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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258화 (258/346)

258화

콘서트 세트 리스트가 어느 정도 완성이 되고, 콘서트의 전체적인 콘셉과 무대 기획을 위해 오해나 디렉터님과 만났다.

“축하해요. 첫 팬 미팅이랑 첫 콘서트를 같은 해에 하게 됐네요? 그것도 더 큰 공연장에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준비해 볼게요.”

“콘서트 콘셉트로 생각해 둔 거 있어요?”

“음… 유토피아요!”

“유토피아?”

역시나 이번에도 의아한 반응이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봐요. 승빈 씨 안목은 이미 검증되었으니까.”

“그렇게 말하시니까 너무 부담되는데요?”

“부담을 이겨 내야 완벽한 결과물을 얻을 수 있는 거 알잖아요?”

“그냥 약한 소리 한번 해 봤어요.”

“알고 한 말이에요.”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척척 알아내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나는 준비해 온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크리드의 유토피아! 그래서 크리토피아…….”

“…….”

순간 정적이 오갔다.

“너무 특정 상품명 같지 않아요?”

“그러네요…….”

미처 예상치 못한 문제였다.

“이데아는 어때요, 그럼?”

“오, 좋아요!”

크리드의 이름에 이데아의 의미도 있으니 유토피아보다는 이데아가 더 적합하다는 판단하에 콘서트 콘셉트와 이름은 이데아로 정해졌다. 크리드와 클로버의 이상을 담은 콘서트라는 의미이면서 앞으로 크리드가 보여 줄 이상에 대해 선언하는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담았다.

“이데아는 현실과는 정반대인 이상적인 세계를 의미하잖아요. 그래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싶어요. 그런데 공연장 안에서 그걸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내 질문에 오해나 디렉터는 잠시 고민하다가 번뜩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핑거 스냅을 하며 말했다.

“향기! 향기가 있네요.”

“향기요?”

세트나 무대 효과를 얘기할 줄 알았던 내 예상과 완전히 빗나가는 제안이었다.

“네. 공연장에 분위기에 맞는 향수를 뿌리는 거죠. 오직 이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향기로요. 그렇게 되면 그날의 기억이 시각적으로뿐만 아니라 후각으로도 남게 되는 거고, 더 짙은 감상을 남길 수 있겠죠.”

순간 머릿속에 전구 불이 켜지는 기분이었다. 시각적 기억만큼이나 오래가는 것이 후각이기 때문이다.

“향기는 생각도 못 했는데 너무 좋은 거같아요! 향기로 기억하는 추억이라니.”

공연장에 향수를 뿌릴 생각을 하다니. 역시 전문가는 전문가다. 무대 세트나 효과로만 분위기를 만들려던 나의 시야를 확장해 주는 색다른 아이디어였다.

“그리고 나중에 굿즈로 그 향기가 들어간 향수를 판매하는 방법도 있겠죠.”

역시 오해나 디렉터였다. 단순히 공연장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을 넘어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놀랍도록 상업 예술과 잘 맞는 사람이었다.

“그럼 판매 중인 향수가 아니라 새로운 향을 제조해야겠네요.”

“달콤하지만 마냥 가벼운 향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향기에 대해 잘 아는 분이 있어요. 그분한테 한번 물어볼게요.”

“늘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말했잖아요, 난 재밌다고 생각하는 일에만 열정적인 거. 승빈 씨는 지금처럼 나한테 영감이 될 만한 아이디어들을 제공해 주면 돼요.”

“저도 더 노력할게요.”

오해나 디렉터는 싱긋 웃으며 회의실을 떠났다. 벌써부터 콘서트에 대한 기대감이 차올랐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기억을 담은 향기라니,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물할 수 있을 거 같다.

* * *

촬영장에 제일 먼저 도착해서 대본 준비와 함께 현장의 스태프, 배우들에게 한 명 한 명 인사를 나눴다. 처음에는 나를 굴러온 돌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년간의 연예계 생활로 얻은 데이터로 보아 예의 있게 대하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마음 같아서는 굳이 오재성에게까지 인사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사사로운 감정은 잠시 숨기고, 오재성에게 먼저 손 내밀어 인사를 했다.

