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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260화 (260/346)

260화

콘서트 연습과 드라마 촬영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이 이어졌다. 콘서트 연습 중 작은 미션을 성공해서 얻은 체력 포인트가 없었다면 아마 각혈하고 응급실행이었을 것이다. 모처럼 연습을 쉬는 날이었지만, 드라마 촬영 때문에 다른 멤버들보다 먼저 일어났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으면서 꾸벅꾸벅 조는 내게 지운이 형이 상자 하나를 건넸다.

“이게 므에여?”

“영양제들. 요일별로 나눠 뒀으니까 촬영 중간중간 챙겨 먹어.”

“우와, 고마워요, 형.”

“어제도 유현이 형이랑 대본 맞춰 보다가 늦게 잤지?”

“네, 저 때문에 유현이 형도 덩달아 피곤해진 거 같아서 미안하네요.”

그때 머리 위로 커다란 손바닥이 푹 하고 누르는 게 느껴졌다. 놀라서 윽 소리가 절로 나왔다.

“별게 다 미안하다. 제때 자면 이렇게 안 졸걸? 맨날 한두 시간 더 한다고 안 자서 그런 거잖아.”

“너무 무리하지 마. 또 그때처럼 쓰러질까 봐 걱정… 아, 미안해요, 형.”

“괜찮아. 한 번 더 그러면 엄청 혼낼 거라고 했으니까.”

“맞아요. 내가 저 형 무서워서 오늘부터 영양제 잘 챙겨 먹어야겠네.”

식탁 위 시리얼을 보던 유현이 형이 못마땅하다는 듯 부엌으로 향했다.

“아침에 시리얼이 뭐냐? 기다려 봐.”

“저 이걸로 충분한데요……?”

“유현이 형 말이 맞아. 형, 저도 도울게요!”

아침 밥상을 바라고 이런 건 아닌데. 머쓱함에 괜히 머리만 긁적였다. 의사 집안 막내아들이지만 아이돌 하겠다고 집을 나온 이후로 자취 생활을 한 유현이 형과 원래 요리 솜씨가 있었던 지운이 형이라서 다행이었다. 만약에 박재봉이나 선우 형, 강도현이었다면…….

‘꿀꿀이죽 먹고 출근할 뻔했겠군.’

둘은 능숙하게 각자 자리를 찾아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맞다. 먹고 싶은 거 있어?”

“재료 있으면 해 주고, 아니면 그냥 만들어 준 거 먹어.”

순간 떠오르는 음식이 있었다.

“저, 간장계란볶음밥 먹고 싶어요.”

내 대답에 지운이 형이 눈을 반짝이며 답했다.

“나 그거 잘해! 예전에 학교 전학 갔을 때 잠깐 자취했는데 그때 자주 해 먹었거든.”

‘알고 한 말이에요.’

티벡스 시절 다 쓰러져 가는 숙소에서 배달 음식은 사치였다. 그럴 때면 지운이 형이 항상 해 주던 음식이었다. 숙소에 있는 재료로 간단히 해치우는데 딱 맞는 메뉴였다. 배우가 되고 소속사를 옮기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숙소 생활을 청산했다. 굳이 멤버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도망치듯 짐을 옮겼었지. 비교할 수 없이 넓고 좋아진 숙소에서 어깨 넘어 배운 레시피대로 만들어 봤지만 절대 같은 맛을 내진 못했다.

평생 다시 먹을 일이 없겠구나 했는데,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그럼 나는 뭐 해 줄까.”

“쓰리스타 미슐랭…….”

“아무거나 해 달라는 말을 신기하게도 하네.”

“재밌잖아요-”

유현이 형은 대꾸도 없이 요리를 시작했다. 원래 아무렇게나 빠르게 먹고 연습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주 볼 수 없는 광경에 자연스럽게 대본은 내려 두고 둘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이러니까 요리 대결하는 거 같아요.”

“네가 심사 위원 하는 거야?”

“나중에 요리 콘텐츠 해도 재밌겠다.”

익숙한 고소한 향기가 기분 좋았다. 이참에 레시피를 물어볼까 생각이 들었지만, 곧 마음을 바꿨다.

‘이젠 먹고 싶을 때마다 먹을 수 있잖아.’

