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팬 미팅의 여운을 다 느낄 새도 없이 본격적인 촬영 준비에 돌입했다. 파아란은 학교를 배경으로 한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지만, 결코 가벼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감정선이 복잡하기로 유명한 작품이었다. 머리를 대충 말리고, 이미 너덜너덜해진 1화 대본을 들고 아침 일찍부터 거실로 나왔다. 오늘도 내 연습 상대는 유현이 형이었다.
“다 씻었어?”
“네. 형, 피곤할 텐데 고마워요.”
“네가 지금 누구한테 피곤하다고 하는 거야? 너야말로 안 쓰러지는 게 기적이지.”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에요.”
정말로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라면 모를까. 내가 한 선택의 결과였지만, 역시나 욕심이긴 했다. 대본 리딩 이후 회사에 촬영 분량이 늘어났다는 얘기를 전달할 때도 제일 강조했던 건 크리드 일정 소화였다. 오로지 내 욕심으로 이뤄진 행동이었기에 팀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서도 슬슬 해외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 시작이 바로 해외 투어였다. 아마 다음 주쯤이면 콘서트 공지가 나가겠지. 서울에서 첫 단독 콘서트를 열고 그다음은 약 3개월간 해외 투어 일정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투어의 마지막은 다시 서울에서의 콘서트. 국내 팬들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 주기 위한 일정이었다.
그 말인즉슨, 드라마 촬영과 해외 투어 준비를 동시에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거다. 솔직히 미친 짓이었다. ‘파아란’만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무리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나 둘 중 뭐 하나도 절대 놓칠 수는 없었다.
“내일이 첫 촬영이지?”
“네, 형도 오늘로 1화는 마지막이네요.”
“아쉽네, 대사 다 외웠는데-”
회귀 전 투샤인이 해체하고 나서 유현이 형은 연기자의 길을 걸었다. 작품을 하면서 마주한 적은 없었지만, 그 외모와 능력에 비해 크게 빛을 발하지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고는 결국 연예계 활동을 접다시피 했지.
하지만 그로 인해 나는 유현이 형이 꽤 연기에 재능이 있었던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형에게 대본 연습 상대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따로 연기 수업 받을 여유가 안 되기도 했지만, 형에게도 자연스럽게 연습이 될 수 있을 거였으니까.
이미 한 번 개인 활동으로 난리가 난 만큼, 다른 멤버들에게도 점차 개인 활동의 영역이 넓어질 거였다. 개인 활동 때문에 결국 이른 해체를 맞이한 투샤인과는 반대로, 오래 크리드를 할 수 있는 에너지로 만들 생각이었다. 따로 또 같이. 그것만큼 매력 있는 게 없었으니까.
“그럼 시작해 볼까?”
“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일부러 더 공손하게 말하며 장난을 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본격적인 연습이 시작되자 형도 나도 분위기가 달라졌다.
“와, 대박. 둘이 뭐야?”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 팽팽한 긴장감을 깬 건 강도현이었다. 언제 나왔는지 핸드폰을 들고 거실 한쪽에 앉아 있었다.
‘나온 줄도 몰랐네.’
“나 소름 돋았어. 문승빈은 그렇다 치고 유현이 형, 연기 배웠어?”
“나는 왜 그렇다 치는데?”
“너는 원래 연기 잘했잖아.”
또 장난치나 했더니, 의외의 답변이었다.
“이거 봐. 내가 둘이 연습하는 거 찍었음.”
“말도 안 하고 언제 찍었냐?”
“이거 동영상 녹화 시작하는 소리도 들렸는데, 둘이 하도 몰입해서 모른 거임.”
강도현이 보여 준 영상에는 유현이 형과 나의 연습 장면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언제부터 찍기 시작한 건지, 꽤나 긴 분량이었다.
“난 둘이 이 야밤에 싸우는 줄 알고 나왔잖아.”
“내가? 형이랑?”
“그래서 더 안 믿겨서 나온 거였지.”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내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영훈을 욕하는 학생들과 말다툼하는 장면이었으니까. 영상에 찍힌 걸 보니 우리 둘 다 정말 제대로 몰입해서 연기하고 있었다. 연습하는 순간만큼은 문승빈이 아니라 한영훈이었다.
“1화 언제 방송하냐, 이거 클로버들한테도 보여 주고 싶다.”
