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할 거면 두 번 데뷔 안 함-255화 (255/346)

255화

드라마 첫 대본 리딩은 촬영을 통해 추후 비하인드 콘텐츠에 활용된다. 그런데 촬영 중단까지 요청한다니, 너무 주제 넘는 행동이었을까. 정 감독의 눈에 거슬렸다면 큰일이었다. 하지만 이 감독을 믿어 보기로 했다. 내가 알던 정 감독은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강했다. 작은 역할에도 가능성이 보인다면 작가들과 상의해서라도 더 큰 역할로 만드는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그거까지 노린 건 아니었지만, 기대해 볼 만했다.

“승빈 씨, 튀고 싶어서 여기 왔나요?”

“아, 아닙니다.”

“태주가 이렇게까지 반응해야 하는 이유가 궁금한데.”

나는 당황하지 않고 내가 준비했던 태주의 캐릭터 해석에 대해 말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이었다. 사실 정 감독도 쉽게 나를 자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파아란’은 그가 명성을 회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참여한 드라마였고, 그는 이 드라마를 통해 무조건 성공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드라마계의 신의 손으로 불리던 그가 야심차게 준비했던 전작 ‘모두다 하하하’는 황금 시간대 편성과 최고의 배우진으로 큰 주목을 받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흥행에 처참히 실패했다. 그가 아이돌을 투입하자는 투자사들과 제작사의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겠지.

정 감독은 내 해석을 무표정으로 듣고는 별다른 말 없이 대본 리딩을 이어 갔다. 그다음부터는 대사가 없어서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그게 더 고역이었다. 차라리 더 화를 냈다면 오히려 편했을 텐데.

“오늘 리딩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한 명 한 명 90도 인사를 하며 더 우렁차게 인사를 했다. 오재성도 턱을 꼿꼿이 세우고 내 인사를 받아 갔다. 어찌 됐건 간에 현장에서도 만날 사람들인데 밉보이면 피곤해지니까. 마지막으로 자리를 정리하던 정 감독이 나를 불러 세웠다.

“문승빈 씨.”

“네, 감독님!”

“지금보다 더 출연할 스케줄 돼요?”

“…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아서. 태주라는 캐릭터… 작가랑 더 상의해 보려고 하는데.”

순간 등줄기부터 소름이 돋았다. 정 감독과 작업했던 회귀 전이 떠올랐다. 그때도 내 캐릭터 해석을 듣고는 바로 대본을 고치던 형이었다. 회귀하고 완전히 떠나 버린 인연이라고 생각했는데, 희망이 보였다.

“스케줄은 확인해 봐야겠지만, 무조건 가능하게 만들겠습니다!”

“준비 잘해 가지고 올 자신 있죠?”

“네!”

뒤에서 지켜보던 김민영과 유현재의 얼굴에는 경악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너 진짜…….”

“배짱이 미쳤구나?”

하긴, 정 감독이 한 번 삐끗했다지만 저렇게 눈 하나 깜짝 않고 말대꾸를 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게다가 주연도 아니고 10분 분량이 전부인 배역이라면 더더욱.

“아니, 나는 저 감독님이 얘 말을 수용한 게 더 공포야.”

“너, 근데 연기 한 번도 안 배웠다는 말 사실이냐? 이미지 메이킹, 뭐 그런 거 아니고?”

“전 아이돌만 준비했어서…….”

“타고났다 이거지?”

“아, 누나. 그렇게 말하면 제가 뭐가 돼요-”

“노력도 안 했지만, 천재인 아이돌. 뭐 그런 콘셉인 거야? 진짜 드라마 찍냐?”

“누나가 그렇게 말하는 정도면 저 꽤 잘했나 봐요?”

“허…….”

김민영은 할 말을 잃은 듯 특유의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여간 능글맞아졌어. 귀여운 맛이 다 사라졌네.”

“제가 말했잖아요, 저 그렇게 안 순진하다고.”

“간다. 안 깨지게 잘 준비해 와. 추천한 사람 안 부끄럽게.”

“당연하죠!”

또 다른 시작이었다.

