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오재성 씨가 꼭 협조해 줬으면 좋겠는데.”
“하하… 감독님 요청인데 당연히 해야죠. 저도 승빈 선배님께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열심히 배워 보겠습니다!”
“아, 승빈 씨가 선배야? 촬영장에선 한 번도 못 들어서 처음 알았네?”
그야 현장에서는 아이돌 선배 취급받고 싶은 마음은 없지 않냐며 호칭 따위 떼 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감독 앞이라고 성격 죽이며 선배라 아양을 떠는데 기가 찼다.
“그래요. 방금 그 신은 다음 촬영 때 다시 촬영하도록 할게요. 승빈 씨도 잘 부탁해요.”
“네!”
정 감독이 대기실을 빠져나가자마자 오재성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어져 있었다. 쾅 소리가 나도록 소파를 내리치던 오재성이 나를 노려봤다.
‘지가 그렇게 쳐다보면 뭐 어쩌라고?’
“너, 재주도 좋다?”
“나 재주 좋은 거 이미 알고 있던 거 아닌가?”
“넌 재주가 좋은 게 아니라 얻어걸린 운이 많았던 거겠지.”
“운을 얻어걸리게 하는 것도 재주야, 재성아. 너처럼 운이 운인지도 모르고 걷어차 버리는 거랑은 다르지.”
“이 X끼가!”
“여기 아무리 우리 둘만 있다지만 대기실이야. 목소리 낮춰.”
회귀도 처음이 아닌 놈이 어찌 된 게 성질을 죽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정 감독을 어떻게 구워삶은 건지 모르겠지만, 난 절대 너한테 연기 안 배워.”
“그럼 계속 대사 하나당 컷 소리만 100번 듣던가. 오늘 감독님 입에서 오케이 들은 기억이 없는 거 같던데.”
“입 다물어.”
“나라면 눈 딱 감고 도와 달라고 할 텐데, 넌 그 쓸데없는 자존심이 제일 문제야.”
“하,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분노에 동경? 그게 가당키나 하냐?”
저 정도도 생각 못 할 만큼 캐릭터와 대본 분석을 대충 했으니 무슨 감정인지 이해할 수 없겠지. 하지만 저 말을 오재성이 하다니. 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끅끅 소리까지 내며 웃는 나를 경멸하듯 쳐다보던 오재성이 악을 쓰며 왜 웃냐고 따졌다.
“와, 소름. 내가 딱 맞는 예시를 찾은 거 같아서.”
“뭐?”
“그거 딱 네가 나한테 가진 감정 아니야? 네가 발악해야 가질 수 있던 것들, 난 너무 쉽게 가진다고 생각했던 거 아니야? 날 죽일 듯 미워하면서도 결국엔 내가 되길 바라잖아. 안 그래?”
“문승빈!”
바닥에 대본을 내동댕이치는데, 제법 살벌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나는 눈 하나 꿈쩍이지 않고 여유롭게 답했다.
“그래! 방금 그거야. 그렇게 연기해 봐.”
“너, 진짜 정신 나갔냐?”
“재성이도 드디어 메소드 연기를 할 수 있게 됐네- 방금 감정 절대 잊지 마. 다음 촬영 때 꼭 칭찬받아 보자고. 다른 분들 대기 시간도 좀 줄여 드리고.”
“꺼져, X친놈아.”
“양심적으로 내가 미친놈일까, 네가 미친놈일까?”
“으아악!”
내가 오재성이었어도 눈 돌아갈 만한 상황이긴 하다. 분을 이기지 못한 오재성이 나에게 달려들려던 찰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매니저 형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승빈아, 여기 있었어? 이제 네 촬영 분량이야!”
“아, 죄송해요. 재성 씨 연기 좀 도와드리느라… 지금 갈게요! 오늘 저도 많이 배웠어요, 감사합니다!”
“이, 이…….”
대기실을 빠져나왔지만, 복도 가득 오재성의 분노 가득한 외침이 들렸다. 왜 저러냐는 매니저의 말에 잘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이는 정도로 넘어갔다. 신경 쓸 가치조차 없었으니까.
[태주, 유정의 거절에 묘하게 기가 죽은 영훈을 위로한다.]
“참 나, 걔가 보는 눈이 없네!”
“뭐라고? 너, 지금 유정이 욕하는 거야?”
“넌 진짜 속도 좋다!”
“다들 유정이가 훨씬 아깝다고 해. 나도 인정하고.”
“야, 기죽지 마. 네가 더 아까워!”