“내일이 첫 촬영이니까 방송되는 건 멀었다~”
“하… 당장 공개하고 싶은데, 어디 한번 꾹 참아 봐야지.”
“나도 그거 보내 주라.”
“형한테요?”
“어. 영상으로 보니까 신기하네.”
“그쵸? 저도 한 십 분 넘게 보다가 이건 남겨야겠다 싶어서 찍었잖아요.”
강도현이 바로 영상을 전송했고, 유현이 형은 신기한 듯 영상을 돌려 보고 또 돌려 봤다.
‘감독님께 한번 말씀드려 봐야겠네.’
처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카메오로라도 잠깐 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욕심이 점점 커져만 갔다.
* * *
유현이 형과의 연습 후 간단히 아침을 먹고, 다 같이 회사로 향했다. 콘서트를 준비하는 첫 회의가 바로 오늘이었다. 보통 20-25곡으로 이뤄지는 콘서트 특성상 곡을 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제껏 나온 앨범이 3개였기에 전곡을 다 할 수밖에 없었다. 순서를 어떻게 정할지가 문제였을 뿐.
“자, 그럼 하나, 둘, 셋 하면 뽑는 거다?”
“하나, 둘, 셋!”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지금 이 뽑기였다,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빨간색 누구야?”
“난 파란색!”
“헐, 대박. 유현이 형이랑 윤빈 형, 같은 팀이네요?”
“재봉이가 노란색이야?”
“네!”
그렇다, 지금 우리는 유닛 무대를 정하는 중이었다. 노란 공을 뽑은 재봉이가 카메라 앞으로 달려가 공을 보여 줬다. 공 뒤에 손을 펼쳐 초점 잡는 거까지, 이제 완벽하게 카메라에 적응한 모습이 기특하면서도 아쉬웠다.
‘전에는 얼굴 가려서 초점 잡았는데…….’
“승빈아, 너랑 나랑 또 같은 팀이다.”
잠깐 과거 회상에 잠긴 사이, 지운이 형이 웃으며 빨간 공을 흔들었다. 첫 콘서트에서의 첫 유닛 무대를 형과 함께 하게 되다니. 이번 앨범 유닛곡에 이어서 유일하게 똑같은 조합이니, 이건 진짜 운명이었다.
“도현이 형이랑 둘이 무대를 한다니.”
“재봉이랑 도현이도 새로운 조합이네?”
“셋은 완전 형 라인이잖아요.”
“그러게. 근데 무대를 같이 하는 건 또 처음이라-”
확실히 뽑기로 유닛 조합을 정하다 보니, 신선한 조합이기는 했다. 데뷔하고 공식적인 첫 유닛 무대다 보니 일부러 뽑기를 선택했다. 멤버들끼리 골랐다고 했다가는 이뤄지지 않은 조합에 대한 분노가 아쉬움을 뛰어넘을 수도 있었으니까. 이미 이번 앨범에도 유닛곡이 담겼으니, 두 가지 유닛 무대를 볼 수 있기도 하고 말이다.
‘물론 나는 둘 다 지운이 형이랑 하지만-’
“과연 저희가 어떤 무대를 준비할지 기대해 주세요!”
“근데 이거 나갈 때는 이미 콘서트하고 나서 아니야?”
“아, 그렇네. 그럼 여러분, 저희 유닛 무대 잘 보셨나요?”
천연덕스럽게 멘트를 바꾸는 박재봉이었다. 각 유닛별로 내일까지 곡을 선정하기로 하고, 콘서트 회의를 이어 갔다. 오늘 유닛 무대 다음으로 중요한 안건은 바로 오프닝곡이었다. 크리드로의 첫 콘서트이자 해외 투어의 시작이므로, 그 중요함의 무게가 상당했다.
“다들 오프닝으로 생각하던 곡 있어?”
“나는 무조건 넥스트 월드!”
“나도!”
가장 먼저 나온 이름은 역시나 넥스트 월드였다.
“나는 레디!”
“대박! 형, 저도요!”
“오, 괜찮은데?”
“크게 넥스트 월드랑 레디가 후보인 거 같은데, 고른 쪽 이유부터 들어 볼까?”
오늘도 중재를 맡은 MC는 유현이 형이었다. 가끔 유현이 형은 리더 추가 수당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선우, 너는 왜 넥스트 월드가 좋아?”
