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여보세요?”
[야, 너 연기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드라마 찍는다고 기사 떴던데?]
오랜만에 주어진 늦잠의 기회였는데, 아침부터 걸려 온 누나의 전화로 다 날려 버렸다.
“아… 기사가 벌써 나갔나?”
[뭐야! 너, 연기하는 거야 진짜?]
“어우 시끄러. 아침부터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건데.”
[너나 아침이겠지. 여긴 저녁이거든?]
“잘났다, 아주.”
[나 잘난 게 하루 이틀임? 암튼 그래서 언제 나오는데?]
“이제 막 찍기 시작해서 방영하려면 몇 달 걸릴걸?”
[와 근데 진짜 신기하긴 하다, 네가 연기라니-]
단잠을 다 깨운 얄미운 누나의 전화였지만, 뭔가 감회가 새로웠다. 지난 삶에서 내가 처음 연기를 시작한 건 티벡스가 망할 대로 망해서 더 이상 희망이 없던 순간이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는 연기한다는 얘기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면 정말 내가 망했다는 걸 전하는 느낌이었으니까.
영화가 예상치 못한 대박이 나고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기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가족들에게 연락할 수 있었다. 아마 아빠는 내 첫 작품 ‘어쩌면 그날’을 보고, 극 중 ‘지석’이가 너무 안타까워서 우셨다 그랬지. 그 눈물은 아마도 지석이를 연기했던 나를 향해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많이는 안 나올 거야.”
[야, 그래도 정 감독 작품이라며! 나도 그 감독 좋아하는데, 진짜 대박이네.]
맞다. 누나랑 나랑 유일하게 겹치는 게 바로 드라마나 영화 취향이었다. 지난 삶에서 내가 정 감독이랑 친해졌을 때, 제일 반기던 게 누나였지. 한동안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몽글몽글 떠올랐다. 진짜 정신없이 지내긴 했구나.
[어쩐지, 어렸을 때부터 애가 뻔뻔한 게 연기 잘할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애기 때부터 천연덕스러웠잖아. 사고 치고는 자기 아닌 척하고, 생각해 보니까 그때부터 연기했던 거네.]
“하… 끊는다?”
[끊든가 말든가. 다음에 정 감독님한테 사인이나 하나 받아 주라.]
“누나 하는 거 봐서-”
[어쭈? 나 한국 날아간다?]
“됐네요. 종방연 때 한번 여쭤보긴 할게.”
[못 받으면 우리 남매의 연은 거기서 끝인 걸로 하자.]
“오……?”
[얘 봐라. 너 지금 일부러 안 받으려고 했지!]
“농담이지~”
[그래. 암튼 크리드 애들한테도 안부 전해 줘라. 재봉이가 다 컸더라.]
“그대로 전해 줄게. 재봉이가 엄청 좋아할 듯.”
[오냐- 끊는다.]
역시나 모든 전화의 끝은 문해빈이었다. 항상 자기가 원할 때만 전화 걸고, 용건이 끝나면 칼같이 끊어 버리는 우리 누나. 현실 남매 그 자체의 통화였지만, 어느새 내 입꼬리도 올라가 있었다.
누나와의 통화를 마치고, 포털 사이트에 내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이름을 검색해 보는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데뷔 초에는 신기해서 거의 매일같이 검색했던 거 같은데 말이다.
[(단독) 크리드 문승빈, ‘파아란’ 합류. 드라마 첫 데뷔.]
7인조 남자 아이돌 그룹 크리드의 멤버 문승빈이 ‘파아란’에 합류하면서 브라운관 첫 데뷔를 알렸다. 마이더스의 손으로 유명한 정 감독의 복귀작으로 이미 유명세를 탄 ‘파아란’은 청춘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는 학원물이기에, 신예 등용문으로 기대되고 있었다. 극 중 문승빈이 맡은 역할은 영훈(유현재 분)의 친구 ‘태주’로 영훈의 성장에 큰 영향을 주는 존재다. 한편, 해당 작품에는 포커스의 멤버 오재성도 직접 오디션을 보고 합류했다. 여러 아이돌이 참여하는 만큼, 그들이 어떤 연기를 보여 줄지 귀추가 주목된다. (중략) 문승빈은 “좋아하던 감독님의 작품에 합류한 만큼, 최선을 다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크리드 데뷔 앨범 뮤직비디오에서 이미 연기로 화제가 되었던 그이기에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파아란’은 올 하반기 방송 예정이다. (XX뉴스 박상재 기자)
-헐 승빈이 연기라니ㅠㅠㅠㅠㅠㅠㅠ
-학원물이면 교복승빈이 보는 거임????