얼마 지나지 않아 둘 다 완성된 요리를 가지고 왔다. 유현이 형의 요리는 프렌치토스트였다.

“토스트랑 간장계란밥… 조합이 다양하네요.”

“한식, 양식 다 먹으라는거지.”

“잘 먹겠습니다!”

먼저 지운이 형의 계란밥부터 한입 크게 입에 넣었다. 짭조름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맛, 그동안 너무 그리웠던 맛이다. 감격스러움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뭐, 뭐야?”

“울어? 그렇게 맛있어?”

“…미쳤어요. 너무 먹고 싶었다고요…….”

“전에 먹어 봤던 것처럼 말한다?”

유현이 형의 예리한 질문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계, 계란밥이 그리웠다- 뭐 그런 의미죠!”

“토스트도 먹어 봐. 리액션 기대한다?”

“이거보다 크긴 힘들 텐… 뭐예요? 형, 요즘 요리 배워요?”

심드렁하던 반응이 순식간에 감탄으로 변하자 둘 다 박장대소했다. 내가 생각해도 민망했다. 아무리 그래도 추억을 이길 맛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기대보다 더 훌륭한 요리였다. 이 형은 요리도 잘하네, 역시 신은 불공평하다.

게 눈 감추듯 모든 음식을 다 비우고 난 후, 타이밍 좋게 매니저 형이 도착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맛있는 냄새가 풍기자 매니저 형도 놀란 눈치였다.

“어디 내놔도 굶어 죽진 않겠다-”

“오늘도 촬영 잘하고 와!”

든든하게 채운 배 때문인지, 여유로움을 되찾았다. 오늘 촬영은 평소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 * *

이번 촬영 역시 분량은 아주 적었다. 대사도 한 다섯 마디 하고 끝나나? 그래도 태주와 영훈의 성격을 보여 주는 장면이어서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대기 장소에서 다른 배우들의 촬영 현장을 보면서 다시 신인 배우가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대본 숙지를 하고 있는데, 오재성이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고작 한 신 나오는 거 가지고 너무 오버하시네. 하루종일 대기만 하면… 너무 시간 낭비 아닌가?”

“그 대기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다르겠죠?”

“그 시간에 연기력이라도 상승시키나? 되게 별거 있는 거 같이 말하네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오재성의 멍청함에 더 이상 대꾸하기를 포기했다. 오재성은 이 현장을 정말 촬영만을 위한 곳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현장은 절대 촬영이 끝인 곳이 아니다. 여러 베테랑이 움직이고 있고, 새로운 인맥을 만들 수 있는 장소다. 내가 이 미친 스케줄 속에서도 굳이 매 촬영마다 먼저 나와서 스태프들과 동료 배우들을 맞이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글쎄요, 저는 오재성 씨에 비하면 너무 작은 역할이라 연기력이 상승한다고 큰 도움이 될 거 같진 않네요.”

오재성은 부자연스럽게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그래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선배님. 가수 생활도 하셔야 하는데 연기까지 하는 건 욕심이다, 욕심.”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요. 하긴 저보다 대사 두 마디 더 많은 그쪽도 촬영 시간 딱 맞춰서 나오는데 제가 너무 오지랖이었죠?”

“뭐라고?”

일부러 ‘두 마디’에 악센트를 붙여서 한 음절씩 꼭꼭 씹어 말했다. 오재성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일그러지고 있었다. 하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는 해도 제 나름대로 오디션까지 봐서 맡은 조연인데 카메오로 들어온 나와 별반 다를 게 없는 분량이라면 짜증 날 만하다. 게다가 대본 리딩 날 나의 설득으로 ‘태주’ 캐릭터 비중이 많아진 것도 배가 아팠겠지.

“얼른 촬영 준비하셔야죠? 저도 곧 촬영이라서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야!”

“후배님, 넥스트 레벨 때도 느꼈지만 여기 촬영장이야. 너희 팀의 누구처럼 분위기 파악 못 하고 기분대로 행동할 거면 이 판에서 오래 살아남기 힘들 거야.”

오재성을 압박하며 속사포로 쏟아 내니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완전히 한풀 꺾인 채 자리를 떠났다.

‘성가시긴.’