“사실 신세계로 하고 싶었는데, 그건 이미 팬 미팅에서 한 번 썼잖아.”
“아무래도 그렇지.”
“그래서 우리가 우승한 곡이기도 하고, 강렬하게 시작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오케이. 그럼 재봉이는?”
“저도 비슷하기는 한데, ‘비로소 도착한 유토피아’라는 가사가 있잖아요. 클로버와 함께하는 콘서트가 유토피아니까, 오프닝으로 딱일 거 같아요.”
“오- 재봉이 말 잘하는데?”
강도현이 기특하다는 듯 웃었다. 장난기 가득한 말투는 여전했지만, 이제는 박재봉도 저놈 맘을 아는지 웃어넘겼다.
“그러는 도현이, 너는? 너도 넥스트 월드 편이야?”
“나는 고민 중이긴 한데, 넥스트 월드가 오프닝이면 좋긴 하지.”
“왜?”
“제일 빡세잖아. 저거 뒤에 했다가는 우리 다 죽어.”
아, 다들 뭔가 깨달은 표정이었다. 콘서트에 있어서 체력 분배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근데 오프닝부터 달려도 죽는 건 마찬가지 아닐까?”
윤빈 형이 입을 열었다. 형은 레디 파였다.
“그럼 윤빈이 너는 왜 레디를 골랐어?”
“나는 레디랑 고를 연달아서 하면 좋을 거 같아서.”
“맞아, 나도 딱 저 생각이었어.”
지운이 형이 맞장구를 쳤다.
“신나기도 하고, 딱 오프닝에 맞는 가사잖아. 준비 다 끝났고 이제 어디 한번 가 보자고.”
“누가 윤빈이한테 밈 알려 줬어?”
“형, 누구겠어요.”
자긴 절대 아니라는 듯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이미 모두의 시선이 강도현을 향하고 있었다. 심지어 카메라까지 어느새 강도현을 클로즈업하고 있었다.
“와- 다들 이렇게 나온다고?”
“암튼 그래서 저는 레디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깔끔하게 넘기는 윤빈 형이었다.
“저도 레디가 좋을 거 같아요.”
“오, 승빈이도? 그럼 딱 반반이네?”
“네. 첫 콘서트인 만큼, 뒤로 갈수록 점점 고조되는 분위기가 좋지 않을까 해서요.”
“그것도 그렇긴 하지.”
“이거 이러다 유현이 형을 설득하라 되는 거 아냐?”
“그러게. 유현이 형이 고르는 쪽이 이기겠네.”
“형은 뭐가 좋을 거 같아요?”
유현이 형은 MC에서 결정자로 순식간에 바뀐 위치에 잠깐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어디 다시 한번 매력 어필 좀 해 보겠어?”
“와- 유현이 형, 이렇게 나온다고요?”
“뭐, 어떻게 한 소절 불러 드려요?”
그 후로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재봉이는 저쪽에서 넥스트 월드 하이라이트 안무를 추고 있었고, 윤빈 형은 레디를 부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쪽 팀이 다 시끄러운 사람들이다 보니 우리 팀이 점점 밀리고 있었다.
“다들 그만- 오프닝 정하다가 하루 다 가겠어.”
결국 매니저 형의 제지를 받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다들 눈감고 원하는 곡에 손을 들기로 했고, 마침내 결정된 오프닝곡.
“오프닝 곡은 총 4표를 얻은 레디!”
“예스!”
“와, 유현이 형 레디 고른 거예요?”
박재봉의 실망 가득한 목소리에 유현이 형은 답지 않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니? 나 넥스트 월드 골랐는데?”
“네?”
유현이 넥스트 월드를 골랐는데, 어떻게 레디가 뽑혔지?
“매니저 형, 이거 결과 조작된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 정확하게 4명이 레디를 골랐는걸?”
“우리 중에 지금 배신자가 있다는 건데-”
“투표의 묘미는 익명성에 있는 거란다, 재봉아.”
“도현이 형이네!”
“어허, 지금 형을 모함하는 거야?”
강도현이 눈썹을 찡긋거렸다. 내뱉은 말과는 달리 전혀 위압감 없는 표정이었다. 범인은 강도현이 확실했다.
“진짜 이상한 형이야-”
박재봉의 절규를 마지막으로 그렇게 오프닝곡 정하기가 끝이 났다. 장장 30여 분 만에 이뤄진 쾌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