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드라마 제작 발표회에 제가 왜 나가요?”
“드라마 홍보차 부른 거 아닐까?”
아침부터 매니저 형이 가져온 서프라이즈 소식에 어안이 벙벙했다. 보통 드라마 제작 발표회라면 주조연 배우들과 감독이 나오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작은 역할인 내가 제작 발표회에 참석한다니. 정 감독과 드라마 제작사에서도 이 드라마에 사활을 걸었구나- 다시 한번 체감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크리드의 인지도가 그 정도로 높아진 건가 내심 뿌듯했다.
“오재성도 참석한대.”
“하긴, 나름 조연인데 참석할 거라고 예상했어요.”
제작 발표회에 참여하는 게 영광이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특혜 논란이나 개인 활동에 대한 적대심을 자극할 수 있겠다는 걱정이 있었다.
“오~ 승빈이 형, 진짜 배우 다 됐네요?”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면 욕먹어-”
“형은 분명 나중에 연기로도 한자리 차지할 거 같아요.”
“재봉이가 미래를 볼 줄 아나?”
“그래도 형은 크리드에 진심이니까 연기해도 안심이에요.”
“당연하지.”
박재봉의 말을 듣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하긴, 연기한다는 이유로 그룹 활동에 소홀해지고 나중에는 배우병까지 걸리는 경우가 부지기수를 넘어서 정석 루트이긴 하지. 그리고 나 역시 배우병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길을 걸으면서 티벡스를 탈출했으니까.
하지만 다시 얻은 기회인 만큼 절대 모두를 실망시키지는 않을 거였다.
* * *
“어머, 승빈아. 오늘 헤어랑 메이크업 미쳤다.”
“승빈이가 은근히 배우상이었네.”
“쌤들 실력이 다 한 거죠~”
“말도 이쁘게 한다니까?”
학원물인 만큼 제작 발표회 의상은 교복이었다. 깔끔한 화이트 톤과 시원한 네이비색의 조합인 하복이었다. 학생 역할인 만큼 수수하고 풋풋함이 강조된 메이크업이었는데, 피부가 하얀 편인 나에게 잘 어울렸다.
“오늘 기사 사진도 잘 나올 거 같은데?”
“예쁘게 찍어 달라고 제가 또 부탁드릴게요.”
“그래, 그래. 오늘 내 새끼가 제일 예뻐 보여야지!”
“거의 승빈이 낳으셨어~”
새삼 잘 맞는 스태프들을 만난 것도 행운이다 싶었다. 티벡스 시절에는 구린 미감에 자존심만 센 헤메코 스태프와 거의 매일 부딪치기 일쑤였다. 얼마 있지도 않은 팬들이 알계까지 파서 숍 바꾸라고 했으니 말 다 했다. 그때 그 알계 덕분에 타 팬들 사이에서 망돌이 망돌일 수밖에 없는 이유라며 데뷔 이래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었다.
이제는 안목도 훌륭하고, 내 의견을 적극 반영해 주는 숍을 만났으니 한이 풀리는 기분이다. 스타일링을 마치고 김민영의 대기실을 찾아갔다.
“배우 다 됐네, 제작 발표회 참석도 하고.”
“에이, 그렇게 생각하기엔 누나 빼고 다 아이돌인걸요?”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닌 거 정도는 알지?”
“그럼요. 쟤는 분량도 없는데 왜 나오냐, 특혜나 감독의 편애냐 뭐… 그런 얘기들 당연히 나오겠죠.”
“걱정 안 돼?”
“어차피 아이돌이 연기한다고 하면 쉽게 듣는 말일 텐데요. 그리고 전 제 연기에 자신 있어요.”
“무슨 근거로?”
“누나가 말했잖아요, 저 연기 소질 있다고, 잘한다고. 누나가 그렇게 말하는데 제가 의심할 필요가 있겠어요?”
다소 뻔뻔한 대답에 김민영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내가 졌다, 졌어. 버릇을 잘못 들였네.”
“짧은 분량이지만 주조연들과 함께 제작 발표회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는 걸 보여 줘야죠.”
장난기 없는 대답에 김민영의 표정도 사뭇 달라졌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유현재가 들어왔다.
“역시 여기 있었네?”