-정감독? ㅁㅊ 정감독 작품 다 영상미 돌았는데;;
└진심ㅠㅠㅠ 거의 뭐 승빈이 영상화보집일 듯ㅠㅠㅠㅠㅠ
-아니 첫 작품부터 정감독? 돌았다;;
-승빈이는 진짜 못하는게 뭐야ㅠㅠㅠㅠㅠㅠ
-승빈이 연기 ㅈㄴ기대하긴 했는데 이렇게 빨리 보게된다고??
└ㄹㅇ... 갑자기 다가온 최애의 연기라요ㅠㅠㅠ
-설마 럽라있는 건 아니겠지....
└에이........(덜덜덜덜덜)
└학생들이 어디서 연애야 연애는.....(벌벌벌)
이른 아침임에도 벌써 소식을 접한 팬들의 반응이 다양했다. 대부분 생각보다 빠른 거 같다는 얘기와 정 감독 작품이라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 큰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나만 해도 이렇게 빨리 연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김민영과의 MC 인연과 ‘파아란’이라는 작품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말 그대로 운명적인 사건이었다.
-뭐야, 문승빈 벌써 연기하는 거야?
-아니 개인활동 그렇게 난리나고도 또 문승빈임?
-이럴거면 걍 솔로하라그래ㅅㅂ
-MC도 문씨, 예능도 문씨, 드라마까지 문씨?ㅎ.....
-이정도면 문승빈 코어의 아들 아니냐???
-대체 문승빈이 뭐라고 이렇게 푸쉬해주는 건데?
물론 기대하는 반응만 있는 건 아니었다. 개인 활동에 대한 불만이 쏟아졌다.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대부분 크리드의 안티가 아니라 팬인 게 보였으니까. 나보다는 다른 멤버를 더 좋아하는 팬들이겠지.
이런 반응을 예상했기에 회사에서도 보도 자료를 대본 리딩 이후에 낼 예정이었다. 선우 형과 재봉이가 함께 합류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먼저 방영 예정이었으니까.
‘뭔가 이상한데?’
묘한 기시감에 기사를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 봤다. 그리고 기사를 쓴 기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박상재 기자라… 재밌게 구네.”
예상대로 아는 이름이었다. 이번 생에서도 이 인간을 마주하게 될 줄이야.
박상재 기자는 VM 전담 기자였다. 거의 모든 VM의 보도 자료가 저 사람의 손을 거쳐서 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VM, 특히 루커스 관련된 보도를 단독으로 독점하면서 이름을 알린 기자였다. 내가 저 인간의 이름을 아는 이유도 당연히 기사 때문이었다. VM에서 쫓겨난 내가 티벡스로 데뷔하자 포커스와 온갖 비교를 하면서 기사를 썼던 기자였으니까.
보아하니 저 기사는 VM에서 낸 게 분명했다. 정 감독은 제작발표회 전에 언플하는 걸 꺼리다 못해 싫어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중간에 오재성 얘기까지 알차게 껴 넣은 게 딱 VM 작품이었다. 포커스와 크리드를 비교하던 옛 버릇 못 버리고, 나를 오재성 언플용으로 쓰려는 것 같았다. 더불어 내 개인 활동이 한창 이슈였으니까, 화제성도 이용해 먹을 겸. 이번에 머리 좀 쓰긴 했네.
‘그런데 이번에는 오재성 편이라니.’
티벡스 전체를 까 내려야 했던 그이기에, 당연히 오재성에 대해서도 기사를 여럿 작성했다. 티벡스는 이미 망한 그룹이라 다들 관심이 없었음에도, 유독 저 기자만은 오재성의 문제 행동을 까발려서 가뜩이나 망한 티벡스에 부정적 이미지까지 더해 준 거다. 망해도 조용히 망해야 살길을 찾든지 할 텐데, 그 가능성까지 짓밟힐 뻔했지. 그러니 내가 어떻게 저 이름을 잊겠는가.