오재성의 촬영이 시작되고, 나 역시 그의 연기를 보러 현장으로 향했다.

“한영훈!”

“컷, 다시 찍겠습니다.”

겨우 한마디 했는데, 역시 프로답게 매의 눈으로 연기를 보는 정 감독이었다. 그 이후로도 컷의 무한 반복이었다.

‘저 실력으로 어떻게 오디션에 합격한 거지……?’

오재성의 연기가 엉망은 아니었다. 하지만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무작정 화만 내는 장면이 아닌데 악에 받친 고함만 지르니 정 감독 눈에 들 리가 없다.

“재성 씨, 형준이가 지금 어떤 감정일 거 같아요?”

“화가… 났습니다.”

“그건 이미 대본에 나와 있으니까 두 살짜리도 알겠죠? 그런 거 말고 형준이라는 캐릭터의 특성을 생각해 봐요. 지금까지 영훈이라는 캐릭터에게 가져 왔을 감정들을.”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거창하게 했지만, 정 감독의 말을 백 퍼센트 이해 못 한 게 분명했다. 그 이후의 연기도 별반 다른 점이 없었거든.

“하… 여기까지 합시다. 잠깐 쉬었다가 시작하죠.”

드라마 촬영이 시작되고 정 감독이 이렇게까지 한숨을 쉰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정 감독이 백번 양보한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직접 오디션 심사에 참여하고, 연기를 못하는 아이돌이나 배우들은 컷 했다고 들었기 때문에 지금 상황이 더 답답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거의 없는 촬영장과 동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피던 정 감독이 담배꽁초를 밟으며 하소연을 했다.

“X발, 진짜 대본은 읽어 오긴 한 건가… 내가 진짜 X같아서 이번 작품 성공시키고 만다.”

나는 쓰레기를 버리는 척 자연스럽게 그 앞을 지나갔다.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오자 정 감독은 반사적으로 멈칫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볼 때마다 인사하는 거 안 귀찮나?”

‘까칠한 건 여전하네.’

“저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나와 버렸네요.”

멋쩍게 웃으며 지나가려고 하자, 정 감독이 나를 불러 세웠다.

“아까 그 장면, 승빈 씨였다면 어떻게 했을 거 같아?”

“아까 장면이면 오재성 씨 신이요?”

“응. 이형준이 한영훈한테 가졌을 감정이 뭐였을 거 같아?”

“이형준은 한영훈에게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의 근원은 동경 아닐까요? 저렇게 되고 싶다는 강한 욕망.”

“동경이라…….”

정 감독은 순간 눈을 반짝이며 동경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저 형이 저런 눈을 할 때는 정말 마음에 들었을 때인데, 내 해석이 나쁘진 않았나 보다.

“네. 형준이는 영훈이를 이유 없이 미워하는 듯해도 여러 부분에서 닮고 싶어 해요. 비록 비뚤어진 방향이지만 결국 동경의 한 모양 아닐까요? 영훈이를 자극하면서도 은근히 가까이 지내고 싶어하는 걸 봐도…….”

“그 장면 다시 찍어야겠네.”

그다음 이어진 말은 조금 놀랄 만한 제안이었다.

“오재성 연기, 승빈이 네가 봐줄 수 있겠어?”

“네?”

“아까 한 해석대로 오재성이 연기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겠냐고. 마음 같아선 네가 연기하게 하고 싶지만, 갑자기 배역을 바꿀 수는 없으니까.”

“제가 그래도 될까요?”

“내가 직접 얘기할 거니까 뭐라 못 하겠지. 솔직히 못 봐주겠어서 이렇게라도 부탁하는 거야.”

“저도 부족하지만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그래. 아, 반말 써서 불편하나?”

“아뇨? 편하게 대해 주세요.”

“나랑 편하게 지내고 싶어?”

“그야… 불편한 거 보단 좋잖아요?”

정 감독은 입꼬리만 살짝 올려 웃어 보였다.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다시 촬영장으로 향했다.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면서도 방금 표정이 잊혀지지 않았다. 회귀 전 처음 친해진 날과 소름 돋도록 같은 얼굴이었다. 내가 놓쳤다고 생각한 인연은 이곳에서도 어떤 방법으로든 다시 연결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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