“…너 은근슬쩍 유정이 까 내린다?”
“이 X끼가 편들어 줘도……. 그래, 다들 네가 모자란다고 하는데 나 하나 네가 아깝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겠냐?”
[영훈, 쑥스럽지만 내심 기분이 좋다. 괜히 헤드록을 걸며 장난으로 넘어간다.]
“오케이!”
“진짜요?”
첫 테이크에 오케이 사인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유현재도 진짜 끝이냐며 놀란 눈이었으니까. 정 감독은 오케이 사인을 안 주기로 유명한 감독 중 하나다. 오재성만 봐도 과장이 아니고 100번 넘게 컷 소리를 들었으니까. 정 감독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이며 다음 장면 촬영을 준비했다. 유현재는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갈수록 연기가 느네?”
“형이 잘 봐줘서 그런 거죠~”
“이거 봐. 능글맞아졌다니까?”
“저 원래 능글맞거든요?”
“네네, 원래부터 그러셨군요.”
“네네, 그렇습니다. 이제야 알아봐 주시다니 섭섭하네요.”
“한마디도 안 져-”
어느 정도 친해지고 나서 든 생각이지만, 유현재도 진짜 얼굴에 사과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저 얼굴에 이 성격이라니. 아니다. 반대인 것 같다. 얼굴이 유현재한테 사과해야 한다. 보이는 것과 다르게 장난치기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저 무시무시한 얼굴로 치는 장난이라 처음에는 다들 몰라보겠지만 말이다.
“너희, 콘서트도 한다며?”
“어? 어떻게 알았어요?”
“안무 쌤이 말해 주던데.”
순간 소름이 돋을 뻔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직 콘서트 관련 공지는 올라오지도 않았으니까. 안무 쌤이 말해 줬다는 말에 안도했다.
“형이랑 우리 안무 쌤이 같았나?”
‘하이드 팀의 안무 담당은 다른 사람이었던 거 같은데?’
넥스트 레벨 때 연습하면서 종종 마주쳤던지라 의아하던 찰나.
“나 혼자 따로 안무 레슨 받거든.”
“헐, 대박. 그럴 시간이 돼요?”
의외였다. 가수에 욕심이 많은 건 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유현재도 나 못지않게 극한의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서브 남주인 만큼 분량이 상당했던지라, 거의 매일같이 드라마를 촬영하고 있는데 안무 레슨이라니?
“너도 알잖아. 몸은 안 쓰면 굳으니까-”
맞는 말이었다. 넥스트 레벨 이후 하이드도 급하게 컴백을 하기는 했다. 꽤 괜찮은 반응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유현재 그룹이라는 타이틀을 벗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공백기에는 각자 개인 활동에 집중하는 모양새였다. 거기에 유현재 말을 듣자 하니 정기적인 연습도 없는 듯했다.
“대단하네요. 형, 솔로는 생각 없어요?”
“뭐야, 너야말로 어디서 들었어?”
“네?”
“나 솔로 준비 중이야.”
예상 밖의 답변이었다. 지난 삶에서 유현재는 결국 배우로 전향했을 뿐, 별도로 솔로 앨범을 낸 적은 없었다.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건가.
“대박. 언제 나와요?”
“그건 아직 몰라.”
“왜요?”
“내가 욕심이 좀 많아서, 일단 곡 모으는 중이야.”
알 만했다. 유현재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래서 더 유현이 형이랑 오버랩되고는 했지.
“기대되네요.”
“…진짜?”
“그럼 뭐, 가짜겠어요?”
음악 관련된 얘기를 더 나누고 싶어 보였지만, 매니저가 찾는 소리에 유현재는 다음 신을 촬영하러 이동해야만 했다.
“곡 좀 정해지면 한번 들려줄게.”
“좋아요.”
유현재의 솔로는 회귀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유현재라면 분명 지금처럼 시도했을 텐데, 중간에 엎어지는 일이 생겼겠지. 이번 세계에서는 그의 솔로곡이 꼭 나올 수 있길 응원하게 되었다. 이렇게나 열정적으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까.
* * *
“야, 미친. 크리드 콘서트한대.”
커피차 업체와 연락 중이던 문스트럭이 소리를 질렀다. 콘서트라니. 팬 미팅이 얼마 전이라 아무도 기대하지 못했던 소식이었다.
“콘서트?”
“날짜 뜸? 언제야?”
“이틀? 삼일? 티케팅은 언제임?”
승빈의 첫 드라마 데뷔를 위해 문스트럭의 집에서 서포트를 준비하던 그녀와 친구들이었다.