* * *

마지막으로 리허설하는 순간까지 얼떨떨했다. 내일이면 이 넓은 공간이 온통 클로버로 가득하겠구나, 응원봉으로 채워질 공연장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형, 제가 비록 전석 매진에 올인을 했다지만 아직도 안 믿겨요.”

“나도. 안 오는 팬분들 없겠지?”

나와 지운이 형, 박재봉은 벌칙을 면했지만, 강도현과 선우 형은 꼼짝없이 무반주 섹시 댄스를 추게 생겼다. 둘이 선예매 전석 매진 소식을 들었을 때 반응을 카메라 영상으로 남겨 뒀는데 이것도 팬 미팅 중에 공개할 예정이었다.

잠시 멍하니 관객석을 바라봤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긴장도 되지만 그보다 기대가 더 컸다. 그리고 조용히 어깨에 손을 얹는 이가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지운이 형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벌칙 안 걸려서 다행이다. 그치?”

“맞아요. 벌칙 걸렸으면 너무 부끄러울 거 같아요. 이렇게 넓은 곳에서…….”

“여기 다른 가수분들 콘서트할 때 온 적 있거든. 그때는 이런 데서 공연할 거라고 상상도 못 했는데.”

“저도 상상도 못 했어요.”

그 말 뒤엔 형과 함께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하루 빨리 이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다. 숙소에 돌아와 모두 일찍 잠이 들었지만 나는 한동안 잠들지 못했다.

* * *

“새삼 네가 홈마인 게 신기하다, 혜진아.”

“이번에 슬로건 진짜 잘 뽑았지? 아, 안녕하세요~ 이름이?”

슬로건 현장 수령과 재고 현판을 위해 문스트럭과 K, 레빗드림은 일찍이 공연장에 도착했다. 레빗드림 역시 슬로건과 우치와를 판매하고 있었다.

“야, 확실히 여름이라 우치와가 좋네.”

“그니까. 응원하다가 더울 때 쓸 수 있고.”

“그나저나 A랑 정연이는 잘 끝났대? 이벤트 때문에 새벽에 미리 가서 준비했다며.”

“진짜 찐 사랑임……. 걔네 내일도 그거 한다잖아. 아예 집 안 들어가고 근처에 숙소 잡았대.”

대화를 듣던 K는 저 둘도 만만치 않은데 사돈 남 말 한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슬슬 입장해도 될 듯?”

“응. 공연 10분 전이다.”

데뷔곡인 신세계를 첫 무대로 팬 미팅의 화려한 막이 올랐다. 멤버들 모두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첫눈을 본 강아지들처럼 무대를 돌아다녔다.

“승빈이 완전 붕방 강아지 아니냐고…….”

문스트럭은 씨큐와 스태프들의 눈을 피해 쏜살같이 셔터를 눌렀다. 다행히 양옆이 승빈이 최애였고, 슬로건과 플래카드로 열심히 숨겨 주며 환상의 팀 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

“클로버! 저희 잘 보여요? 3층도 잘 보이죠?”

승빈은 2층, 3층에도 눈을 떼지 않고 틈틈이 팬 서비스를 했다. 넓어진 공연장만큼 더 많은 사랑을 받는 거 같다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데, 문스트럭은 가슴 한편이 찌르르 울리는 느낌이었다.

“저희가 정말 많은 무대, 또 재밌는 게임도 준비했으니까 기대 많이 해 주세요!”

승빈의 말처럼 정말 다양한 무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웨이브의 애플 체리 팝 반주가 나올 땐 정말 광란의 현장이었다. 그 큰 공연장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모두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옆 사람에게 이게 진짜냐며 묻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문스트럭 역시 들고 있던 카메라를 던져 버릴 뻔했으니까.

[Apple 같은 네 눈을 봐

반짝이는 네 입술 마치 Cherry

또 다시 Pop Pop 뛰는 내 하트]

품이 큰 교복 와이셔츠에 넥타이, 반바지에 반양말에 스니커즈까지. 완벽한 하이틴 감성의 스쿨 룩이었다. 거기에 볼캡이 얼굴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예쁘게 스타일링했으니 사람들이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간중간 전광판에 원샷이 잡힐 때마다 놓치지 않고 윙크하거나, 애교 부리는 등 끼를 부리니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문스트럭은 촬영 중임을 잊을 정도로 목청껏 소리를 질렀고, 현장 소리는 다 지우고 음원을 깔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X친, 승빈아!”