“오늘 촬영도 잘 부탁드립니다.”

오재성은 내 손을 힐끗 보고서도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지 않았다. 내민 손이 무안해졌다.

“문승빈 씨는 참 운이 좋으시네요.”

날 서린 말투에 다른 연기자들이 그들을 흘끔 쳐다봤다. 오죽하면 오재성의 매니저도 안절부절못했을까.

“문승빈 씨? 이젠 선배라고도 안 할 생각인가 보네?”

“여기가 무슨 음악 방송도 아니고, 피차 첫 작품인데 선배는 무슨-”

그래, 이래야 오재성답지. 오재성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한결같다는 거였다. 한결같이 멍청하고 제멋대로였다. 회귀해서 좀 눈치가 생겼나 했더니,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회귀 초반에 자기 성격 숨기던 게 기적이었나보다.

“맘대로 하세요, 어차피 마주칠 분량도 거의 없는 거 같던데-”

하지만 나도 이제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오재성이 형에게 했던 짓을 생각하면 지금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인내심의 한계였으니까.

“뭐라고?”

“아, 귀가 잘 안 들리시나? 오늘 촬영하면 분량 다 끝나시는 거 아니에요?”

“이게 진짜!”

나름대로 조연 역할로 뽑혔는데 터무니없이 적은 분량인 게 스스로도 어이없었겠지. 듣자 하니 말이 오디션이지, 실제로는 VM 측에서 끼워 넣은 거라고 했다. 남주인공이 VM 소속 연기자였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했지만 사실이었다니. 그래 놓고는 연기돌로 언플하려고 오디션 운운하면서 뻔뻔하게 군 거였다. 하여간 정말 한결같은 소속사였다. 오재성이 도끼눈을 하고 노려봤지만, 절대 눈을 피하지 않았다.

“뭔데 난리야?”

방금 도착했는지 아직 사복 차림인 유현재가 들어왔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형.”

유현재는 여유롭게 웃으며 어깨동무를 했다.

“오재성 씨는 왜 아무것도 아닌 일에 왜 언성을 높이시고 그럴까, 승빈아?”

“그러게요.”

오재성은 기가 차다는 듯 혓바닥으로 안쪽 볼살을 밀어내며 자리를 떠났다. 그제서야 유현재는 어깨의 손을 풀고 심드렁하게 물었다.

“오늘 첫 촬영인데, 연습 잘해 왔지?”

“그럼요-”

“연기 연습은 누구랑 해? 소속사에서 붙여 주나?”

“저희 소속 배우가 없어서 그런 건 없고, 유현이 형이 같이 봐주고 있어요.”

유현재는 유현이 형의 이름에 잠시 멈칫했지만, 곧 평소처럼 말을 이어 갔다.

“하긴, 우리 소속사에서 그 형 배우로 데뷔시키려고도 했거든. 그래서 연기 수업도 같이 들었었는데 그걸 이렇게 써먹네.”

“유현이 형도 연기 잘할 거 같은데.”

“그 형이 못하는 게 뭐가 있겠냐?”

“그쵸.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연습생 시절의 앙숙 관계는 넥스트 레벨로 완전히 청산한 게 분명하다. 어쩌면 정말 같은 팀으로 데뷔하고 싶었던 거 아닐까. 유현재가 우리 팀이었으면 어땠을까, 상상이 안 가는 조합이기는 했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나 먼저 간다.”

“저도 현장에서 볼게요.”

“그래, 보고 많이 배워.”

“참 나, 예예, 선배님-”

현장에는 김민영과 남주인공 역할의 배우가 열연하고 있었다. 풋풋한 첫 만남을 연기하던 중이었지만, 컷 소리가 나자마자 김민영은 곧바로 연기에서 벗어나 메이크업을 수정하러 현장을 빠져나왔다.

“뭐야, 벌써 왔어? 너 오늘… 맞다. 유현재 욕하는 애들이랑 싸우는 신 있었지?”

“네.”

“그거 하나 찍는데 엄청 일찍 왔네?”

“누나랑 선배님들 연기하는 거 보면 배울 게 많을 거 같아서요. 현장이랑도 익숙해져야 할 거 같고.”