그런 사람이 이번에는 ‘직접 오디션을 보고 합류’했다며 오재성을 띄워 주는 기사를 쓰고 있는 거다. 분명 오재성도 저 이름을 기억할 텐데, 반응이 궁금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일단은 이게 먼저였다.
“실장님, 저 기사 뜬 거 보셨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언플에는 언플이었다.
* * *
“승빈아, 잠깐만.”
“어, 형. 왜?”
“우리 유닛 곡으로 자작곡을 하면 어떨까 싶어서-”
“형, 괜찮겠어?”
“뭐가?”
“시간이 좀 촉박하지 않을까?”
사실 자작곡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형이랑 의미 있는 곡을 만들어서 무대를 한다면 더 좋을테니까. 하지만, 콘서트를 연습하면서 새로운 노래를 만들기에는 현실적으로 너무 촉박했다.
“내가 만들어 둔 노래가 있기는 한데-”
“대박, 형이? 언제? 왜 안 들려줬어?”
“…좀 부끄러워서.”
“오, 벌써 기대되는데?”
오랜만에 보는 형의 수줍은 모습에 조금 더 장난칠까 했지만, 노래에 대한 호기심이 먼저였다. 자기가 먼저 말해 놓고는 망설이는 형을 얼른 재촉했다.
“듣고 놀리기 없기야-”
“알겠어 알겠어. 얼른 들어 보자.”
지운이 형이 조심스럽게 플레이 버튼을 눌렀고, 흘러나온 멜로디에 모든 것이 일시 정지 되는 느낌이었다.
[홀리듯 이 순간을 Catch
흔들리는 눈동자 속 Zoom In
오직 내 향기만을 남긴 채 Disappear
Yeah 영원히 남을 이 Moment]
소름 끼치도록 익숙한 이 노래. 두 번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노래를 다시 듣게 됐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할 수 없었다.
이 노래는 과거 티벡스 시절 나와 지운이 형의 유닛송으로 계획된 곡이었다. 티벡스의 미니 4집 중 수록곡으로 들어갈 예정이었지. 그쯤 되니 외부에서 곡을 사올 돈도 없고, 말 그대로 각자도생해야 할 상황이었으니 알아서 살길 찾으면 앨범은 내 주겠다는 태도였다. 그때 들었던 곡이었는데, 처음 듣자마자 마음에 쏙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강력하게 같이 부르면 안 되겠냐고 어필할 정도였으니까.
[영원은 없다 해도 No problem
그저 리듬에 맡긴 채 Move
너와 내가 눈 마주한 지금을
기억해 Like a magic]
그래서 그 곡은 어떻게 됐냐고? 티벡스의 멸망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미니 4집이 완전히 공중분해되면서 수록곡으로 작업한 곡들도 지운이 형의 컴퓨터 파일 어딘가에만 존재하게 되었다. 타이틀 감으로 해도 손색없는 곡이었기 때문에 더 아쉬웠던 기억이 남아있다.
이후에도 곡이 아까운 마음에 다시 대표를 설득해 보자고 했으나, 지운이 형은 끈질기게 곡을 들려주지 않았다. 앨범이 엎어진 날 완전히 지워 버렸다는, 누가 들어도 변명인 거짓말을 할 뿐이었다.
“노래… 괜찮아?”
이렇게 좋은 노래를 만들어 놓고 노심초사해 하는 태도가 어이없었다.
“너무 너무 좋아요! 이 노래를 다시 듣게 될 줄이야…….”
“다시 들어? 내가 전에 들려준 적이 있었나?”
“아, 아니요? 이렇게 좋은 노래를 다시 듣게 될 줄 몰랐다는 거죠-”
꽤 오랜 시간 회귀 전 일을 얘기하는 일이 없었는데, 지금은 너무 감정이 격해져서 순간 실수할 뻔했다.
“이 노래로 해도 될까?”
“당연하죠! 꼭 저랑 이 노래 같이해야 해요!”
“당연하지~ 너도 좋다고 하니까 다행이다.”
‘이 노래로 형이랑 무대 설 수 있다는 게 더 영광이죠.’
그때 만들었던 안무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이번 무대를 준비하면서 꼭 그 안무도 녹여 낼 생각이다. 회귀 전에 가졌던 아쉬움을 메워 낼 수 있는 기회가 점점 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행운들이 그 모든 결말을 바꾸기 위한 걸음이 되길 간절히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