붙잡고 대답했다. 어쩌면 지금 이 기회가 앞으로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네!”
오재성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재성 씨, 잘 보고 해 보세요.”
정 감독이 굳이 오재성을 지목했고, 오재성은 표정 관리가 안 되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네’ 했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대사를 뱉었다. 동경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 분노, 그래서 일부러 처음부터 감정을 터트리지 않았다. 복잡한 감정이 단계별로 나올 수 있도록 서서히 감정을 끌어올렸다.
“…야, 한영훈.”
“언제까지 네가 죽도록 원하던 걸 내가 뺐었다는 착각 속에 살 거냐?”
“닥쳐, 한 번도 네가 부러웠거나 너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었어!”
“그렇게 불쌍하게 살지 마.”
“뭐든 쉬운 새끼가…….”
[형준, 살기 가득한 눈으로 영훈을 노려보다가 전화를 확인하고 자리를 떠난다.]
“오케이!”
이번에도 한 번에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고, 정 감독님은 만족스러운 듯 두어 번 박수를 치면서 다가왔다.
“승빈 씨를 형준 역으로 캐스팅했어야 했나? 근데 그러기엔 태주 역할도 너무 잘하는데……. 둘이 쌍둥이라는 설정이라도 넣었어야 했나?”
나는 멋쩍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옆에 있던 오재성의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자, 재성 씨, 잘 봤지? 딱 저렇게 하면 돼.”
“…네.”
“재성이 잘할 거예요~ 워낙 저를 잘 따라 하… 아니 따르는 동생이라서.”
본심이 튀어나올 뻔했다.
“가서 마지막으로 코치해 주고 와요. 이번 컷에는 진짜 끝내야 해.”
“네.”
오재성에게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지금 네가 가진 감정 그대로, 폭발하고 와.”
“닥쳐.”
“열등감에 미쳐 버릴 거 같잖아. 단순한 분노 따위로 퉁치지 말라고.”
더 건드렸다가는 멱살이라도 잡을 눈이어서 이 정도에서 멈췄다.
“레디, 액션!”
“닥쳐, 한 번도 네가 부러웠거나 너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었어!”
조용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저 모습이지. 누군가를 연기하는 것이 아닌 오재성 그 자체였다. 어쩌면 저 순간에는 나보다 더 형준이라는 캐릭터를 잘 표현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재성의 감정이 점점 격해지고 있었다. 연기를 이어 가던 유현재도 멈칫했다. 감독의 오케이 사인도 들리지 않는 듯 대본에는 없던 대사들을 마구 쏟아 내기 시작했다.
‘저 자식, 왜 저러지?’
핏발 선 눈은 이미 이성을 잃은 듯했다. 유현재의 어깨를 쥔 오재성이 강하게 앞뒤로 흔들기 시작했다. 유현재의 피지컬 덕분에 크게 흔들리지 않았지만, 더 놔뒀다간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너만! 너만 없으면!”
“이 X끼, 미친 거 아니야?”
“컷! 멈춰!”
“오재성!”
스태프들와 내가 달려들어 둘을 떼 놓은 뒤에도 오재성은 진정이 안 되는 듯 한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현재 씨, 괜찮아요?”
“네. 전 괜찮습니다.”
“재성 씨가 너무 몰입했나 보네. 촬영은 여기까지 합시다.”
“방금, 촬영은, 어떻게… 하고요.”
“오늘 촬영분은 아주 잘 나왔으니 걱정 말고 진정부터 하세요.”
오재성은 담요에 싸인 채 대기실로 돌아갔다. 스태프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자 정 감독은 촬영을 급히 마무리했다. 유현재는 오재성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듯 머리 쪽으로 손가락을 돌리며 물었다.
“쟤, 너무 열받아서 회까닥한 거 아니냐?”
“저도 저렇게 폭주하는 건 처음 봐요.”
“아주 메소드 연기자 납셨어.”
‘오재성이 점점 통제력을 잃어 가고 있어.’
넥스트 레벨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연기라서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일 수도 있지만, 사람 눈치나 평판을 엄청 신경 쓰는 놈이 공개된 장소에서 저 정도로 이성을 잃은 건…….
신경질적으로 구겨진 옷 밑단을 판판하게 당기던 유현재가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불평했다.
“아 씨, 어깨 부분 다 늘어났네……. 어찌나 꽉 잡고 흔드는지 한 대 칠 뻔한 거 겨우 참았잖아.”
“잘했어요.”
“나도 성격 많이 죽었다, 그치?”
‘뭐지, 칭찬해 달라는 건가.’
“아, 네.”
“넌 그렇게 능글맞은 애가 이럴 때만 딱딱하게 구냐-”
“넥스트 레벨 때 형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긴 해요.”
“어휴, 그때는 말도 말아-”
“와- 퇴근 안 하고 좀 더 있길 잘했네~”
익숙한 중저음 목소리에 나와 유현재가 동시에 시선을 옮겼다. 시선의 끝엔 김민영이 있었다.
“민영 누나? 촬영 다 끝나고 간 줄 알았는데 계속 있었어요?”
“어. 이번엔 오재성이 무슨 일로 까이려나 궁금해서.”
“마음에 들었겠네요?”
“응. 그러게 감히 내가 추천한 사람을 의심하려 해?”
둘 다 내 편의 사람이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연예계 생활이 배로 힘들어졌을 것이다. 분명 둘 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지고는 못 산다], [선빵필승]이 좌우명일 것이다. 그래도 강력한 조력자가 둘이나 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됐다.
“아, 맞다.”
둘을 보면서 내내 뭔가 말하려고 했는데 드디어 떠올랐다.
“근데 둘 다 다음 달 3, 4일 스케줄 비어요?”
“3일이랑 4일?”
“왜? 확인해 봐야 할 듯?”
“저희 첫 번째 단독 콘서트하거든요!”
“그래?”
“스케줄 없는 거 같은데?”
“뭐야, 방금 확인해 봐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있어도 콘서트 갈 거니까?”
유현재가 특히 나만큼이나 콘서트를 기대하는 것 같다. 하긴, 아이돌 활동에 그렇게 목말라 하는 사람이니까. 하이드도 콘서트를 하긴 했던 거 같은데, 사실 회귀 전에는 관심 없던 그룹이라 잘 모르겠다.
‘나중에 솔로 활동으로 성공해서 더 넓은 공연장에서 콘서트했으면 좋겠네.’
“이틀은 어렵고, 하루 정도는 갈 수 있겠는데?”
“저도 하루 표만 줄 생각이었는데요?”
“야박하게 하루만 주려고 했다고?”
“최대한 팬분들로 채울 수 있게 해야죠-”
“네네, 대단한 팬 사랑 납셨어요-”
애초에 초대권은 누나, 투마월 동료들 정도만 줄 생각이었다. 어쨌든 콘서트는 우리와 팬들로 가득해야 하는 공간이니까.
“준비 잘해라~”
“맞아. 얼마나 멋진 무대 준비했는지 기대하고 있을게.”
“당연하죠-”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웃을 수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오늘부터 또 빡세게 연습에 매진해야겠다고. 만약 아주 조금의 실수라도 생긴다? 저 둘은 최소 10년은 우려먹을 사람들이었으니까. 잘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