“좀 하나씩 물어봐라. 금, 토, 일 3일이고, 티케팅은 다음 주네.”
“아니, 코어 얘네는 진짜 공지 때리면 바로 티케팅하네.”
“대관은 또 언제 잡았대?”
“와… 승빈이가 살이 쫙쫙 빠진 이유가 있었구만.”
“그니까. 나는 애가 무슨 학원물이 아니라 액션물 찍는 줄 알았잖아.”
“드라마 촬영에 콘서트 준비까지, 문승빈 독기 미쳤다.”
콘서트라는 단어 하나만 들었음에도 흥분에 가득 찬 그녀들이었다. 최고의 떡밥은 역시나 오프라인 공연 아니겠는가.
“아 미친, 공지 하나 더 떴어.”
“뭔데?”
하지만 새로 올라온 공지를 본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요해졌다.
[CR:ID 1ST WORLD TOUR: IDEA]
“하…….”
“해외 투어라니… 콘서트한다고 좋아할 때가 아니었네.”
“씨X, 벌써 그 시기가 온 거냐?”
“비행기를 없애 버리든지 해야지.”
클로버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해외 팬들은 쌍수 들고 환영했지만, 국내 팬들의 입장에서는 공백기가 점점 길어질 거라는 예고편과도 같았다. 유명 아이돌, 특히 남자 아이돌은 한번 해외 투어가 시작되면 거의 반년은 각오해야 했다. 끝도 없이 일정이 추가됐으니까.
-크리드 없는 대한민국이 말이 되냐
-어딜가ㅅㅂ?
-이제 내한가수 되는건가ㅠㅠㅠㅠ
-공연을 몇십회나 하는거야?
-서울에서 시작했으니 서울에서 끝내야겠죠?
-잠깐 눈 좀 돌리고 올까ㅋ
-데뷔한지 1년 조금 넘었는데 뭔 해투야
-해투가는동안 뭐 하고 놀지?
-크리드는 외화벌러가, 누나는 새오빠 찾을께
“아니, 근데 애들 벌써 해투 갈 정도였나?”
“토스맨 뜨고 나서도 계속 유입이 있긴 하더라고.”
“맞아. 해외 팬들 빡센 거 좋아하는데, 넥스트 레벨 경연 보고 정착하시더라.”
“나 진짜 요즘에 승빈이 사진 올리면 외국어 멘션이 더 많음.”
“어쩐지. 네 계정 팔로워 미친 듯이 늘어나는 거 보고 놀랐잖아.”
“진심. 외국인들 자꾸 승빈이 하얗게 보정하지 말래. 애가 원래 하얀 건데.”
“걔네도 참 꾸준하다. 오빠가 몇 번 바뀌어도 외국인 팬들 하는 소리는 똑같네.”
케이 팝이 점차 유명세를 떨치면서 글로벌 팬들의 유입이 많아졌다. 화력도 쎄지고 일단 인원수로 압도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국가별로 다른 정서 때문에 쓸데없는 논란도 커지는 양날의 검이었다.
“아, 근데 해투 가면 진짜 노잼 시기 시작인데.”
“내가 루커스 간잽하려다가 포기한 게 해투 때문이잖아.”
“야, 나도, 나도! 진짜 루커스는 한국보다 해외에 있는 시간이 더 길 듯.”
“호텔에서 에이앱이나 자주 켜 줬으면 좋겠다.”
“맞아, 그거라도 있어야지.”
“너네는 해투 안 가려고?”
“역시 우리 홈마님, 가는 건 기본이고 어딜 가느냐의 문제지?”
“당연하지, 여행도 하게 방콕이나 대만도 떴으면 좋겠다.”
하지만 문스트럭의 고민은 달랐다. 과연 어디까지 해투를 따라갈 것인가. 같은 구성의 공연이라고 하더라도 국가별, 공연장별로 그 분위기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단 하나의 공연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일단 미국 쪽은 무조건 가야 해.”
“왜? 미국 너무 멀지 않아?”
“영어 쓰잖아. 승빈이 무조건 영어로 진행할 텐데, 통역 안 끼고 할 거 같단 말이야.”
“하긴, 너 승빈이 영어하는 거에 미치잖아.”
“아, 근데 미국은 티켓값 개비싼데.”
“아직 해투는 세부 일정까지는 안 떴으니까, 콘서트 티케팅이 먼저다.”
“무조건 올콘 뛰고 만다.”
당장이라도 티케팅할 듯 열의에 불타는 그녀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