“들어오란 말도 안 했는데 막 들어오는 건 뭐지?”
“별로 언짢지도 않으면서 괜히.”
“둘은 하루도 안 싸우는 날이 없네요-”
“싸우는 거라니, 반가워서 인사하는 건데?”
“이 정도는 이제 안부 인사인 거지~”
서로 웃는 얼굴로 발톱을 드러내는 게 안부 인사라니, 역시 둘은 닮았다.
“근데 무슨 일? 내 대기실을 다 찾아오고.”
“그쪽 말고 승빈이 보러 온 거라서. 대기실에 없길래 여기 있겠거니 했지.”
“저는 왜요?”
“오늘 제발회 참석한다길래.”
“누가 보면 문승빈이 다섯 살 애인 줄 알겠어.”
“내가 또 연기 선배니까?”
“아이고, 이렇게 선후배 따지는 분인 줄 몰랐네요-”
‘아… 열아홉 인생 고되다, 진짜.’
가끔 이렇게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일 때면 가운데에 낀 나만 피곤해진다. 하는 수 없이 내가 상황을 중재했다.
“곧 제작 발표회 시작할 텐데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너무 오래 있었네.”
“그래.”
“어려운 질문 들어오면 SOS 보내.”
“누나한테요?”
“SOS까지 보낼 필요 있나? 척 봐도 곤란하다 싶으면 내가 도와주면 되지.”
“네?”
듣고 있자니 황당해서 할 말을 잊었다. 그니까 지금 저 둘이 나를 두고 서로 기싸움 하고 있는 게 말이 되냐고.
“저 혼자서도 잘하거든요? 진짜 쓸데없는 걱정들 하고 계시네!”
“어이구, 이제 열아홉이다 이거지?”
머리를 헝크리려다 세팅된 머리인 것을 보고 어깨로 손을 옮기는 유현재다. 정신 연령은 저들과 같은데 나만 열아홉, 아니 다섯 살 취급이라니.
‘아, 술 마시고 싶다…….’
* * *
“‘파아란’ 제작 발표회 시작하겠습니다.”
역시나 수많은 기자가 참석했다. 이미 아이돌 생활에 익숙해서 그런지, 사방에서 터지는 플래시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작 발표회는 경험이 있어서 긴장보다는 기대가 됐다.
“그럼, 배우분들과 감독님에 대한 질문 받아 보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이번에 첫 연기 도전인데, 어땠나요?”
“처음이라서 많이 떨렸지만, 감독님과 다른 배우분들 덕분에 잘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 이렇게 무난하게 답할 수 있는 질문들이었지만, 예상한 대로 날카로운 질문도 들어왔다.
“최근 개인 활동에 대한 그룹 내 논란이 있었는데, 이번 연기 활동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요?”
“음, 드라마 제작 발표회인 만큼 제 개인적인 일들로 인한 질문은 답변드리기 어렵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다만, 멤버들 모두 이번 연기 활동에 많은 응원을 해 줬다는 점은 꼭 전하고 싶네요.”
원하는 답변이 아니었는지 기자는 뒤이어 질문을 이어 갔다.
“맡은 배역상 주요 역할은 아닌데도 오늘 제작 발표회에 참석하셨네요?”
“그건…….”
잠시 멈칫한 내 표정을 알아챘는지 기자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때, 누구도 예상 못 한 일이 발생했다. 정 감독이 입을 연 거다.
“제가 개인적으로 요청했습니다. 비록 비중은 적지만 드라마에서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마땅히 드라마를 대표하는 배우로서 참여할 자격이 충분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언론 보도에는 카메오 정도의 역할이라고 했지만, 중간 과정에서 캐릭터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그보다 더 비중 있는 캐릭터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충분히 납득할 만한 설명이었을까요?”
“아… 네. 답변 감사합니다.”
감독님이 직접 나선 것은 의외였다. 감독이 직접 말하자 기자들도 더 말을 붙이지 못했으니까.
“오재성 씨 역시 첫 연기 도전인데, 문승빈 씨와 서로 도움을 주거나 힘이 되었던 일이 있나요?”
“첫 연기 도전이지만 이전부터 연기에 대한 꿈이 있어서 꾸준히 연기 수업을 받았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딘지 모르겠으나 연기 수업 선생이나 학원을 바꾸는 게 어떨까…….’