“반바지… 넥타이…….”

승빈이 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스타일링은 정유현이었다. 체크 재킷에 반쯤 풀린 넥타이 그리고 보기 드문 반바지여서 정유현 팬들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문스트럭 역시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장면이라며 정유현을 힐끔 쳐다볼 정도였다.

다음 곡은 애플 체리 팝과는 상반된 파워풀한 무대였다. 아이디와 이드 버전의 무대를 보는 느낌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까지 잘할 일이냐며 화를 내고 싶었다.

게임과 토크 타임에는 멤버들의 비공개 사진과 영상을 공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팬들의 니즈만 쏙쏙 골라 넣은 듯 내추럴한 모습, 연습 중 장난치는 영상, 이른 아침의 모습 등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벌칙자가 선정된 당시의 영상이 공개됐을 때 모두 의문이었다.

“무슨 벌칙이지?”

“사실 저희가 내기를 했거든요. ‘팬 미팅이 언제 매진 될 것인가’로요.”

“저랑 지운이 형, 재봉이는 당연히 선예매 때 매진 될 거다! 유현이 형이랑 윤빈이 형은 일예 때 매진 될 거다, 강도현이랑 선우 형은 매진은 안 될 거라고 했어요.”

“저는 클로버의 힘을 믿었죠.”

“저는 저희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오…….”

벌칙이 무반주 섹시 댄스라고 하자 관객석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내 강도현과 박선우가 무반주에 맞춰 끈적한 섹시 댄스를 추기 시작했고, 이성을 잃은 함성이 들리는 한편 현타가 왔는지 손으로 얼굴을 숨기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웃는 소리도 섞여 있었다.

팬 미팅은 조금의 쉬는 시간도 없이 촘촘하게 구성되었다. 게다가 멤버별 개인 무대도 진행됐다. 승빈의 개인 무대 반주가 나오자 현장에 있던 승프들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크림에서 승빈이 노래 추천 받는다는 메시지에 승빈의 팬들끼리 몇 가지 곡을 선정해서 총공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중 가장 반응이 좋았던 곡이 ‘Love of the galaxy’다. 청량하지만 어딘가 아련한 밴드 사운드와 시원한 고음, 우주를 주제로 한 가사가 일품인 곡이기 때문이었다.

* * *

드디어 솔로 무대 순서가 왔다. 긴장되는 순간이지만 호흡을 크게 내쉬었다. 곧 반주가 시작되고 팬들의 함성 소리가 인이어를 뚫고 들어왔다.

[수억 개의 은하 그 속에서

우리가 만난 건 어쩌면 운명

먼지만큼 작은 존재일지라도

우리가 만났다는 사실만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우주의 법칙]

처음에는 긴장되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눈을 감았지만, 이 가사를 부를 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눈앞에 보이는 1만여 개의 응원봉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내가 손을 흔드는 방향대로 응원봉이 움직였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벅차오르는 곡과 가사 때문이었을까, 심장도 터질 듯 뛰고 있었다. 이 순간을 평생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눈으로만 담기에는 휘발되어 버릴 기억이 너무나도 아까운 장면이었다.

[잠시 방황해도 두려워 마

어쩌면 태초의 약속

길을 잃더라도 우리는

이 별에서 다시 만날 거야]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다. 행복하다는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내 표현력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나를 보며 울고, 웃는 얼굴, 반짝이는 눈빛.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꿈만 같았던 팬 미팅도 어느새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다. 우리가 준비한 이벤트 영상은 성공적이었다. 팬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공개되어서 더 큰 반응을 얻었다. 팬들에게 감동을 줬다는 것으로 모두가 뿌듯해하던 그때, 갑자기 팬들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음향 사고인가 싶어 고개를 돌린 순간, 처음 느껴보는 감동에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두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믿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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