“연기자 다 됐네. 준비 많이 해 왔나 봐?”

“준비 많이 한 건 어떻게 알았어요?”

“준비 많이 하는 건 당연한 거고, 넌 당연한 일 정도는 해 오는 애니까?”

“…이거 칭찬 맞죠?”

“아마도?”

주변 스태프들은 침 소리 넘기기도 힘들어 보이는 텐션의 대화였지만, 나와 김민영에게는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였다.

한참 대기를 하고 난 후에야 내 분량 촬영이 시작됐다.

[태주, 영훈을 욕하는 반 친구에게 다가가 오해를 풀려고 한다. (처음에는 이성적으로 설득하다가 점점 감정적으로 울분을 토한다.)]

“그거 다 오해야.”

“한영훈 잘못인 거 다 밝혀진 거 아닌가? 경찰까지 부른 마당에.”

“영훈이 말을 믿어 준 사람이 있기나 해? 애초에 거기에 없는 애였어!”

“백날 그렇게 말해 봐, 네 말 들어 줄 사람이 있기나 할까?”

[태주를 발견한 영훈, 자신을 비웃은 학생에게 주먹질을 하고 태주와 함께 교실을 빠져나온다.]

“주먹질하지 말라고 했잖아!”

“어차피 주먹밖에 모르는 새끼로 소문 난 마당에 뭐가 아쉬워서?”

“…….”

“너야말로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대학 가야 하는 애 생기부에 빨간 줄 생겨도 되냐?”

[영훈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는 태주, 반창고를 던지고 교실로 돌아간다.]

“…짜증나.”

대본에는 없었지만, 자리에 잠시 우뚝 서서 고개를 푹 숙였다. 태주였다면 분명 영훈의 마지막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더 용기 낼 수 없는 자신에게 답답함과 부끄럼을 느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컷!”

감정이 더 깊어지기 전에 정 감독의 컷 사인이 들렸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연기 경험이 전무했던 것도 아니고, 주연보다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을 역할이었지만 이상하리만치 긴장이 됐다. 회귀 전 첫 촬영만큼이나 말이다.

“마지막에 왜 멈췄어요, 승빈 씨?”

감독의 물음에 대본 리딩 때와 같이 내 생각을 천천히 전달했다. 정 감독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음 촬영으로 넘어갔다. 긍정인지 부정인지는, 1화가 방송되는 날 확인할 수 있을 거 같다.

현장을 빠져나오자 유현재와 김민영이 보였다.

‘김민영은 오늘 분량이 끝난 걸로 아는데……?’

“누나, 아직 퇴근 안 했네요?”

“도무지 널 믿을 수 있어야지, 대사 실수 하나 안 하나 감시하고 있었어.”

“저 대사 실수는 안 했는데.”

내 말에 김민영이 피식 웃었다.

“그래, 잘했다, 아주!”

“저 처음치곤 잘 하지 않았어요?”

“그래, 대본대로 안 하는 배짱도 있고 아주 잘하셨어-”

유현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얹었다.

“저도 모르게 그래 버렸어요.”

“넌 정 감독님 안 무섭냐?”

“형은 무서워요?”

“내가 누구 무서워할 사람으로 보이냐?”

“저도 누구든 쉽게 무서워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난 이래서 네가 재밌어.”

“저도 형 재밌어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외적으로 유현재는 확실히 무섭게 생기긴 했다. 나보다 손 한 뼘은 큰 키로 내려 보며 안 그래도 낮은 목소리로 저런 말을 우다다 내뱉는데, 친하지 않았다면 식은땀이 났을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 너 연기에 소질 있어.”

유현재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형한테도 그런 말 들으니까 제 연기가 그렇게 나쁜 건 아닌가 봐요.”

“누가 또 그런 말 했냐?”

“난 다음 스케줄 때문에 먼저 간다-”

어쩜 딱 이런 타이밍에 자리를 피하는 걸까. 유현재는 김민영의 뒷모습에 눈짓하며 입모양으로 김민영이 그런 소리를 했냐며 여러 번 물었다.

“아니, 칭찬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저 인간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생각했다.

‘님도 그런 소리 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데요…….’

하여간, 저 둘은 동족 혐오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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