“그리고 승빈 선배님은 제가 정말 존경하는 선배님이신데, 현장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어요. 서로 연기를 봐주면서 더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죠, 선배님?”
‘저렇게 깍듯이 선배님 하는 소리 진짜 오랜만에 들어 보네.’
가소로운 마음이 들었지만,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네. 맞아요.”
자신의 기대보다 답변이 짧다고 느꼈는지, 오재성이 내 쪽을 보며 멋쩍게 웃었다. 사석이었다면 정색하고 노려봤겠지. 이 정도로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정 감독이 다시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모두 아이돌 출신이고, 이번이 첫 연기 도전입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해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승빈 군은 다시 봤어요. 캐릭터에 대한 해석력이 제 기대 이상이더라고요. 비중이 늘어난 것도 제가 오히려 승빈 군에게 설득당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드라마가 방영되면 태주라는 인물의 비중이 적었다면 아쉬웠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하시게 될 겁니다.”
“또 재성 군 역시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특히 승빈 군이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보니 적절한 조언과 코칭을 해 주고 있고요. 연기 학원 다니는 것보다 승빈 군한테 배우는 게 어떨까 싶을 정도로 승빈 군이 잘해 줬어요.”
‘이 정도로 나를 좋게 보고 있었다고……?’
평소 냉철하고 칭찬 듣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정 감독이 이렇게나 자세하게 칭찬을 할 줄 정말 몰랐다. 그리고 회귀 전에 형이 왜 나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는지 말했던 내용과 일맥상통해서 더 감격스러웠다. 오재성은 분명 칭찬임에도 칭찬 같지 않은 말에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승빈 씨는 첫 연기 도전인 만큼 신경을 많이 쓴 거 같은데, 연기 연습은 어떻게 했나요?”
“저희 멤버들이 일일 상대역이 되어서 대본 숙지나, 연기를 봐주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저를 잘 아는 멤버들이라 제가 어느 부분이 강하고, 부족한지 가장 객관적으로 얘기해 줄 수 있거든요. 특히 유현이 형이 많이 도와줬습니다. 오늘도 여기 오기 전까지 같이 대본 연습을 했어요.”
그때 옆에 있던 유현재가 어깨를 툭툭 치더니 입 모양으로 ‘나는?’ 하는 것이다. 은근 유치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현재 형이랑은 넥스트 레벨 때부터 알았고, 아이돌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서 현장에서도 심심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도움이 많이 되는 조언도 해 줬고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옅게 웃었다. 그 뒤로는 큰 문제 없이 제작 발표회가 끝났다.
“제 걱정 하지 말라고 했죠?”
“야, 쟤 얘기는 하고 왜 내가 도와준 건 얘기 안 했어?”
“누나는 그런 얘기 공식 석상에서 하는 거 안 좋아할 줄 알았죠-”
“…맞아. 그래도 뭔가 유현재한테 지는 거 같다고.”
“참 나, 당연히 나한테 고마운 마음이 더 크니까 말한 거겠지.”
“얘, 내가 추천 안 했으면 연기 시작도 못 했거든?”
“또 또 싸운다. 됐어요. 배고픈데 다들 뒤에 스케줄 있어요? 같이 저녁이나 먹자고요.”
“너는 없어?”
내가 말해 놓고 그제야 떠올랐다.
“…맞다, 저 콘서트 준비.”
“그럴 줄 알았다- 저녁은 나중에 네가 사”
“알았어요, 열아홉 코 묻은 돈으로 맛있는 거 사 드릴게요…….”
한껏 기죽은 목소리와 표정으로 말하니 둘 다 헛기침하며 변명하기 시작했다.
“아니, 너는 그렇다고 진짜 저녁을 사라고 하냐?”
“야, 당연히 장난이었지!”
점점 표정 연기가 풀리면서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뒤늦게 발견한 둘이 양쪽에서 와다다 잔소리를 했지만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오재성을 발견했다. 우리 쪽을 불만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잠시 눈을 치켜뜨고는 자리를 떠났다.
찰나였지만 오재성의 상태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열등감에 분노하면서도 부러워하는 눈빛, 회귀 전부터 익숙했던 그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